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39화
239화. 방송(8)
사람은 살면서 보통, 자신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일을 정하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는 일.
누군가는 명예.
누군가는 음식.
누군가는 사랑.
누군가는 우정.
또 누군가는 돈.
오욕칠정이니, 몇 대 욕구이니, 이런 것들이 한 인간의 삶에 가장 앞선 부분에서 그 인간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좋지 못한 색을 가진 욕구나 욕망이라면 얼굴이란 가면 뒤에 숨어 은밀히 활동하겠지만, 드러내도 상관없는 색이라면 대놓고 앞에서 움직이기도 한다.
예술가라는 족속들은, 후자다.
그들은 대놓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다. 내면의 욕망에 충실하지 않은 예술가는 솔직히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게 범죄에 연관된 게 아니라면, 만인의 지탄을 받을 게 아니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루이비통 SNS를 통해 올린 유도복과 무도복은, 그런 의미에서 어떤 디자이너인지 모를 이의 욕망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였다. 즉흥적이었지만, 디자이너의 바람대로 만들어진 작품. 그러니 그 디자이너는 그 작품을 만드는 영감을 준 지영에게 구애했지만.
지영은 그걸 거절했다.
그런데도 이게 올라왔다는 건, 공개적인 러브콜이었다. 거기에 아예 지영의 이름까지 언급했으니 누굴 향한 것인지도 정말이지, 확실했다.
유도복과 무도복.
그리고 지영, 강.
찾아보면 분명 딱 한 사람만 올라오리라.
그런 의미에서 일단 루이비통은 화제성 하나만큼은 제대로 지펴놓고 시작했다. 공개 러브콜. 오만하고 고집 센 패션 브랜드가, SNS를 통해 공식적으로 한 사람에게 구애했다. 예술가들이 가진 순수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오히려 이는 지영을 불쾌하게 했다.
그들이 욕구에 충실한 만큼, 지영도 욕구에 충실했다.
지영은 명예, 패션, 돈, 예술 이런 것보다 우선시되는 게 바로 생동감이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감정. 뭐 이런 거다. 지영에게 존재하는 10년의 삶. 그 삶은 살아 있었으나, 죽어 있던 삶에 가까웠다.
육체는 불편하더라도 살아 움직였지만.
정신이 죽었다.
친구의 죽음과 빼앗긴 일상 때문에.
그래서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그렇게 살다가 다시 기적처럼, 정말 기적처럼 기회를 얻었다. 그런 지금, 지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바로 원하는 것을 할 때, 내가 살아 있다는 생동감이 지영은 가장 중요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절대 빠질 수 없는 친구들과의 우정이었다. 우정이 뭔 생동감이냐고? 이전 삶에서 친구들을 처참한 모습과 한 명은 하늘로 떠나보내고 나면 뭘 하더라도 그런 충족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영에게 유도보다도 우선시 되는 게 바로 친구들이었다.
이런 친구들과 정한 게 바로 연희고 아이돌이 가진 이미지를 훼손하지 말자는 거였다. 아이돌. 말 그대로 우상이다. 바르게, 올곧은. 짜고 쳐서 만든 것도 아니고, 노려서 만든 것도 아니다. 친구들의 인성이 그랬고, 옳지 못한 것과 맞서다 보니까 연희고 아이돌의 이미지가 완성됐다.
이 이미지는 중요했다.
방송이라는 마경에 들어서서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최소한 자라나는 아이들이나 현재 중학생, 고등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조사 결과도 있었다.
화려한 것에 현혹되지 않은 아이돌의 모습.
그게 아이들에게도 올바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강한결은 이걸 지키길 원했다. CF를 찍는다고 이 이미지가 단숨에 훼손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한 번 찍는 순간 그래, 니들도 결국 어쩔 수 없지. 하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할 거고. 이렇게 형성된 여론은 연희고 아이돌의 이미지에 지대한 타격을 줄 것이 자명했다.
그래서 찍지 않았다.
그리고 이 얘기는 사실 제법 유명한 얘기였다. 루이비통이 이걸 몰랐다? 뭐 모를 수도 있었다. 그들 정도 되는 양반이, 그렇게까지 섬세할 거란 생각은 안 드니까.
하지만 그래도 거절했으면, 곱게 물러나 주는 게 솔직히 보기 좋았다.
