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88화
188화. 나의 무사님(2)
차가 거의 서울 약속 장소에 도착해 지영은 일단 이시카와 사오리의 문제는 미팅이 끝난 뒤에 더 세세하게 생각해 보기로 하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 지영은 차를 시켜놓고,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귀화 문제 좀 알아보고 올게. 혼자 있어도 괜찮지?”
“네, 그럼요. 부탁드릴게요.”
“응.”
역시 든든한 분이다.
든든한 임은진이 나가고, 지영은 이제 드라마에 관한 생각을 했다.
나의 무사님.
이연이 벌써 몇 달을 기다린 작품이었다. 작년 이맘때 예인으로 살어리랏다를 찍으면서 이연과 친분을 맺었다. 그리고 종방연 때 같이 작품을 하자는 얘기를 들었고, 어린 독지가 기사가 나가고 이연을 만나 대본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뒤 정은정과도 만났다.
정은정 작가는 지영이 봤을 때도 천재였다.
그녀의 천재성은 지영과는 다른 궤에 있었다. 오직, 상상하는 것. 단순히 상상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상상에 무지막지한 디테일을 입히고, 그 상상을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갈 수 있는 것.
이런 재능은 정말 흔치 않았다.
상상만으로도 모든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마 모든 소설가나 작가들의 로망이나 꿈과도 같은 재능이었다.
그런 꿈같은 재능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그런 재능을 토대로 쓰인 나의 무사님은, 솔직히 지영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글이었다. 지영도 상상이라면 제법 잘한다. 어려서부터 시작한 이미지 트레이닝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나와 선수의 정보를 토대로,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지한 뒤에 시작되는 이미지 트레이닝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훈련법이었다.
지영은 대회에 나갈 때면 요주의 선수의 시합 영상을 그 선수의 전부가 머릿속에 입력이 될 때까지 본다.
아시아 선수권 대회를 준비하면서, 오노 쇼헤이의 시합 영상은 거의 100번쯤은 봤던 지영이었다. 그렇게 봐야만 그가 거는 기술, 그가 기술을 거는 타이밍, 그가 약한 부분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시작되는 이미지 트레이닝은, 여태껏 지영을 배신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런 훈련이 익숙해서 지영은 나의 무사님 대본을 보면서, 하나의 세계를 머릿속에 그렸다. 아니, 정확히는 저절로 그려졌다. 소설과 대본은 분명 다른 데도, 지영은 그 세계를 확실하게 봤다. 그게 정은정 작가의 능력이었다.
다른 작가들의 대본과는 궤를 달리해서, 대사와 묘사도 묘사지만 마치 소설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전공도 아니시고.’
나중에 들은 건데, 정은정 작가는 공대를 나왔다.
인문학도, 순문학과도 거리가 먼 환경이었다. 그런데도 성공한 작가가 됐다는 건 애초에 재능의 영역이었다.
어쨌든 정은정은, 대본을 쓸 줄 몰랐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대본을 찾은 뒤, 그냥 비슷하게 자신의 상상을 풀어냈다. 그게 데뷔작이 되고, 차기작이 되고, 최소한 평타 그 이상을 쳐주는 작가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게 해줬다.
‘그런데 그것도, 대본이 100% 표현되지 못해서라고 했어.’
그 말을 한 사람이 정은정의 데뷔작, 차기작 등을 계속 함께한 이연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정은정 작가가 오늘 좀 더 세밀하게 다듬어서 가져올 대본이 더욱 기대됐다. 지영이 몇 달간 시합에 집중하는 동안 정은정 작가도 시간이 남아서, 대본을 다듬었다고 했다.
대본은 10화, 딱 절반까지 나온 상태였다.
그리고 그 10화를 정은정 작가는 작가 데뷔 이후 처음으로 세밀하게 다듬겠다고 했었다. 그런 만큼 더욱 기대되는 게, 그녀가 가져올 대본이었다.
지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는 30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벌써. 이연이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연을 본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지영이 안녕! 근데 벌써 왔어?”
