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85화
185화. 아시아 선수권(12)
아시아 선수권을 우승한 날은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지영은 오늘은 선수가 아니라, 스태프의 개념으로 시합장을 찾는다.
오늘 시합 뛰는 선수들 계체는 이미 어제 잘 끝났고, 아침에 본 친구들은 컨디션도 좋아 보였다. 어제 성적이 좋아서 그런지 다들 표정도 확실히 올 때보다는 좋아 보였다.
“지영아, 슬슬 가자!”
“어, 지금 나갈게.”
몸을 풀러 먼저 출발한 오늘 경기를 뛰는 선수들.
그러나 지영은 시합이 끝나서, 좀 시간이 넉넉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벌써 9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지영은 휴대폰과 지갑을 챙겨 가방에 담고는 이성진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로비로 내려오자 어제 우승한 안승희와 여자팀 선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합에서 입상한 선배도 있고, 입상하지 못한 선배들도 있었지만, 표정들은 전부 후련했다.
연희고 황금세대 때문에 역대급으로 주목받은 아시아 선수권 대회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지영이나 친구들은 오히려 초연한 모습이었는데, 같이 시합에 나가는 선배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시합 날이 다가오자 기사가 팍팍 올라가며 부담을 심어줬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회가 끝났다.
욕이야 먹겠지만, 잘해야 해! 무조건 우승! 무조건 일본한테만 지지 말자! 하던 심리적 압박에서 해방됐으니, 어찌 홀가분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리고 그중에서는 역시 안승희의 표정이 가장 좋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우리도 좀 전에 내려왔어. 수원 오빠는 먼저 갔으니까, 바로 가면 돼.”
“네.”
인싸 이성진은 선배들의 틈에서 쉬지 않고 떠들면서 걷기 시작했지만, 지영은 가장 뒤에서 느긋하게 걸어갔다.
일본 도쿄.
낯선 거리.
근데도 자신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건 한국이나 여기나 똑같았다. 하지만 이런 시선도 익숙해서 지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갔다. 두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자 무도관이 보였다.
일본 유도의 성지.
일본 무도의 심장.
일본 가요계의 꿈 등등.
아주 많은 의미를 가진 무도관에서 이제는 폼이 조금은 떨어졌다지만 올림픽 2연패의 일본 유도 영웅을 반칙패로 제압했다. 하루가 지난 오늘도 이는 지영에게 제법 의미 있는 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정문에서 빤히 무도관을 바라봤다.
꺄아아!
그러나 그런 상념도 지영을 알아본 팬들에 의해 곧장 깨졌다. 하지만 그래도 지영은 별로 아쉽지 않았다. 굳이 이런 거에 목매다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슬쩍 따라붙은 임은진이 팬들을 만류했다.
그러나 지영은 시간을 확인하곤, 임은진을 역으로 만류했다.
“누나 20분쯤 시간 있어요.”
“음, 그래도 한 번 해주기 시작하면 중간에 끊기 힘들 건데?”
“그래도요.”
지영은 그래도 팬에게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이는 어제 자신과 영상통화를 한 유도선수가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는 걸 보며 느낀 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주 간단한 명제.
‘팬이 없으면 스타도 없다.’
이는 연예계든, 스포츠계든 똑같았다.
응원해 주고, 환호해 주는 팬이 있어야 스타도 존재하는 법이었다. 지영이 특수한 상황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떠오르는 라이징스타가 된 것도 전부 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팬의 영역에서는, 전부 똑같다고 생각했다.
국가, 종교, 민족 갈등을 넘어서 말이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까지는 지영이 알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자기 팬이면서 이렇게 애절한 얼굴로 사인을 기다린다면, 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휴, 알았어. 20분 만이다?”
“네.”
보니까 몇 명 안 된다.
이성진은 앞서 걸어서 먼저 들어갔기 때문에 메시지를 남겨 놓고 지영은 주차장 한편에서 다시 사인을 해줬다. 선물을 주는 팬들도 있었는데, 그건 임은진이 전부 대신 받았다. 그렇게 사인을 해주는데, 한 팬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근데 어제 영상통화 해준 사오리요.”