그런데 대놓고 SNS에 저렇게 홍보를 때려 버리면, 지영도 난감해진다. 왜? 저 행동 자체가 어쭈? 튕겨? 빠직! 이마에 혈관 마크 씨게 달고 나온 감정적 행동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즉, 자존심에 상처받았을 수도 있단 소리다.
그게 아니라면, 진짜 러브콜이라는 건데 어느 것이든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여, 루이비통을 걷어찬 연예인.”
자신과 똑같이 잠을 거의 못 잤을 게 분명한 강서훈이 피곤 가득한 몰골로 지영을 놀렸다. 지영은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그러는 이유가, 고작 새벽 한나절 만에 지영 때문에 연예란이 도배되었기 때문이었다.
루이비통의 공개 구애.
새벽부터 올라와 연예란을 가득 메운 기사의 헤드라인이었다. 뭐, 여기까지만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지영이 거절했다는 것까지 기사로 올라가 있었다.
루이비통의 구애를 거절한 유일한 인간!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인간이란다.
하긴, 그 브랜드의 이름을 생각하면 거절이란 건 있을 수도 없었다. 선택받지 않고, 오직 선택만 하는 고고한 자존심에 아마 큰 충격을 받았을 것 같았다. 이런 기사들 또한 그쪽에선 달가워하지 않을 게 분명한 느낌이었다.
“지영아, 너 진짜 거절했어?”
오늘 입을 의상을 만져주던 미술팀 직원의 말에 지영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니요? 생각 중인데요. 이렇게 말해봐야 기사로 나간 건 이미 되돌리기 힘들었다. 당장 이렇게 의상을 만질 땐 전체적으로 조율해 주는 임은진이 자리에 없는 이유도,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지영은 인터뷰를 안 하지만, 임은진까지 기자들과 담을 쌓고 사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오히려 필요한 것들은 그녀가 먼저 기자들에게 토스해 주고 그랬다. 애초에 기자와 매니저는 서로 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루이비통을 찬 남자. 배우. 도 아니고 인간.
강지영을 맡은 게 임은진이라 그녀의 전화는 지금 불이 나고 있었다.
“아니, 왜?”
어제도 질리게 들은 질문.
지영은 대답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웃었다. 자신들의 행동에 뭔 숭고한 사명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고, 오히려 중2병 같은 발상의 발로였지만, 그래도 그걸 막 떠벌리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정했고,
‘정했으니 지키는 거지.’
간단하잖아?
그 간단함을 지키는 과정이 너무 힘겨워서 그렇지.
의상을 입고 나오자 시선이 와락 달려들었다가, 절레절레 흔들린 다음 되돌아갔다. 지영은 한숨을 내쉬고는 액션 팀으로 갔다. 오늘은 액션 합이 꽤 있다.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제대로 준비해야 할 때였다.
한참 합을 맞췄다.
짧게, 영상에서는 20초 정도 이어진다.
그러나 그런 짧은 신이 무려, 10분의 티저에서 상당히 많이 나온다.
애초에 재는 호위무사이고, 그렇기에 액션이 정말이지 많았다. 그래서 선이 유려한 액션 영상이 계속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니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대충대충 하다가 목검에 한 대 제대로 맞기라도 하면, 근육은 물론 뼈까지 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될 수도 있고, 합을 맞추는 선배님들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사건을 피하려면, 철저한 연습만이 올바른 길이었다.
그렇게 한창 합을 맞추고 있는데 임은진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지영의 근처를 서성였다.
지영은 직감적으로 또 뭔가 터졌구나.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미안한 표정을 한 임은진이 다가와 폰을 보여줬다. 이번에도 SNS였다. 자신에게 영감을 준 존재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며, 한국행 비행기 표를 보여준 한 인물. 루이비통의 디자이너 루이 수잔이었다.
수석디자이너는 아니지만, 그래도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였다. 그런 디자이너 수잔이, 직접 지영을 만나러 한국행을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지영은 이 디자이너에 대해 모르지만, 지영은 이 디자이너가 이번 일을 벌인 주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곱지 않은 마음이었다.
“누나. 나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요. 아니 이분은 저한테서 뭘 봤다고 이러는 걸까요?”
지영은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임은진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지영아. 나한테는 이 여자나, 너나 똑같이 느껴져.”
“네?”
“둘 다 이해하기 힘들거든.”
