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15화
215화. 가노컵(9)
똘망똘망한 눈빛이었다.
지영은 상대 선수의 나이가 자신보다도 어린 선수라는 걸 알았다. 한국으로 따지면 이제 고작 고1이다. 잘해야 유망주 소리 들을 나이인데, 리선호는 인공기를 가슴에 달고 국제대회에 나왔다.
선수가 없어서?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북한 유도가 예전보다는 약해졌다고 해도, 아예 명맥이 끊긴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분명 실력으로 당당히 국기를 가슴에 달았을 거다. 다만, 그런 선수의 눈빛치고는 매우 순해서 좀 놀라웠다.
북한 선수라서 악과 깡을 넘은 독기로 똘똘 뭉친 눈빛일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머리도 빡빡 민 리선호는 신지의 후배 마사루가 생각나기도 했다.
둘의 이미지는 확실히 비슷했다. 하지만 시합 스타일은 달랐다. 마사루는 타고난 힘을 베이스로 둔 스타일이고, 예선전에서 봤던 리선호는 철저한 기술파였다.
안뒤축에서 업어치기, 안다리에서 업어치기, 업어치기 모션에 안다리 등. 기술 연결을 이용해 상대를 제압했다. 물론 대충대충 거는 것도 아니었다. 제대로 걸리면, 제대로 던졌다. 기술에 자신이 있는 선수다.
북한에서는 쉽게 나오기 힘든 스타일이었다.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를 슥슥 문지른 리선호가 지영과 시선이 마주치니까, 씩 웃었다.
세상 순박한 웃음이었다.
어린이가 주인공인 힐링 영화의 포스터로 써도 될 만큼.
지영은 그 미소를 비슷한 미소로 화답해 줬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다른 쪽 패자전이 끝나고, 심판이 입장했을 때 지영의 눈빛은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리선호도 마찬가지였다. 순박한 미소는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다부진 표정으로 지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은 변화였다.
심판이 입장했다.
처음 지영에게 불리한 판정을 했던 여자 심판이었다. 그러나 지영은 이번 판만큼은 심판 걱정을 크게 하진 않았다. 한국이나 북한이나. 어차피 일본이 둘 다 싫어하는 나라니까. 하지만 그래도 안심하진 말자고 스스로 다짐할 때쯤, 시합이 시작됐다.
하지메!
인사하고 들어가기 무섭게 시작되는 시합.
리선호가 악! 짧게 기합을 내지르곤 천천히 접근해 왔다. 오른쪽 자세. 지영처럼 왼쪽 오른쪽 전부 설 줄 알고, 기술도 전부 찰 줄 아는 친구다.
올라운더 플레이어.
그러나 지영은 리선호의 시합을 보면서 단점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리선호는 다 찰 줄 알았지만, 깊이가 없었다. 업어치기는 할 줄 안다고 끝이 아니다. 계속해서 연마하며 자신만의 타이밍을 잡는 게 중요했다.
선수마다 시합 중 기술 리듬은 다 달랐다.
업어치기를 노리는 타이밍이 정해져는 있어도, 미세하게 스타일과 선수의 성향에 따라 업는 타이밍이 다르다.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걸 조정하고, 정하는 거야 당연히 선수의 몫이다.
그런데 리선호는 기술이 그냥 주입되었고, 다른 기술로 또 넘어가고 이걸 반복한 것 같았다.
그래서 깊이가 없었다.
업어치기를 이성진만큼 할 수는 있어도, 타이밍을 이성진만큼 잡을 수는 없었다. 허리기술도 마찬가지였다. 임효중처럼 허벅다리를 찰 수는 있어도, 그처럼 타이밍을 뺏을 수는 없어 보였다.
입력된 기술을, 아 지금 차라고 했지? 하는 상황에 맞춰서 거는.
당연히 이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효과를 봐서 리선호는 준결승까지 올라왔다. 이게 곧, 통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영은 이미 그걸 파악해서, 타이밍을 철저하게 죽였다.
툭.
“윽!”
제대로 소매 깃을 잡았다고, 딱 봐도 업으려고 하는 게 눈에 보여 몸을 돌리는 순간 소매를 뜯어냈다. 소매가 뜯어지자 얼른 자세를 풀고 일어나지만 이미 원심력에 바닥에 한차례 엎어진 뒤였다.
맛테!
심판은 그쳐를 선언하고, 리선호에게 지도를 줬다.
너무 확실하게 들어간 위장 공격이라 이걸 지도를 주지 않으면 심판 자질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할 테니 안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도를 하나 먹인 지영은 특유의 운영으로 리선호를 압박했다.
