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86화
286화. 마스터즈(5)
쇼(show).
관객이 있는 스포츠는 사실상 쇼와 같다. 이 말에 지영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지영은 게임 자체를 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게임 중에 뭔가 특별한 기술을 걸거나, 셀레브레이션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상대 스타일에 따라 전략을 짜고, 그 전략에 맞춰 경기를 승리로 이끌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지영의 경기는 재미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일반인의 눈엔 그래도 뭔가 화끈해 보이겠지만, 전문가들의 시선에서 지영의 경기 스타일은 솔직히 좀 질리는 편이다.
“스타일이 또 변했군.”
“오른쪽으로? 강이 저런 자세를 서던 적이 있었나?”
“상대가 왼쪽이면, 보통 저런 자세를 취하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주 자세에 비하면 경기력이 떨어질 텐데.”
“예전에 자세 바꿔서 하는 건 봤는데, 저렇게 해도 잘하더군.”
“그럼 자세로는 약점을 잡기 힘든 건가?”
“그렇다고 봐야지.”
전문가들, 그리고 각 대표팀과 함께 파견된 전력 분석관들은 황금세대를 철저하게 해부할 요량으로 왔다. 이유는 현재 세계 유도를 접수 중인 일본 대표들을, 황금세대가 모조리 꺾었기 때문이었다. 작년 가노컵을 마지막으로 활동하지 않은 1년간, 황금세대에게 박살이 난 전적이 있는 일본 선수들이 올해 세계를 휩쓸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선수가 73의 미야모토 신지였다.
새로운 천재, 신성.
그렇게도 불린 그는 체급의 제왕이 될 자질이 충분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지영이 쉬는 동안 아시아 선수권과 세계 선수권까지 쓸어가며 그랜드 슬램의 바로 앞에 선 미야모토 신지였다. 그런데 그런 미야모토 신지에게 유일하게 패배를 안겨준 선수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강지영이었다.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중인 일본의 신성이 유일하게 넘지 못한 벽.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무릎을 꿇게 만든 벽.
그게 바로 강지영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물론, 다른 팀의 전력 분석관들은 지영의 경기를 카메라에 담는 건 물론이고, 현장에서 경기를 보며 아주 세세하게 파악해두려 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참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경기를 분석하면, 따로 고정된 스타일이 없다는 것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보면 딱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보니 이건 정도가 심했다.
“반칙 관리 능력이 엄청나.”
“맞아. 절대 자기가 먼저 반칙을 받는 경우가 없어. 받더라도 무조건 함께 받고, 아니면 상대만 받게…… 이런.”
반칙에 관한 얘기를 하는 중인데, 아니나 다를까 조쉬가 먼저 반칙을 받았다. 분명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강지영이 취한 공세를 조쉬가 당황해 물러나면서 수비적으로 돌아섰고, 심판은 이미 이전에 한 차례 경고성 그쳐를 한 적이 있었기에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조쉬에게 지도를 줬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조쉬는 이걸로 두 개군.”
“그래. 나는 하나. 상대는 두 개. 강지영 선수의 필승 전술 중 하나지.”
그들은 동시에 깨달았다.
조쉬가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긴 하지만, 강지영을 역시 넘기는 힘들 거라고. 그들은 시합 운용 아래에 밑줄을 죽죽 그었다. 현대 유도는 무조건 넘기는 걸 잘한다고 해서 우승하긴 힘든 경기로 바뀌었다.
굉장히 공격적으로 변하고, 다리를 잡는 게 사라지면서 기술을 걸 수 있는 영역 자체를 좁혀놨다. 그래서 예전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심하는 게 아니라, 다리 잡기는 아예 빼고 방어를 해도 되니 더욱더 기술 공방은 치열해졌다. 넘기는 건 더 힘들어졌는데, 더 공격해! 이런 식으로 분위기 자체도 변했다는 뜻이다.
이후에도 많은 룰 개정이 있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개선이 바로 효과와 유효를 없앤 거고, 반칙패를 네 개에서 세 개로 줄였다는 거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경기 시간을 5분에서, 4분으로 줄였다.
이게 뭘 뜻하는 거냐면.
미친 듯이 치고받으라는 뜻이었다.
고작 4분이다.
잠깐 잡고 있으면 30초가 훅 지나가는 게 유도인데, 5분에서 4분으로 줄였다. 이렇게 되니 경기 운용이 굉장히 중요해졌다. 그냥 본능에 의지해서만 시합하다 보면, 어느 순간 게임이 끝나게 되는 거다.