“사오리? 사오리가 왜요?”
사오리는 어제 지영과 영상통화를 한 유도소녀의 이름이었다.
지영이 그렇게 묻자 임은진이 다시 재빠르게 통역을 해줬고, 들려오는 대답은 가관이었다.
“지금 막 사람들이 몰려가서 SNS 테러하고 있어요.”
“네?”
이건 또 뭔 소리?
지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자 그 팬은 자기 폰을 조작해 일본 SNS를 보여줬다.
“이게 다 욕이에요.”
“이게 다 욕이래.”
“…….”
아, 진짜…….
지영은 그 이유를 대번에 알 것 같았다. 어제 일본 언론에는 본국의 성지에서 무사도 정신이 꺾였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일본 유도의 영웅이, 고작 19살 지영에게 박살이 난 걸 무사도 정신 꺾였다는 말로 표현한 거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어제 영상통화를 한, 십자인대 재건 수술을 앞둔 유도소녀 이시카와 사오리는 자신이 사인해 준 도복을 SNS에 올리고, 영상통화도 했다고 자랑을 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일본 네티즌들이 몰려가 악플 테러를 가했다.
아니, 아직도 가하고 있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악플이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한국 유도소녀가 한국의 에이스를 꺾은 일본 선수에게 받은 사인 도복을 자랑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 쉽게 예상 가능했다.
“지영아, 이건 나중에.”
“네.”
일단은 사인부터 해주자.
그리고 이 문제를 생각하자는 마음에 지영은 팬들에게 얼른 사인을 해줬다. 어제처럼 밝게 웃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티 안 낼 정도로는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사인을 다 해주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영은 임은진에게 물었다.
“누나, 내가 잘못한 거예요?”
“너? 아니지. 넌 잘못 없지. 유도하는 내 팬이 수술한다고 해서 영상통화까지 걸어서 힘내라고, 재활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라고 덕담해준 것밖에 없지. 그러니 아주 훌륭한 팬서비스였어.”
“그런데 왜 그럴까요?”
“지영아. 넌 한국에서도 당해봤잖아?”
“……알죠. 아는데. 난 정말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가요.”
대체 왜 그러지?
하…….
진짜 화가 난다.
어제 너무 좋았던 기분이, 나락으로 처박혔다. 심장이 쿵쾅쿵쾅, 마치 4분 게임을 다 하고 연장전 5분을 하고 있을 때처럼 뛰었다.
지영은 미안했다.
자신은 분명히 선의였다.
그리 먼 나라는 아니지만, 그래도 유도를 하는 팬이 무릎을 다쳐서 수술하는데 자신의 사인을 받고 싶어 동생까지 보낸 그 마음 때문에, 평소에 양유진과도 잘 하지 않는 영상통화까지 걸어서 응원해 주고, 격려해 줬다.
그런데 그 새하얀 선의에, 온갖 악의가 달려들어 시꺼멓게 물들여 버렸다.
지영은 이게 정말 안타까웠다.
화도 나는데,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몸이 열이 후끈 올랐다.
“아, 누나 잠깐만요. 저 화장실 좀.”
“어, 그래. 저 앞에 있을게.”
“네.”
지영은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좀 열이 식는 것 같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그걸 아는데,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영은 일단, 시합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임효중과 강한결, 그리고 황석의 경기 날이다. 지금은 친구들 응원, 친구들의 시합 케어하는 게 먼저였다. 지영은 이 선후를 잊지 않았다.
다시 찬물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임은진이 폰을 내밀었다.
“이거 봐.”
“이게 뭔데요?”
“일본 기사. 어제 그 아이 디스하는 기산데, 여기 글자 보이지? 댓글에 이 단어 보이지? 이게 뭔지 아니?”
“음, 아니요.”
“조센징.”
