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78화
178화. 아시아 선수권(5)
부도칸이 침묵에 휩싸였다.
“뭐야, 진 거야?”
“한국 선수가 이긴 거지?”
“오노 쇼헤이가 졌어? 진짜?”
그리고 이내, 현실로 돌아오며 소란이 일어났다.
특히 이 이변에, 각국에서 모인 유도 관계자들이 곧장 팀 회의를 소집했다. -73㎏ 체급은 사실 거의 포기했었다. 이유는 하나. 오노 쇼헤이란 산이 너무나 높았기 때문이었다. 도쿄 올림픽 이후 세계 대회는 가노컵과 마스터즈, 이렇게 두 개 대회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때도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세대 교체로 오노 쇼헤이에서, 미야모토 신지라는 신성이 등장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73체급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일본의 중심 체급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오노 쇼헤이가 한국의, 이름도 없던 선수에게 졌다. 아니, 정확히는 주니어 대회에서는 미야모토 신지를 잡은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주니어고, 경험과 연륜이 쌓인 시니어에서는 이름조차 없는 선수였다.
그런데, 시종일관 오노 쇼헤이를 가지고 놀더니 막판에는 반칙패까지 먹여 버렸다.
그것도 일본 무도의 성지, 무도관에서.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분주해질 수밖에 없었다. 잘하면, 오노 쇼헤이를 꺾은 한국 선수만 역으로 꺾으면 우승할 수 있다. 그런 행복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분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영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빠르게 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오세아니아권, 중앙아시아 쪽 팀들은 모든 역량을 동원해 강지영의 정보를 구했다. 그런데 정보는 생각보다 많았다. 강지영. 당장 구글에만 쳐도 강지영에 대한 정보는 넘쳐났다.
넘쳐났지만.
“이건 또 뭐야. 드라마? 뭐야? 배우였어?”
“어? 이건 경기 영상인데요? 저번 세계 청소년 선수권.”
“나는 드라마가 나오는데?”
넘쳐나는 정보를 보다가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강지영에 대한 시합 영상도 분명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뜨는 게 강지영이 출연한 드라마 영상이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몇 분짜리로 잘라 만들어진 영상이 수십 개도 넘게 올라오니 정보를 찾던 이들은 강지영이 유도 선수인지, 한국의 배우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종합적으로 정보를 취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선수가 본업이지만, 뛰어난 외모로 연기자 활동도 하는 선수.
고개는 끄덕였지만, 입맛은 쓸 수밖에 없었다.
오노 쇼헤이를 잡은 실력도 실력인데, 그 외모로 배우까지 하니 가슴 한편에서 불쾌한 기분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세상 참 불공평하군.”
“어쩐지 외모가 장난 아니더라니.”
“됐고, 대회에 집중하자. 스타일은 어때?”
하지만 그들은 프로.
불쾌한 기분은 얼른 떨쳐내고, 본업에 집중했다.
“딱히 스타일이 없어. 일단 잡기 싸움을 거의 안 하는 것 같긴 하지만, 다른 경기를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야. 상대에 따라 스타일이 전부 변해.”
“까다롭군.”
“그게 끝이 아니야. 경기 보면, 되치기가 기가 막혀. 기술 엉성하게 들어가면 거의 100이면 100 되치기에 걸린다고 보면 돼.”
“이런 스타일을 어떻게 익힌 거지? 그것도 현대 유도에는 정말 적용하기 쉽지 않았을 건데.”
“그런데 그걸 익혔고. 아시안 게임, 세계 선수권 금메달리스트 미야모토 신지와 좀 전에는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오노 쇼헤이를 꺾었지. 배우? 그건 빼. 이 친구 실력만큼은 진짜야.”
“아니, 어디서 이런 선수가 튀어나온 거지?”
“한국이 이를 갈고 준비했겠지.”
삼삼오오 모여서 강지영을 분석하던 이들이 나눈 대화는 거의 대동소이했다.