그런데 저 강지영은, 그런 시합 운영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 절대 불리하게 잡혀주지 않네.”
“등을 내주는 것도 그래. 일견 보면 잡기가 귀찮아서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저렇게 잡혀주고 기술을 받으면, 카운터를 치기도 쉬워.”
“그렇다고 잡기를 못 하는 것도 아니야. 팔다리가 워낙에 기니 작정하면 잡기도 충분히 유리하게 할 수 있고.”
“기술도 깔끔해. 그것도 오른쪽 왼쪽, 허리기술과 업어치기 전부 수준급이지.”
“발기술도 그렇고.”
“체력은…… 죽여주는군.”
“멘탈도 엄청나. 이렇게 팬들이 환호하는데, 조금도 흔들리지 않잖아.”
“…….”
“…….”
하아.
대화를 주고받던 그들은 어느 순간 한숨을 내쉬었다. 한 선수의 약점을 찾기 위한 대화였는데, 하다 보니까 한 선수를 찬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거다.
“약점이 없군.”
기술, 체력, 운용, 멘탈까지.
뭘 어떻게 해도 A 아래를 줄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이는 지영의 경기를 보던 모든 전문가의 의견이 거의 같았다.
“저런 실력을 갖춘 유도 선수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라니. 세상 참 불공평하군.”
“하하하.”
누군가의 말을, 누군가는 마른 웃음으로 받았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진짜 말도 안 되는 천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압도적이었다. 경기 시간 3분. 현재 조쉬가 지도 2개, 강지영이 지도 1개를 받아서 거의 백중세처럼 보이지만 관중이 아닌 전문가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저건, 지영이 그냥 압도하고 있는 경기였다.
* * *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긴 했다.
하지만 지영은 그 생각을 철회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팬에게 쇼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러다 지면, 그것만큼 멍청한 것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지영은 생각을 다시 되돌려서, 본래 스타일대로 조쉬를 요리했다.
조쉬는 지영처럼 주력 자세가 왼쪽이었다.
그래서 평범하게 그냥 잡으면 서로 맞잡는 상태가 되는데, 지영은 맞잡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서서 짝잡이 상태를 일부러 만들었다. 조쉬는 준결승까지 올 만한 실력이 있었다. 매력적인 영국 신사는 유도 실력이 확실히 제법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준결승까지 올 만한 실력자는 맞지만, 냉정하게 보면 조쉬는 대진 운이 좋았다. 지영이 2회전에 붙었던 마르띤과 비슷하다. 3회전에 붙었던 안데르손과 붙여놓으면 90% 이상의 확률로 안데르손이 이길 거라고 지영은 생각했다.
그러나 지영은 방심하지 않고 조쉬를 몰아갔다.
조쉬는 체력이 좋았다. 그리고 힘도. 그걸 바탕으로 한 힘 유도 플레이어였다. 지영은 그런 선수를 상대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힘과 체력이 주력 베이스인 선수들은 참 신기하게도.
‘기술이 떨어지지.’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꼭 그런 경우가 많았다.
기술과 운용이 좋으면 반대로 체력과 힘이 조금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전체적인 밸런스를 지영이나 친구들처럼 올려놓는 케이스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올려놓은 선수들은 보통.
‘체급의 최강자 중 한 명이 되는 경우가 많고.’
다 잘하는 선수의 승률이 더 높은 건 지극히 당연한 거다.
맛테!
다시 심판이 그쳐를 선언했다. 그리곤 다시 도복을 고치라고 했다. 반칙? 아니었다. 일종의 경고성 그쳐다. 한 번 숨들 고르고, 제대로 맞붙으라는. 그러지 않으면 반칙을 주겠다는 신호와 같았다.
이런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건 당연히 지영이 아닌, 조쉬였다. 조쉬는 벌써 지도가 두 개였고, 그걸 알고 있기에 좀 몸이 닳은 느낌이었다. 각오가 선 눈빛이다. 그 눈빛을 확인한 지영은 긴장을 끌어올렸다.
저런 눈빛을 했을 때는, 질 때 지더라도 뭐라도 한번 해보고 지겠다는 뜻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시작과 동시에 엄청난 공세를 펼칠 것이다. 되치기, 카운터, 반칙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화끈하게 덤벼들 가능성이 적어도 99%이니, 이때 잘못하면 별 기술 같지도 않은 기술에 걸려 날아가는 수도 있었다.