지영은 철저한 운영전으로 갔다. 잡기 싸움을 좀처럼 하지 않는 지영이 운영을 위해 잡기 싸움을 강하게 걸어오자 확실히 리선호는 당황한 티를 냈다. 아마, 데이터에 없어서인 것 같았다. 지영의 잡기는 사실 그렇게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팔이 길어서 아주 유리한 포지션을 잡는다는 것 자체가 리선호에겐 압박이었다.
툭! 투둑!
강하게 지영의 손을 뜯어낸 리선호가, 재차 앞으로 나왔다.
맛테!
하지만 그때 심판은 그쳐를 선언했다. 그러곤 도복을 고쳐 입으라고 신호했다. 지영은 도복을 고쳐 입으며 숨을 골랐다. 잘 정리가 되지 않아 띠를 풀러 다시 매면서 지영은 사이드를 확인했다.
“지금처럼! 하나씩 받아도 되니까 차분하게 가자!”
“…….”
김재정 코치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도복을 다시 고치라고 한 걸 보니 다시 지도를 줄 타이밍이었다. 지영은 띠를 다 매고 시간을 확인했다. 1분 30초. 얼마 남지 않았다.
시도!
시도!
역시 지도가 들어왔다.
이걸로 지영은 지도 하나, 리선호는 지도 두 개다.
“밀리지 말고 배운 대로! 차분하게 해보라우!”
영화나 드라마에서 듣던 이북 말투의 코칭에 리선호가 고개를 다부지게 끄덕이고는 하지메 사인에 맞춰 다시 다가왔다. 하지만 사이드가 좋았다고 하기는 뭣했다. 밀리지 않는다고 해서, 지영을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현재 지도가 두 개다. 그럼 승부를 보는 게 맞았다.
지금처럼 밀리지 않기만 하면, 결국 지도가 하나씩 더 들어갈 거다.
그럼 그걸로 승부는 끝이다.
리선호는 착했다.
이 순진한 친구는 사이드를 철석같이 믿고, 밀리지 않으려고만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회 중이다. 그것도 준결승전.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거다.
그렇게 잡기 싸움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그제야 북한 측 코치는 알아차린 것 같았다.
“들어가라! 들어가라우!”
경험의 부재다.
혹은, 능력의 부재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순진한 리선호는 이전과 똑같이 시합을 운용했고, 심판은 결국 맛테 사인을 냈다.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이 된 리선호.
알려준 대로, 시키는 대로 하다가 제대로 덜미를 잡혔다. 심판은 밖의 부심과 잠시 상의하더니,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지도를 양쪽에 하나씩 먹였다. 이걸로 리선호는 지도 세 개, 지영은 두 개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반칙패 선언.
시키는 대로만 하다 보니 스스로 시합을 풀어나갈 줄은 모르는, 주입식 훈련의 폐해였다. 시합을 끝내고 나와보니, 이미 준결승 A조는 시합이 끝나 있었다. 저 끝에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하시모토 소이치를 보니 승자가 누군지 바로 알 것 같았다.
“고생했다. 여기 물.”
“감사합니다.”
김재정이 건네준 물을 받아 목을 축인 지영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우우!
우우우!
야유와 함께, 갑자기 물병이 훅 날라왔다.
그에 깜짝 놀란 김재정이 얼른 지영을 막아섰다.
우우! 꺼져라! 조센징!
다른 말은 이해 못 해도, 조센징이란 단어는 확실하게 들었다.
결승전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런 야유를 받으니 이겨야 할 이유가 더욱 확실하게 올라갔다. 가노컵 첫날, 마지막 한일전이기 때문이었다. 여자부도 신기하게 전부 반대쪽 시드였다.
그런데 한국이 결승에 올라간 체급은 일본이 반대쪽에서 떨어졌고, 또 일본이 올라간 체급은 한국이 떨어져서 여자부는 한일전이 성사되지 않았다. 이성진 쪽은 상대가 떨어졌고, 정수원은 이미 결과가 나왔다.
그러니 오늘 마지막 한일전이고, 결승전이었다.
그것 때문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영은 좀 놀랐다. 이런 야유는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지영아. 얼른 나가자. 얼른!”
“…….”
얼른 지영은 김재정의 보호를 받으며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솔직히 좀 놀랐다.
당혹스러웠다.
우우! 하는 여유는 예상했지만, 솔직히 진짜 뭘 던질 줄은 몰랐다. 통로 안쪽으로 들어간 지영은, 이제 안전해지니까 저들이 충분히 그럴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일본을 까는 기사가 자신 때문에 외신에서 터졌다. 세계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일본의 기준에서, 프랑스에서 터진 기사는 모욕 그 이상이었다.
그러니 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영은 나라의 명예를 땅바닥에 처박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우르르 몰려와 대회를 막지 않은 것만 해도 어쩌면 다행이었다.
‘이건 진짜 뭐라고 말해야 할지…….’