처음엔 운동선수인지, 배우인지 헷갈려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시합 영상을 보고는 선수가 가진 스타일의 까다로움에 혀를 차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거의 그런 대화였다.
이렇게 이변 만든 지영은 대기실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스포츠 재활학을 전공한 스태프의 질문에 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오노 쇼헤이와의 게임은 무난했다. 신지처럼 굉장히 파이팅이 넘치는 시합 스타일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시합 내내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도사 유도 스타일이라 확실한 기술을 걸지, 그냥 생각 없이 퍽퍽 치는 발기술도 구사하지 않아 어디 욱신거리는 곳도 없었다. 베스트 컨디션. 그게 현재 지영의 상태였다. 김재정 코치가 다가와, 태블릿으로 3회전 상대를 보여줬다.
3회전은 바우르잔 쿠아트, 카자흐스탄 선수였다.
90, 00년대까지는 한국보다 한두 수는 아래였었지만, 지금은 실력 평준화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기량을 갖춘 나라였다.
그런 카자흐스탄에서 벌써 10년째 대표를 하는 선수.
이른바, 고인물이다.
“쿠아트는 전형적인 힘 유도야. 그리고 호진이랑 한 경기 보면 알겠지만 잡기가 진짜 지저분해. 보이지? 여기 가슴 깃 지가 슬쩍슬쩍 잡는 거.”
“네.”
“이거 조심해야 해. 심판을 등지고 해서 반칙도 잘 안 주거든. 호진이도 이 반칙 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
확실히.
영상을 보니 바우르잔 쿠아트는 잡기를 할 때 본인의 가슴 깃을 자기가 잡아서 상대가 잡는 걸 막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틀어 잡혔을 때 목을 빼는 것처럼 이것도 반칙인데 문제는 이걸 심판을 등졌을 때 한다는 점이었다.
잡기가 매우 지저분한 선수.
예전에 이런 잡기 때문에 도쿄 올림픽에서도 -100 결승까지 간 선수가 매우 고생했었다. 울프 아론. 이 선수도 딱 이런 스타일이었는데 심판을 등지고 자꾸 반칙하니, 보다 못한 부심들이 지도를 하나 주긴 했었다.
어쩌면, 이것만 없었어도 우승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교묘한 반칙이다.
“네, 주의할게요.”
“그래, 잡기 이거 말고는, 딱히 조심할 건 없어. 기술은 다 평범한 수준이니까.”
“네.”
그 외에는 기술적인 부분에선 딱히 걱정할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주의해야 할 건 자기 가슴 깃 잡는 반칙과 어마어마한 힘. 특히 기술을 엉성하게 걸면 힘으로 되치기를 하는 스타일인데, 이것만 조심하면 무난한 경기가 될 것 같았다.
“자, 슬슬 몸 풀자. 이제 20분 정도 남았어.”
“네.”
지영은 일어나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몸을 풀면서 지영은 이성진의 경기가 궁금했다. 정수원 선배와 이성진은 자신처럼 2회전은 무난히 통과했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 경기 중일 텐데, 어떻게 됐는지 몸을 풀면서도 그게 궁금했다.
부딪치기로 몸을 천천히 예열시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땀에 흠뻑 젖은 정수원 선배였다.
“잘해라.”
“……네.”
쿵.
그리고 문을 닫고 갔다.
아니, 왔으면 어떻게 됐는지 말이라도 좀 해주고 가시든가. 그냥 잘해라. 한마디만 하고 휑 가버렸다. 그걸 보면 정수원도 캐릭터가 확실한 선배였다.
“이겼나 보네.”
“어, 그래요?”
“응, 수원이는 지면 바로 옷 갈아입으러 간다. 저런 말 안 해.”
“아하.”
다행이다.
고작 한 달이지만, 그래도 저 선배와는 정이 들어서 이번 대회에 꼭 좋은 성적을 거둬줬으면 했다. 다시 20분쯤 지났을 때, 또 문이 열렸다. 이번엔 이성진이었다. 이성진은 아예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뽀얀 모습으로 지영의 옆에 철퍽 앉더니, 후아.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그러곤 지영을 보고는 씩 웃었다.