“네, 누나. 안녕하세요. 수업 끝나고 바로 출발했는데, 예상외로 차가 안 막혀서요.”
“그래? 잘 됐다. 오래 기다려야 하나 해서 좀 곤란하던 차였는데. 아, 맞다. 우승 축하해! 자, 이건 선물.”
“선물이요?”
보자마자 대뜸 선물을 건네서 받아서 뭔가 했더니, 영양제였다. 선물로는 부담 없이 주기도, 받기도 좋은…….
“비싼 거다?”
“…… 감사합니다.”
건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하지만 지영은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정말 비싸다고 했으면 저런 말을 하지 않을 성격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물론 가격이 안 비싸진 않을 거다. 이연 정도 되는 사람이 싸구려 영양제를 선물하진 않을 테니까.
자리에 앉은 이연이 웃으며 영양제에 관해 설명했다.
“나 다이어트 세게 할 때 먹는 거거든? 효과 좋아. 특히 어지럼증 같은 거 잘 막아주더라.”
영양제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지영은 이런 속내는 숨겼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사실 기존에 먹던 것도 그리 싼 제품은 아니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지영은 영양제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하루를 정말 타이트하게 쪼개 생활하다 보니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식단으로 최대한 채우고는 있지만, 그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먹을 수 있는 양이 거의 정해져 있는 만큼 영양분을 필요한 만큼 채우기 힘들어서 부족한 양은 영양제로 해결했다.
그래서 지영은 회귀 이후,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황금세대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철저한 몸 관리. 이들이 체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식단관, 영양제였다.
‘물론 타고난 것도 있지만.’
그리고 거기에 더해, 나이가 깡패다.
이제 고작 고3이다 보니, 체력 회복 속도가 남달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누난 잘 지내셨어요?”
음료 하나를 시키고 돌아온 이연이 자리에 앉자, 지영은 근황을 물었다.
“나? 잘 지냈지. 열심히 연습하고, 몸도 좀 만들고. 너도 너지만 나도 액션 신이 좀 많아야지.”
“힘드셨겠네요.”
지영이 그렇게 위로하자 이연은 으으, 하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너는 선수촌? 거기서 매일 훈련했다면 나는 액션 스쿨에서 아예 살았어……. 땀 냄새 이런 건 참겠는데, 아크로바틱 쪽은 아직 너무 어려워서 삭신이 말이 아니다, 진짜.”
“고생하셨어요. 나의 무사님 초반은 거의 추격전이죠?”
“응. 멸망하는 제국에서 도망치는 게 1, 2화일걸. 우린 사극에서 그 흔한 아역도 안 쓰잖아.”
사극은 보통 아역들이 1, 2화에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고,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어떤 인연으로 엮이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짠! 하고 만난다.
이때 서로 적일 때도 있고,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도와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보통 아역을 쓰는데, 나의 무사님은 시작부터 주인공이다.
이연에게 전달받기로는 애초에 아역을 쓸 생각이 없다고 들었다.
기본에서 벗어난 클리셰.
지영은 이것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시작부터 빡세겠네요?”
“그렇지. 그런데 그래도 한겨울이나 한여름 아닌 게 어디니?”
“아, 그건 좋네요.”
갑옷 소품을 걸치고 입고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촬영한다고 생각하면 뭣도 모르는 지영이 보기에도 그건 그냥 지옥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지영의 시합 때문에 일정이 밀려, 날이 선선해지는 순간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그것만 생각해도, 일단 지옥은 벗어난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걸로도 지영은 충분히 만족했다.
지영이 이 바닥은 거의 초보여도, 이 정도면 정말 감지덕지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렇게 드라마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데, 정은정 작가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이전의 미팅에서도 본 적이 없는 40대 중후반의 사내와 같이 들어왔는데, 느낌이 딱 이번 작품을 맡을 감독님 같았다. 지영이 일어나고, 두 사람이 들어오는 걸 확인한 이연도 일어나 지영의 옆으로 왔다.
사내는 지영을 보자, 만면에 반가운 미소를 가득 담고는 손을 내밀었다.
