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20화
220화. 가노컵(14)
기본.
유도의 기본은 뭘까.
간단하다.
가볍게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축구는 골대 안에 골을 넣는다.
농구는 림 안에 골을 넣는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게 기본이다.
이게 무너지면, 축구는 축구라 할 수 없고, 농구는 농구라 할 수 없다.
“저게 어떻게 한판이오! 심판 당신 눈깔은 삐었소!”
살벌한 외형을 한 미국 코치가 심판을 향해 삿대질하며, 거친 폭언을 던졌다.
미국 코치가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자부 경기에서 일어난 편파 판정. 그게 문제였다.
-48㎏.
여자부 최고 경량급 경기에서 일본의 에이스 도나키 후나와 프라도 지오반니가 첫판에 맞붙었다. 도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도나키 후나의 압도적인 우세라 예상이 되었던 경기였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미국의 지오반니가 시작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세로 몰아붙이더니 1분 만에 절반을 따냈고, 2분이 지났을 무렵 반칙까지 두 개를 먹였다.
가노컵 이틀 차 첫 이변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실력을 보자면 지오반니가 위였다. 성적 자체는 감히 도나키 후나에게 비벼볼 수도 없지만, 둘의 상성에서 지오반니가 너무 좋았다.
‘저 정도면 그냥 저격수지.’
지영이 두 선수의 경기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로 상성에서 차이기 심하게 났다.
그래서 지영은 이대로 경기가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끝날 거라고 예상했던 경기가 괴상하게 터져버렸다. 도나키 후나의 억지 업어치기에 지오반니가 조금 돌아가긴 했다. 그런데 그건 진짜 아무리 잘 줘봐야 절반 정도였다.
“와, 진짜 빡칠 만하네.”
이성진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진짜 그 정도였다. 정말 아무리 좋게 봐줘야, 정말 좋게 봐줘야 절반 정도 줄 수 있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어폰에 손을 댔던 주심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잇폰을 외쳤다.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덩치 살벌한 미국의 코치가, 심판에게 악을 쓰면서 삿대질을 하기 시작한 거다. 유도에서 심판의 권위? 말해 뭐할까. 솔직히 말하면 다른 종목보다도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게 유도심판들이었다.
그런 심판의 권위에, 미국 코치는 아예 이성을 잃은 것처럼 나왔다.
뻐킹! 부터 시작해서, 미국 영화를 보면 나오는 거친 욕설이 마구 터졌다. 그러곤 그걸로도 화가 안 풀리는지 경기장으로 아예 난입했다.
“이리 와! 당신 눈깔을 뽑아 럼에 씻어서 다시 넣어주지! 그리고 똑바로 다시 보라고! 그게 어떻게 한판인지!”
“겨, 경비!”
“경비고 나발이고 이리 오라고! 빌어먹을! 감히 성스러운 매트 위에서 그딴 저질스러운 판정을 해? 당신들도 마찬가지야! 부심이잖아! 다시 돌려보면 알 거 아니야! 지오반니가 넘어간 게 절반인지 한판인지!”
코치의 거친 폭언에 움찔한 주심들이 물러나고, 경비가 달려와 미국 코치를 잡지만 글쎄…… 막을 수 있을까? 미국 코치의 등치는 적어도 장대호만 하다. 그리고 유도를 했던 게 분명한 만두귀에, 스킨헤드에다가, 문신까지 새겼다.
겉모습만 보면 유도를 하다 때려치우고 할렘에 들어가 총질을 하는 영락없는 갱의 모습인 거다. 정장 차림의 마피아도 아니고, 할렘가의 갱 말이다. 그런 코치를 경비가 막는다?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미국 코치에게 오히려 경비가 질질 끌려다녔고, 그런 코치를 피해 심판들이 도망쳤다.
시합은 당연히 중지됐다.
이건 촌극도 아닌, 진짜 미친 짓이었다.
저 멀리 단상에 앉아 있는 맥스웰 심판 부회장은 자국의 코치가 날뛰는데도 오히려 팔짱을 낀 채 무시무시한 눈으로 심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무하네, 진짜. 와, 나도 저렇게 판정받았으면 시합하기 싫겠다. 안 그래, 지영아?”
“네. 저건 진짜, 양아치죠.”
어제도 우승한 안승희 선배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했다. 스태프들이 찍은 경기 영상을 아무리 돌려봐도 도나키 후나의 업어치기는 제대로 걸리지 않았다.