하는 모습을 보니 이성진도 이긴 게 분명했다.
승부에는 언제나 진심인 편이라 졌으면 절대로 이렇게 웃지 않는 친구였다.
똑똑.
이번엔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진행요원이 들어와 지영을 호출했다.
“지면 죽는다?”
“응.”
이성진의 말에 가볍게 대답해 준 지영은 김재정과 함께 다시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바우르잔 쿠아트는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영을 보곤 씩 웃더니 대뜸 손을 내밀었다. 지영은 이게 뭔 의미인가 싶어 잠시 보다가 이걸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서 가볍게 쿠아트의 손을 잡았다.
“사인, 사인.”
씩 웃으며 나온 그 말에 지영은 그냥 피식 웃었다. 일종의 신경전이었다. 음, 야구로 따지면 트래쉬 토크 같은?
‘나는 너를 유도 선수 말고, 배우로 본다. 뭐 이런 뜻이겠지.’
그걸로 지영의 멘탈을 흔들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 신경전이야 지긋지긋하게 당해봤기 때문에, 지영은 별로 큰 타격은 없었다. 그리고 이 정도는 지영이 기자들에게 당한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케이.”
지영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래도 쿠아트는 씩 웃었다. 자기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음에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 걸로 보아 이런 트래쉬 토크가 꽤 익숙한 선수 같았다. 그렇게 잠시 서 있다가,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경기장에 입성했다.
1회전에는 그래도 환호성이 좀 들리더니, 2회전 때는 일방적인 오노 쇼헤이 응원이었다가, 3회전은 고요해졌다.
일본 관중이 대부분이니, 오노 쇼헤이를 날린 지영을 당연히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런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일부 여성들만 꺄아아!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주변의 눈총에 바로 깨갱 하고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적진이라서, 응원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우우! 하는 야유가 나오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고요했다. 의도적인 침묵. 자국 선수를 이긴 지영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그래서 참, 일본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은 계단을 올라 매트에 발을 올리는 순간 사라졌다.
슥, 스윽.
평소 루틴대로 발바닥의 땀을 매트에 닦고, 자리에 가서 서자 짝짝! 건너편의 쿠아트가 자기 뺨을 거세게 친 다음 지영을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아까 입장하기 직전에 했던 눈빛과는 전혀 다른 모습.
그러나 지영은 그런 눈빛에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심판이 입장했다. 2회전과는 다른, 일본의 여성 심판이었다. 작은 몸집이지만, 일본 유도의 전설인 다무라 료코였다.
1993년부터, 96년까지 무려 84연승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기록을 가진 선수였다.
그러다 북한의 계순희 선수에게 결승전에서 패배를 당하며 기록은 막을 내렸지만 84연승은 세계유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었다.
아무리 일본 선수라지만, 옛날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앞으로 깨지기 정말 힘든 위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지영은 나라 간의 감정을 떠나서 이 선수가 쌓은 업적만큼은 존경했다. 그런 다무라 료코가 주심으로 들어왔다.
시합이 시작됐다.
시작과 동시에 빠르게 들어오는 바우르잔 쿠아트.
쿠아트는 역시 심판을 등지기 위해 왼쪽 자세로 섰다. 자세가 원래 오른쪽인 걸로 알았는데, 왼쪽으로 섰다? 지영은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야 가슴 깃 잡는 반칙을 심판에게 숨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쿠아트는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지영은 애초에 잡기 싸움에 열을 올리는 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특히 가슴 깃에는 절대로 집착하지 않았다. 그건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안호진의 시합을 전부 파헤쳐 보며 더욱 강해졌다.
왜?
한국의 기술 유도를 깨부수기 위해 타국의 선수들이 짠 전략이, 바로 잡기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잡지 못하게 한 다음, 반칙을 받든 말든 그다음에 승부를 보는 것. 그게 일단 기본 베이스였다.