화가 나면서도, 씁쓸했다.
대기실에 들어가자 어떻게 알았는지, 이성진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야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지?”
“맞지도 않았어. 안에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어?”
“누나들이 말해줬지.”
아, 스태프들.
지영에게 야유와 함께 물병이 날아들 때 이미 연락이 갔나 보다.
“괜찮아. 안 다쳤어.”
“하, 다행이다. 아 근데 진짜! 아 씨! 진짜. 미친 새끼들 아냐?”
이성진이 안도하다 말고 짜증을 와락 쏟아냈다.
지영은 얼른 친구의 어깨를 안았다.
“야, 진정해. 다치지도 않았다니까?”
“그건 다행인 거고. 그런데 그렇다고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지!”
“알아. 아는데.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냐. 그러니까 일단 시합에 집중하자. 응?”
“하아……. 씨이.”
이성진은 지영의 말에 진정하긴 했지만, 억울하고 화난,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게까지 지영이 다독이고 나서야 이성진의 표정이 좀 풀렸다. 지영도 친구들을 끔찍이 생각하지만, 친구들도 친구들을 끔찍이 생각했다.
벌컥.
문이 열리고, 한바탕하고 온 게 분명한 전기정 감독이 안으로 들어왔다.
“강지영이, 괜찮지?”
“네.”
지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전기정 감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많은 대회를 돌아다녔지만, 오늘처럼 일본이 진심으로 쓰레기처럼 나온 적은 처음이다.”
헐.
감독직에 있는 전기정이 대놓고 일본을 쓰레기라 비판했다. 이건 분명 뭔가 또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시합 중인 그걸 얘기해 주진 않을 것 같고.
“성진아. 지영아. 결승전 심판 아마 장난 아닐 거다. 그러니까 잡기 싸움은 최대한 피하고 기술로 승부 봐라. 특히 강지영. 넌 아마 특히 심할 거야. 한판 던져도 절반 줄 거고, 반칙은 아예 안 줄 가능성이 높아. 이번에 너 심판 배정받은 거 보니까 다 친일 성향 심판이더라.”
“네.”
“그래도 자신 있지?”
“네, 그럼요.”
지영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이미 예상한 거니까.
종주국에, 개최지 버프까지 먹은 일본이 진심으로 지영을 찍어누를 생각이라면 결승전 심판 판정은 진짜 장난 아닐 게 분명했다. 이렇게까지 도를 넘어선 행동을 하는 걸 보고 나니 그 정도는 너무 쉽게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그래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심판의 불리한 판정과 함께 시합을 치르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회귀와 동시에 협회장의 엇나간 손자랑 때문에 이미 충분히 심판에게 시달렸었다. 하지만 그렇게 심판에게 시달렸어도, 그 누구도 지영을 꺾지 못했다.
지영도 백으로?
아니, 오롯이 실력으로 그 모든 외압을 꺾었다.
무패.
지영은 회귀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무패의 전적을 달리는 중이었다.
하시모토 소이치 선수가 잘하는 건 안다.
충분히 세계랭킹 1위에 자리 잡을 만큼 실력자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유도는 랭킹이 전부가 아니었다. 랭킹이 전부였다면 오노 쇼헤이가 하위 랭커인데도 올림픽 2연패를 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고, 반대로 생각해도 2연패의 오노 쇼헤이가 지영에게 무력하게 박살 난 것도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러니 랭킹이나, 이전 대회 성적은 참고사항일 뿐, 절대적인 건 절대 아니었다.
“성진아.”
“네! 감독님!”
“넌 하던 대로만 해라. 보니까 업어치기 한 방이면 끝날 것 같더라.”
“네!”
“대신, 굳히기 조심하고. 잡히면 무조건 졸리거나 꺾인다고 생각해. 굳히기가 진짜 장난 아니니까.”
“넵!”
전기정 감독은 지영과 이성진을 한 번씩 보더니, 고개를 끄덕여 주곤 밖으로 나갔다. 이제 여자팀 대기실로 가는 중일 거다.
패자전 결승을 시작하겠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본래라면 밖에 나가서 구경하며 대기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나가면 또 야유가 무지막지하게 들려올 건데, 자신은 둘째치고 시합 중인 선수에게 민폐였다. 그래서 지영은 대기실에서, 결승전을 시청했다.
경기장에 있는데도.
결승전에 올라갔음에도.
처량하게. 대기실에 처박혀 구경하는 신세였다.
“흐흐.”
그래서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지영답지 않은 그 웃음에 이성진이 흠칫, 하고 뒤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물러나면서 이성진은 깨달았다.
자기 친구는, 이런 상황일 때 더욱 불타오르는 친구라는 것을.
그리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깜빡이가 팍! 켜진다는 것을.
어째 친구에게 그날이 도래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