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64화
64화. 새해 휴가(3)
그렇게 호기롭게 지르긴 했지만, 지영은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와 난감한 상태에 빠졌다.
“……나, 모쏠이었지.”
데이트.
보통 연인, 혹은 서로 호감이 있는 이성이 만나 무언가를 하는 걸 말한다. 차를 마시거나, 밥을 같이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시거나, 그리고 그 이상의 애정 어린 무언가를 하거나. 그 전부가 데이트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예전에는 연인, 혹은 서로 호감이 있는 남녀가 만날 때 쓰던 말이지만 요즘은 가족끼리의 나들이도 가족 데이트 이런 식으로 많이 쓰인다. 여기서 지영이 난감함에 빠진 이유는, 이런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여성과 아예 만난 적이 없던 건 아니었다.
회귀 전, 지영은 제법 많은 여성에게 호감을 받았다.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그 얼굴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여자들이 좋아하는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으니 그에 호기심을 품고 먼저 다가온 여성들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나 그렇지, 몇 번의 연락과 만남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이유는 하나.
지영이 가진 어둠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영의 어둠은 단순히 그런 척을 하는 게 아니었다. 뼈 아픈 사고 뒤에, 하나를 빼곤 모조리 빼앗겨 버린 인간이 내뿜는, 절망의 에너지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그걸 모르니 그 특유의 분위기와 외모에 이끌려 다가왔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물러나는 거다.
그래서 지영은 데이트란 경험이 거의 없었다.
딱 밥 몇 번 먹어봤고, 차도 몇 번 마셔봤고, 술도 두 번인가, 세 번 정도 마셔본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 전부가 진짜 데이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고로, 지영은 경험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아, 이게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자신에게 경험이 없으면, 남의 경험을 빌리면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이 철철 넘치는 게 바로 인터넷이었다. 그래서 지식인의 힘을 빌려 데이트 코스를 짰다. 코스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냥 평소 먹던 점심과는 다른 메뉴의 점심.
고생한 어머니를 위한 아로마 마사지, 그리고 영화를 보고 저녁. 이 단순한 코스면 지영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서 문제가 발생했다.
신년이라 예약이 필수라는데, 영화부터 시작해 전부 예약이 매진됐다. 지영은 이런 것도 처음이라 신년에 얼마나 많은 커플이 영화를 보고, 얼마나 많은 가족이 데이트를 하러 나오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영은 심지어 이 예약이 최소 4, 5일 전부터 전부 찼다는 것도 몰랐다.
연애 경험의 전무가 빚어낸 사고였다. 이렇게 되면 인터넷에서 알려준 코스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취소해야 하나?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기대 중이셨다. 처음에는 이게 꿈인가 생신가 하는 표정이셨지만, 지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중이셨다.
“끙…….”
지영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어머니의 일을 줄일 수 없다면, 그럼 정신적으로라도 행복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데이트라는 말을 꺼낸 지영이었다. 그리고 강한결이 통화할 때 데이트, 데이트거려서 머릿속에 남아 있기도 했었다.
어쨌든, 그래서 꺼낸 말이니 어떻게든 코스를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이 좁은 충주는 이미 모든 코스가 포화상태였다. 충주의 인구는 20만 언저리. 평소에는 한적하단 느낌을 주지만 명절과 신년은, 진심 미어터진다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준다. 외지에 나갔던 젊은 층이 대거 본가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뭘 하려고 해도 전부 매진이었다.
지영은 모니터를 잠시 노려보다가, 결국 가장 만만하고,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내 동생 어쩐 일!
시끌벅적하다.
“또 술 마셔요?”
-응! 흐흐! 동생한테 받은 가방 자랑질 좀 하려고 애들 좀 불러냈지. 그리고 마침 신년이기도 하고! 망년회는 아무리 바빠도 하는 법이거든!
“그게 뭔 자랑이라고.”
지영은 더 딴소리가 나오기 전에 후다닥 용건을 설명했다. 지영의 얘기를 들은 그녀는 잠깐 생각해 보고 연락주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한 10분쯤 지나 메시지가 주르륵 왔다. 역시 이선영이었다.
1시에 친구의 패밀리 레스토랑에 예약을 잡아줬고, 3시에 또 친구의 마사지 샵에 예약을 잡아줬다. 5시에 영화도 용케 구해줬다. 영화도 이 시즌을 노리고 상영한 가족 힐링 장르였다.
“아니, 대체 어떻게?”
아무리 새로고침을 해도 안 떴는데?
그 메시지가 오고 잠시 뒤 전화가 왔다.
“네, 누나.”