그걸 지켜보며 지영은 더욱 잡기 싸움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래서 똑같이 짝으로 자세를 바꿔줬다.
원래 오른쪽 자세인 쿠아트가 왼쪽으로 서고, 원래 왼쪽인 지영은 오른쪽으로 섰다. 그리고 평소처럼 그냥 손을 벋어 어깨 깃을 잡았다. 그러자 곧장 뜯어내는 쿠아트. 지영은 다시 손을 뻗었다. 쿠아트는 또 뜯어냈다.
‘역시…….’
잡혀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철철 넘쳤다.
그러나 지영은 실망하지 않았다. 똑같이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공격자와 방어자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었다. 지영은 한 발 전진해서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쿠아트는 또 그걸 뜯어냈다. 지영은 포기하지 않고 또 손을 뻗었다. 마찬가지로 좀 더 접근하면서. 그러자 쿠아트는 다시 뜯어내려다가 멈칫하곤 손을 뻗어 지영의 가슴 깃을 잡았다.
바로 이 부분이었다.
계속해서 상대가 내 도복을 잡은 손을 뜯어내면, 그건 무조건 반칙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거기다가 뒤로 물러나는 상황이면 더더욱. 하지만 심판 다무라 료코는 아직 그쳐를 하지 않았다.
이건 한 번은 더 지켜보겠다는 뜻.
지영은 세계가, 한국 유도를 압살하던 방법을 똑같이 쓰기로 했다.
툭, 툭!
모두 걸기를 가볍게, 좀 세게 연달아 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치려는 모션을 주자 발을 슥 빼는 쿠아트. 지영은 그 타이밍에 맞춰 몸을 쭉 집어넣어 반대쪽 가슴 깃을 잡고 앞으로 빠르게 돌아 나왔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아주 짧은 틈을 노렸기 때문에 쿠아트는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가슴과 목깃을 전부 주고 말았다.
지영은 그 상태에서, 뒤로 슬쩍 물러나며 상체에 힘을 바짝 줬다.
힘이 장사라 금방 딸려오진 않았지만 버티면서 고개가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거기다가 다시 툭! 안뒤축. 그러자 휘청인 쿠아트는 냅다 엎드렸다. 괜히 버티다가 한판 날아가는 것보단 낫다고 계산한 것 같았다.
맛테!
그러자 그쳐를 선언한 주심 다무라 료코 주심이 쿠아트에게만 지도를 줬다. 고작 30초 만에 들어간 지도는 지영이 유리한 고지에 서게 만들어줬다.
하지메!
다시 시합이 시작되자 안 되겠는지 본인의 주 자세로 서는 쿠아트. 그런 쿠아트에 맞춰 지영도 다시 왼쪽으로 섰다. 그리고 이어지는 잡기 싸움은 똑같았다. 다가가면서 팔을 어깨 깃으로 뻗으면 그걸 쳐내는 쿠아트. 그래도 다시 전진해서 깃을 잡으려는 지영과 또 그걸 쳐내는 쿠아트.
시종일관 비슷하게 이어지는 잡기.
기술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상태로 1분 20초쯤이 다시 지났다.
맛테!
시도! 시도!
이번에는 지영과 쿠아트에게 같이 지도가 들어왔지만, 이번 잡기의 승자도 지영이었다. 왜? 쿠아트는 지도 2개, 지영은 1개였다. 아직 여유가 있는 지영과는 달리, 쿠아트는 이제 지도 하나가 더 들어가면 오노 쇼헤이처럼 반칙패였다.
하지메!
다시 시작되는 경기.
주심의 하지메 소리에 맞춰 쿠아트가 저돌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때문인지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몸은 착실히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뒤로 물러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기다렸던 순간이다.
상대가 반칙패의 압박에 저돌적으로 나오는 그 순간을, 지영은 기다렸다.
그래서 시합 중인데도, 지영의 입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