“…….”
아…….
지영은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이해하긴 했다. 그리고 인정도 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누구나 원하는 루이비통이었다. 이 바닥에 종사하면 누구나 루이비통의 CF를 찍길 원하고, 모델이 되기를 원하고, 앰배서더가 되기를 원하고, 뮤즈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란 인간이 그런 인간이 되기를,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비록 수석 아티스트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속 디자이너가 대놓고 구애했는데 그걸 깨끗하게 걷어차 버린 지영이나, 한번 차였다고 곧장 한국행을 선택한 루이 수잔이나, 임은진이 보기엔 똑같이 이해가 안 가는 부류였다.
이해 못 할 족속들.
임은진이 봤을 때, 확실히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에 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누나 나 때문에 괜히 시달리네요.”
“후우, 이것도 일이지. 그래도 신박해. 새로워. 내가 살다 살다 루이비통을 깐 연예인을 맡게 될 줄은 몰랐거든. 하하. 정말 안 할 거지?”
“네.”
“그럼 어떻게 해? 이 사람 아마 회사로 바로 쳐들어올 것 같은데.”
“음, 만나긴 해야겠죠.”
그래도 거물이었다.
아무리 루이비통의 수석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해도, 루이 수잔의 영향력은 고작 이틀 만에 이 정도로 크게 문제가 되게 할 정도로 컸다. 이런 사람을 문전박대로도 모자라 아예 만나주지 않는다? 이건 오히려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무조건 역풍 맞을 거야.’
그러니 만나긴 해야 했다.
“연락 오면, 누나가 약속 잡아주세요.”
“후우, 알았어.”
어차피 만나게 된다고 해도 지영이 해줄 말은 정해져 있었다. 솔직히 어제 이 문제가 나왔을 때 톡방에서도 이 얘기가 안 나온 게 아니었다. 강한결도 지영도, CF는 아예 빠지기로 했기 때문에 둘은 아무런 충돌 없이 이번 문제도 합의를 봤고, 다른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그러니 직접 찾아왔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변해서도 안 됐고.
지영은 마음을 비우고, 다시 연습에 집중했다. 합을 맞추고, 신을 하나씩 소화하기 시작했다. 대대적으로 힘을 주고 들어가는 작품이라서, 티저 길이가 어마어마했다. 이렇게 되면 솔직히 본 작품을 시작도 안 한 입장에서 배우들이 힘들 수밖에 없지만.
24년 최고 기대작으로 평가되는 나의 무사님이기에 다들 이 정도 수고로움은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지영은 이틀간, 그렇게 티저 촬영에 집중해서 보냈다.
루이 수잔은 한국에 도착해서, 바로 지영을 찾지 않았다. 한국이란 나라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다며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더니, 주말쯤 슬쩍 지영의 소속사에 연락했다. 딱 봐도 내가 널 찾아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목을 매는 건 아니다! 이렇게 항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토요일,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루이 수잔은 전형적인 프랑스 여성이었다.
나이는 40대 중반이지만, 관리를 철저하게 한 탓에 조금도 그 나이로 보이지 않았고, 걸치고 있는 것은 당연히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옷이었다.
루이 수잔은 통역과 지영은 임은진과 함께 앉아서 서로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프랑스식 인사를 준비해왔지만, 그냥 손만 살짝 잡는 악수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국의 고풍스러운 멋이 가득 나는 룸에서 마주 앉은 지영과 수잔.
수잔은 지영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통역에게 뭐라고 따다다다, 얘기했다. 그 말에 통역이 큼큼, 목을 다듬고 지영에게 그녀가 한 말을 전했다.
“당신은 정말, 루이비통에 아무런 관심도 없군요?”
그 말에 지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자이너 말고, 돗자리를 펴야 하는 거 아닌가?
지영은 신기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게 느껴져요?”
그러자 거치고 거쳐 돌아오는 대답.
“너무 잘 느껴져서, 혼란스럽답니다. 마치 자기가 무슨 인터넷 통신 판매 업체에서 나온 것처럼 느껴진다는군요.”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그러면서 루이비통 무늬가 화려하게 들어간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콕 찍는 수잔. 고집스럽고, 괴팍한 불여우의 느낌이 확 풍기는 그 모습에 지영은 깨달았다.
거절하는 것도 어째, 쉽지 않겠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