-너 이름으로 예약했으니까 시간 맞춰서 가면 될 거야.
“……어떻게 구한 거예요?”
-영업기밀이야!
“…….”
약점 잡아서 협박이라도 한 건가?
-후후, 농담이고. 친구 찬스 쓴 거지 뭐. 내 친구들이 다 그쪽에서 일하거든. 그리고 약간의 꼼수로 남는 자리들이 있는 거고. 오늘 가방 고마우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지.
“고마워요. 누나한테 부탁하길 잘했네요. 진짜.”
-고맙기는. 그리고 나 말고, 내 친구들이 다 도와준 거야. 인사라도 할래?
“네? 어떻게요?”
-영상통화 걸면 되지. 잠깐만.
전화를 끊은 그녀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영상통화.
지영이 전화를 받자, 볼이 불그스름한 이선영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 옆으로 딱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분들 네 분이 나란히 보였다.
-내 친구들, 여기 바로 옆에 있는 얘가 레스토랑 집 딸내미! 그리고 그 옆이 아로마 마사지 샵 사장님! 그 옆에 있는 애가 영화관 주인 손녀! 그리고 마지막 애는 그냥 있는 애!
-난 왜 그냥 있는 앤데!
“…….”
소개 뭔데…….
지영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연예인이다! 연예인! 호들갑을 떠는 이선영의 친구들이었다. 연예인은 아니지만 어차피 그렇게 말한다고 아 그래요? 연예인 아니구나! 할 것도 아닐 게 빤해서 지영은 그냥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누나가 받은 게 더 많단다. 그리고 얘들도 연예인 본다고 좋아하니 됐고. 자, 그럼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도록, 끊는다!
-아, 야! 잠깐…….
뚝.
이선영은 딱 적당히 거기서 전화를 끊었다. 지영이 이런 일에 어색할 것 같아서 알아서 커트해 준 거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전화를 끊은 지영은 저녁은 그냥, 시켜 먹기로 했다. 메뉴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회. 그거면 될 것 같았다.
지영은 이어서 어디 회가 맛있나 검색을 시작했다.
돈이 많이 들어도 맛있는 곳에서 먹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참 찾아본 결과, 괜찮은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예약이 필요한가 싶어서 전화도 해봤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렇게 데이트 코스를 전부 끝냈더니, 밖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영아, 케이크 먹자!”
“네! 나가요!”
지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폰을 챙겨 거실로 나갔다.
데이트는 내일이지만, 오늘은 어머니와 함께 영화도 보고, 케이크도 함께 먹으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지영의 새해 전야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 * *
이선영은 기분이 좋았다.
동생이 자신을 이렇게 믿고 의지해 준다는 것도 좋았고, 그 동생이 오늘 가방을 챙겨줘서 더 좋았다. 솔직히 가방은 받으면 안 되는 물품이었다. 그녀는 공영방송사 소속 기자라, 이런 고가의 가방은 무조건 법에 걸리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녀는 선물을 받았다.
지영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해서 문제가 될 걸 알면서도 받았다. 본래라면 무조건 거절했을 거다.
“야, 술 먹다 뭔 생각해?”
아들 셋을 키우느라 예전의 그 조숙함은 쓰레기통에 구겨서 버린 지 오래된 친구의 말에 이선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갑자기 생긴 동생이 너무 신기해서.”
“아까 걔? 너 정말 걔 누나 하게?”
“그럼 연인 하리?”
“안 될 건…….”
짝!
이선영은 헛소리를 하는 친구의 팔뚝을 사정없이 때렸다.
“정신 차려, 이것아. 앞길이 구만리 창창한 애야. 어디서 저급한 소리를!”
“쏘리쏘리! 아, 아파, 씨…….”
둘의 모습에 앞에 앉은 친구들이 또 쿡쿡거리며 웃었다.
“서울에서 사고 치고 충주로 돌아오고 나서 뭔 시체처럼 힘이 하나도 없더니, 이제는 얼굴이 좀 폈네?”
“이것도 그 동생의 힘인가?”
“그게 아니면 저럴 이유가 없지. 호기심에 살고 호기심에 죽는 게 흑장미 이선영이잖아?”
흑장미란 말에 이선영은 맥주를 마시다 말고 풋! 뿜고 말았다.
“꺄악! 더럽게!”
“켁켁! 야, 언제 적 별명을!”
“과거는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 묻어두는 거지?”
“그런 너…… 후우.”