지영은 아직까지 그런 경험은 없었지만, 실제 대회에서 그렇게 다 이긴 경기를 놓치는 게임은 매 대회마다 한두 번은 꼭 나왔다.
‘그리고 이번에 그게 내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
모든 스포츠의 가장 큰 적이 방심이라는 걸 생각하면, 각오와 함께 긴장을 끌어올려 나쁠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메!
심판의 시작 사인에 맞춰, 조쉬가 빠르게 접근했다. 거의 경보처럼 다가와 손을 뻗는 조쉬. 지영은 그걸 쳐내지 않고 그대로 잡게 뒀다. 조쉬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가슴 깃을 잡더니 툭툭 챘다. 뒤로 물러나며 채는 폼이 딱 업어치기인데, 지영은 기술 각을 좁히려다가, 그러지 않았다.
냄새가 났다.
아니나 다를까 업으려는 폼에, 발기술을 먼저 쓸어왔다. 하나에서 둘까진 업어치기 모션인데, 셋은 오히려 역으로 다시 돌며 안다리를 쭉 쓸어왔다. 이성진이 오늘 보여줬던 안다리였다. 그리고 그 낌새가 보이는 순간 지영은 이미 반걸음 물러났다.
물러나는 동작 자체가 미끼였다.
안다리는 말 그대로 내 다리 안쪽으로 상대 다리 안쪽을 감아서 중심을 무너뜨리는 발기술이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상대와 내가 붙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지영이 거리를 강제로 벌리면?
포기하는 게 맞다.
그런데 이미 기술을 쓰던 중이라 조쉬는 아예 엎어지듯이 안다리를 쓸어왔다. 어떻게든 기술을 걸어 넣을 작정인 거다. 하지만 멈췄어야 했다. 발기술을 걸 때 이렇게 엎어지듯이, 상대에게 안기듯이 기술을 거는 건 상대와 내가 아주 가까이 밀착했을 때뿐이다. 그때는 내 체중으로 상대를 미뤄 어떻게든 기술을 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멀찍이 떨어진 순간에 이렇게 기술을 걸면, 그건 그냥 앞으로 엎어지며 상대의 품에 안기는 걸로 기술은 끝이 난다. 제대로 힘을 못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콩.
아가씨를 안아 들듯이 상체가 돌아갔고, 그대로 매트에 내려섰다.
잇폰!
아주 가볍게 콩, 하고 등이 찍혔지만 너무 정직하게 대자로 찍히는 바람에 여지가 없는 한판이었다. 지영은 자신의 품에 안긴 조쉬를 그대로 중심만 틀어 찍어눌렀다. 화려한 기술은 아니지만, 이것도 한판은 한판이었다.
후.
짧게 숨을 내쉬고 일어난 지영은 도복을 고쳤다.
우와아!
지영이 이겼다는 걸 안 팬들이 다시 환호를 보내왔다. 지영은 그런 팬을 한차례 바라보긴 했다. 계속 시합에 집중하며 외면했는데, 이렇게 자신의 승리를 축하해 주는데 끝날 때까지 외면하는 건 또 아닌 것 같아서였다.
꾸벅.
승자 선언을 받고 나와 지영은 가볍게 팬들이 앉은 쪽에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더욱 큰 환호가 나왔다.
“수고했다. 자, 여기 수건이랑 물.”
“감사합니다.”
김재정 코치에게 수건과 물을 받은 지영은 대기실로 들어가 도복을 벗었다. 땀이 흥건하게 났다. 수건으로 땀을 닦고, 보온성이 좋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도복 하의는 어쩔 수 없어도, 상의는 시합이 끝나고 이렇게 계속 관리해 주는 게 좋다. 그러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떨어진 체온 때문에 몸살이 달려들 수도 있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지영은 두툼한 패딩까지 챙겨 입고, 장갑까지 낀 다음 다시 밖으로 나갔다.
친구의 준결승을 보…….
쿠웅!
우와아!
보기 위해서였는데.
땀을 닦고 나간 순간, 이미 임효중의 상대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상대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지영은 무조건 한판임을 확신했다. 그다음 점수판을 확인했다. 3분 30초. 고작 30초 만에 상대를 허벅다리로 한 바퀴 돌려세운 임효중이었다.
황당하다 못해, 멍하니 임효중을 올려다보며 허무해하는 상대. 그리고 그 앞에서 도복을 고쳐 입는 임효중. 하여간 정말, 완벽한 경기력이었다.
그렇게.
전원 결승 진출.
황금세대는 죽지 않았음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