지오반니가 넘어가긴 했지만, 어깨 쪽이 살짝 닿은 정도였다. 이게 뒤에 있어서 안 보였다면 모를까, 그럴 수도 없는 게 심판이 바로 지켜보는 방향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잘못 보고 싶어도 잘못 볼 수가 없는 위치였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심판 판정이 나왔을까?
말해 뭐하나.
자국의 선수가 1회전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면하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리고 도나키 후나는 유망주를 넘어선, 일본 여자 유도의 에이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럼 좀 더 믿었어야지.’
에이스는 원래 그런 존재들이다.
믿고 맡겨주면, 성과를 보여주는. 그런데 일본은 도나키 후나를 믿지 못했다. 아직 시간도 1분가량 남았는데, 그 1분을 기다려 주지 않은 거다. 그리고 그게 자국의 에이스의 가슴에도 진하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쯔쯔, 도나키 후나 멘탈 나갔네.”
정수원의 안타까운 말에 지영이 아직도 난리를 부리고 있는 미국 코치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봤더니 진짜 멘탈이 아예 나가 있었다. 무릎을 꿇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 말도 안 되는 판정으로 경기를 개판으로 만들어버린 데, 자신이 좋든 싫든 일조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모욕을 가득 받은 모습이 된 도나키 후나는 이내 천천히 일어나더니, 그대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온몸으로 보이는 기권 의사였다. 놀란 일본 코치 한 사람이 급히 도나키 후나의 팔을 잡았는데 그녀는 강하게 그 팔을 뿌리치고는 그대로 경기장 밖으로 나갔다.
지영은 안쓰러웠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분이다?
축구나 농구, 야구는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한 골을 먹혀도, 1점을 뺏겨도 경기는 계속 이어지니까. 정해진 룰에 따라 90분이 지나거나, 9회가 지나거나, 10분 4쿼터가 지나기 전까진 게임이 계속 이어지니까. 스코어 제 스포츠는 오심이 일어난 순간 게임이 끝나는 경우는 막판 하프 타임이나 듀스 정도에서 나온 오심 정도를 빼면 없으니까.
그러나 유도는 아니었다.
유도는 한판으로 모든 게 끝나버리는 경기였다. 그렇기에 오심이, 진짜 선수에겐 뼈아프게 작용하는 경기였다. 지금은 그 오심이, 역으로 수혜를 주려던 선수를 저격했다.
저렇게 경기장을 벗어나 버리면 심판이 어떤 판정을 안 했어도 당연히 반칙패였다. 반칙패, 혹은 기권으로 처리되는데 이 경기는 아직 심판이 판정을 내리기 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지오반니가 올라가겠네.”
“판정 전이니까?”
“네.”
안승희의 말에 지영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것처럼, 확실히 미국 코치의 난동이 좀 가라앉은 뒤 이어진 판정은, 지오반니에게 손을 들어줬다. 그렇게 경기 하나가 끝나고, 강제로 휴식에 들어갔다.
장내 분위기가 너무 뒤숭숭했다.
미국 코치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밖으로 나오는 주심의 머리에 손을 권총 모양으로 만들어 갈겨버리는 행동까지 했다. 진짜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습. 그 심판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리고 일본 유도 협회도, 미국 코치에게 크게 뭐라고 하지 못했다.
왜?
하필이면…… 미국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가장 무섭고, 두려워하는 나라 미국. 하필이면 건드려도 미국 선수를 건드려 버리는 바람에 일본 협회 사람들은 거의 행패에 가까운 미국 코치의 행동에도,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장내 분위기는 미국 코치의 편이었다.
브라이언 오셔란 이름을 가진 미국 코치는 그런 장내 분위기까지 등에 업고, 일본 협회를 아예 탈탈 털었다.
물론, 무사할 수는 없었다.
행패를 부린 대가로 퇴장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퇴장당해도 사이드만 못 보는 거지, 관중석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체육관은 경기장과 관중석이 매우 가까워서 크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충분히 들릴 거리였다.
그렇게 한차례 혼란이 휩쓸고 지나갔던 대회장은 30분 정도가 흐르고 나서야 좀 진정됐다.
이윽고 다시 시작된 경기.