“……재일교포예요?”
“응, 3세 같아.”
“아 진짜…….”
겨우 다잡았던 기분이 다시 푹 떨어졌다.
하지만 지영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누나, 일단 이것 좀 알아봐 주세요. 저는 오늘 애들 시합에 집중할게요.”
“그래, 알겠어. 다행히 예전에 일본에서 한류 유행할 때 여기서 꽤 있었거든. 인맥 있어. 그 사람들 통해서 알아볼게. 그리고 일본은 흥신소도 잘 되어 있으니까,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네, 고마워요. 근데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니까 비용은 저한테 달아주세요.”
“그건 대표님이랑 얘기해 보고. 일단 넌 올라가.”
“네, 부탁할게요.”
“응. 너도 고생하고. 무슨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해야 한다?”
“네.”
임은진이 왔던 길을 되돌아서 무도관을 나섰고, 지영은 시간을 확인한 뒤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체육관 안쪽은 밖과는 다른 열기로 후끈했다. 친구들을 찾는 건 쉬웠다. 들어온 문 바로 앞에서 예열을 끝내고, 스트레칭하고 있었으니까.
지영은 표정을 다듬고는 친구들에게 갔다.
“컨디션 어때?”
지영이 묻자, 다들 씩 웃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 미소 자체가 아주 확실한 대답이었다. 다들 컨디션은 좋았다. 그런데 자신이 컨디션이 제일 안 좋아졌다.
‘티 내지 말자. 티…….’
이 친구들은 진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혀서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자신의 심리를 알아볼 거다. 시합 뛰는 친구들에게 자기가 지금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해서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전기정 교수가 선수들을 바로 모았고, 짧게 미팅을 가졌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시합 정비 뒤 아시아 선수권 이틀째 경기가 시작됐다.
첫 게임은 임효중과 황석이었다.
둘은 하필이면 동시에 게임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예 첫판은 아니었다.
2 시드권 상대와 첫판이어서, 첫 게임이 끝나고, 다다음이었다.
각각 상대는 임효중은 중국, 황석은 카자흐스탄 선수였다.
둘 다 상대하기 정말 쉽지 않은 나라다. 중국이야 예전에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나라였다. 수십억 인구에서 고르고 고른 만큼, 실력이 없고 싶어도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아시아의 맹주가 되지는 못했던 나라다.
한국에게 막혔고, 일본에게 막혔다.
하다못해 대만에게도 밀렸던 적이 있었다. 대만은 어느 순간부터 평준화를 이뤄 폼을 미친 듯이 끌어올렸지만, 중국은 항상 그 자리였다.
고집스러운 힘 유도.
힘이 현대 유도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건 맞다. 애초에 파워는 모든 스포츠 종목에 필수적인 능력치였다.
그러나 그 힘을 집중적으로 키우면,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카운터에 적합한 몸을 만들 수는 있어도, 기술적인 부분에서 과도한 근력은 방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관절의 유연함.
기술을 파고드는 속도.
그 모든 걸 과도한 근력이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유도는 제자리였다.
카자흐스탄도 마찬가지였다.
카자흐스탄, 우즈벡키스탄 등등, 이쪽 지역 국가들은 애초에 전통적인 힘 유도였다. 몽골이나 중국과 아주 흡사한 파워에 베이스를 둔 유도다. 오죽하면 다리 잡기가 사라진 게 이쪽 지역권 국가, 유럽 국가들의 파워 유도 때문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영이 봤을 때 그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만큼 타고나는 힘들이 대단했으니까.
‘힘과 기술의 맞대결.’
딱 이 구도지만, 지영은 걱정하지 않았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친구들은 힘도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유연성, 민첩성, 근력.
그리고 체력까지 더해진 올라운더들이었다.
친구들은 역시 지영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회전, 2회전, 3회전.
준결승까지 3명을 합친 경기 시간이 채, 15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4강, 준결승 안착.
연희고 그랜드 슬램의 첫 단추가 목전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