“우승 축하해요. 그리고 정말 반갑습니다. 이번에 연출을 맡은 이상익입니다.”
“안녕하세요. 강지영입니다.”
“반가워요. 하하. 자, 앉읍시다.”
두 사람이 의자에 앉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임은진과 이연의 매니저도 와서 자리를 잡았다.
혹시 이상한 요구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문제는 보통 매니저 선에서 커트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계약이야 이미 맺어서 오늘 따로 계약서를 쓰지는 않지만, 오늘은 작품 자체에 관한 민감한 얘기들이 오갈 거다.
그런 면에서 매니저 동참은 필수였다.
그렇게 인원이 다 자리 잡자, 미팅이 시작됐다.
“자, 미팅 시작해 볼까요? 일단 현재 진행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주연배우는 당연히 여기 계신 두 배우님이고, 다른 주조연으로 심수정, 강서훈 두 배우 캐스팅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조연들 캐스팅도 완료된 상태고요. 촬영장은 지금 파주 근처에 짓고 있습니다. 완공까지 2주 정도 걸릴 거로 예상되고요.”
오, 그럼 거의 다 됐단 소리다.
차분한 이상익 감독의 말에 지영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솔직히 특수한 상황으로 인기를 얻은 지영이라 이쪽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었다.
흔히, 현장이라 부르는 곳은 언제나 변수가 많아서, 좀 전에 말한 것처럼 2주 안에 안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불길한 얘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으니 패스했다.
“이제 제작발표회와 대본리딩 일정을 잡을 생각인데,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이상익 감독의 말의 끝나자마자 임은진이 손을 들었다.
“저, 감독님.”
“네, 말씀하세요.”
“제작발표회 말씀인데요. 후, 혹시 강지영 배우 상황에 대해서는 좀 아세요?”
“물론입니다. 모든 인터뷰와 공식 석상은 거절할 거라고 얘기는 듣긴 들었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설마?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쩌나, 설마가 사람을 잡아야 하는 경우인데 지금은…….
“네, 그 문제 때문에 그런데요. 음, 이걸 참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할지…….”
“혹시 제작발표회를 불참한 생각입니까?”
이상익의 질문에, 임은진은 여전히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다. 이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사나, 연희고 아이돌들의 의지는 확실해서 내부적으로는 결정이 된 사안이었다.
이런 걸 조율하기 위해 임은진이 같이 온 거긴 한데, 사실 이 문제는 지극히 난감한 문제였다.
제작발표회는 보통 연출과 작가, 그리고 주조연 배우들이 전부 참석한다.
그중 특히 주연배우는 반드시 참석하는 게 제작발표회다. 그런데 주연배우가 빠진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강지영이란 배우의 특수성이 걸렸다.
이미 언론에 호되게 당했었던 경험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본업인 유도까지 접고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기까지 했었다.
강지영의 그런 스토리는. 연희고 아이돌의 스토리는 연예계 종사자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얘기였다.
오죽했으면, 어제 입국했을 때도 공항 측의 협조를 받아 뒷길로 조용히 나가기까지 했을까.
이는 언론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런데 지영이 드라마 때문에 제작발표회에 나간다? 그건 곧 연희고 아이돌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문제가 된다. 지영이 시작하면, 다른 친구들도 공식 석상에 설 수밖에 없었다. 지영이 이미 선 걸로 명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었다.
사실 오늘 미팅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상익 감독의 시선이 지영에게 넘어왔다.
매니저 말고, 배우의 의견을 직접 듣고 싶은 것 같았다.
지영은 그런 이상익 감독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회귀 전 나이와 지금 나이를 따져도 자신보단 오래 산 사람이고, 드라마 판에서 이름을 날린 명감독으로 불리는 이상익의 눈빛은 확실히 범인의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지영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 시선을 가만히 마주 보면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참석하지 않을 겁니다.”
첨석하지 않을 생각도 아니고, 참석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아…….
그 말에 옆에 있던 이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고, 정은정 작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상익 감독의 눈매는, 대번에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