소란이 일었지만 그래도 경기는 경기다. 이 대회를 위해 짧게는 10일, 길게는 한두 달 정도를 준비한 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시합을 시작했다. 지영은 경기를 지켜보면서, 오늘 혼란이 오히려 좋게 작용했다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잘됐던 거네요.”
“어? 뭐가?”
“아까 브라이언 오셔 코치의 행동이요. 봐요. 심판 판정 엄청 클린해졌어요.”
“아하. 그건 나도 느끼고 있다.”
정수원의 말에 다들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들은 보면 안다.
지금이 반칙을 받을 타이밍이 맞는지. 넘어간 모습을 보고 저게 절반인지, 아니면 한판인지 보면 딱 각이 나온다. 아주 애매한 경우도 있는데 선수가 애매한 경우라면 심판도 비슷할 거고, 그럼 어떤 판정을 내려도 솔직히 고개를 끄덕일 만했다.
다른 종목도 심판의 성향에 따라 판정이 다르듯, 유도도 심판의 성향에 따라 판정이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거의 통일된 것처럼 보였다.
브라이언 코치로 인해 심판들이 긴장하고, 전부 정석에 가까운 판정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지영이 보기엔 이게 기회였다.
가뜩이나 한국 대표팀은 지영 때문에 일본 협회에 찍혀도 제대로 찍힌 상태였다.
이런 상태라 솔직히 오늘도 심판에게 시달리겠구나란 생각을 당연히 했다. 임효중이 아까 1회전에 이긴 것도 너무 진짜 시원하게 돌아가 한판을 안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준 거지, 조금만 덜 돌아갔어도 분명 절반을 줬을 거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기 힘들어졌다.
또 이상한 판정을 했다가는 진짜 뭔 일을 당해도 당하겠구나란 생각들이 심판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느낌이 딱 자리 잡았으니, 이제 막 들어가는 강한결의 판정도 분명 제대로 줄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나.
쿵!
와자리!
제대로 뚝 떨어진 안다리 되치기에 심판은 주저하지 않고 절반을 줬다. 지영이 보기에도 딱 절반 짜리 기술이었다. 점수를 정말 후하게 주는 심판이거나, 아니면 금전 버프 좀 받은 경우가 아니면 한판이 나오기 힘든 각도로 넘어간 되치기였다.
“판정 죽이네! 강한결 파이팅!”
“한결아 파이팅!”
이성진이 신나서 강한결을 응원했다.
뒤에서 어제 시합을 뛰었던 선배들도 같이 응원했다. 물론 당연히 지영도 응원했다.
강한결 파이팅!
힐끔, 그쳐 사인에 일어나 자리로 돌아오며 강한결이 이쪽을 힐끔 봤다. 선하면서도, 다부진 눈매였다. 참 신기했다. 도복을 안 입은 평소에는 정말 세상 이렇게 착해 보이는 눈이 있나? 싶으면서도 도복을 입으면 날카롭고, 예리하고, 단단한 느낌까지 주는 눈빛이 된다.
시종일관 똑같은 지영의 눈빛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주는 강한결이다. 그러나 그래서 친구의 눈빛은 언제나 든든했다.
강한결의 상대는 미하일 이고르노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였다. 그런데 그런 미하일 이고르노프를 강한결은 시작부터, 절반을 앞선 채 4분이 다 지날 때까지 시종일관 압도했다. 반칙도 하나도 받지 않았고, 먼저 딴 절반을 끝까지 지켜냈다. 안정감이 있었다. 이성진의 시합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좀 느껴지는데, 역시 주장은 달랐다.
“편안…….”
지영의 말에 이성진이 편안…… 하고 따라 했다. 정말 편안한 경기였다.
강한결이 승자 선언을 받고 나오자 저 건너편 관중석에서 꺄악! 꺄악! 하는 소녀 팬의 합창이 들렸다.
황금세대 중에서는 정말 임효중과 함께 만찢남의 정석이 뭔지 보여주는, 훈훈하다 못해 살벌한 외모이다 보니 연희고 아이돌을 보러 온 팬들이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도 이해가 갔다. 어제는 왜 그러지 않았느냐고?
살벌한 극우들의 기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영은 그게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팬의 응원이 경기력에 도움이 되는 건 맞지만, 어제 붙었던 하시모토 소이치는 굳이 그런 버프가 없어도 충분했던 상대였다.
잠시 뒤, 가장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황석이 나와 밭다리 한판으로 1회전을 통과하면서, 악몽에 불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