이선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저렇게 말하는 친구가 입담이 제일 좋아서 어떻게 따져봐야 궤변으로 응수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말은 사실이었다. 나오지 못한 둘을 포함해 중학교 때부터 이 지역에서는 아주 유명했던 칠공주파의 흑장미…… 그게 바로 이선영의 과거니까.
뭐, 이선영의 나이대에는 지역마다 오공주니 칠공주니, 기본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딱히 흑역사라고 하기도 뭐 했다.
“그래서 요즘엔 쟤한테 호기심 채우는 거야?”
남자 친구를 하도 자주 바꿔서 배반의 백장미라고 불렸던 친구의 말에 이선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거의 끝났어.”
“그런데 어쩐 일로 인연을 유지한대?”
“그냥, 지켜보는 맛이 있어서? 쟤는 있지. 좀 독특해. 남자로 인한 호기심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흥미가 생기는 애야. 뭐라고 말로 표현하긴 애매한데, 그냥 그런 게 느껴진다니까?”
“어이구, 그러셔?”
“진짜 그래. 내 직업병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지켜보고 있으면 조마조마하기도 하면서도 꼭 뭔가 터뜨려 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막 그래.”
시작은 교통사고가 시작이 맞다.
그때 흥미가 생기긴 했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화제의 중심, 사건의 중심.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그 특별함. 어떤 이는 그걸 스타성이라고 하겠지만 이선영은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 스스로도 확실하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정의 내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흥미와 호기심을 느낄 뿐이었다.
“안 그래도 너가 낮에 하도 자랑질해서, 아까 잠깐 찾아봤거든? 얘 맞지?”
“어? 뭐?”
자신은 비혼주의자라고 그렇게 주변에 떠벌리고 다니더니, 제일 빨리 결혼한 과속 공주께서 들이민 화면엔 지영의 시합 장면이 담겨 있었다. 그걸 또 다섯이 나란히 앉아서 테이블에 두고 구경했다.
영상은 어제 올라온 영상이었다.
선발전 영상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영상이 어제 시합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머, 어머어머!”
친구들의 호들갑에 그녀는 영상을 차분히 감상했다.
조회 수가 벌써 수십 만이다.
연예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지영의 영상이 벌써 수십만? 그 이유는 보면서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치열했다.
한국에서는 적수가 없던 것처럼 상대 선수를 가볍게 한판으로 던지던 지영이 점수도 빼앗겼고, 연장선에 들어가기 전에는 도복이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입술도 찢어져서 입고 있던 흰 도복이 진짜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릴 땐 피가 주륵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입에 거즈를 물고 끝까지 시합을 이어나가는 지영.
전문 카메라가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관중석에서 최대한 줌을 당겨 찍어서 영상은 조잡했지만, 그녀는 언뜻 비치는 지영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지영이 웃는 걸 넘어, 일종의 희열을 느끼고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저건 희열이란 단계를 넘어섰는데?’
지영을 가까이서 제법 본 이선영의 눈엔 저 웃음은 그냥 기분 좋은 희열 정도가 아니었다. 표정 자체가 정말 없는 지영이라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 지영은 결국에는 시원하게 한판으로 이겼다.
“와, 와아. 이겼다!”
나이가 마흔이 다 되어가도 소녀 감성으로 좋아해 주는 친구들. 유도의 유자도 모르는 친구들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게 하는, 이런 매력. 이선영은 지영이 가진 특별함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했다.
알아서 화제가 된다.
저런 혈투는 사실 인터넷상에서는 적지 않게 있었다. 특히 동영상 플랫폼 격투기 카테고리에는 이런 영상이 수십, 수백 건은 나올 거다. 하지만 지영의 영상은 이렇게 조잡한데도 특별함이 느껴졌다. 영상매체를 누구보다 전문적으로 접한 그녀가 보기에도 이상하게 특별한 이유는 저 안에 담긴 게 지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끌어당긴다.
아주 천천히, 아주 급속도로. 아니면 평균적인 속도로.
어떤 식으로든 그런 힘을 내보였다.
그래서 흥미가 갔다.
‘그래, 지켜보는 맛.’
강지영이란 친구는, 그런 게 있었다.
그런 친구가 동생이 되어서, 앞으로 마음 졸일 일이 어째 많이 생길 것 같다는 불길하면서도, 반가운 생각을 한 그녀는 잔을 들어 올렸다.
“자, 내 동생 지영이의 금메달을 축하하며 건배!”
“얼씨구?”
“지랄.”
“취했네.”
“미친년!”
참으로 친구들다운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다들 잔을 들어 건배는 같이해 줬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술자리는 새해가 지나고, 아침 해가 뜨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모일지 모르니…… 밤을 새워 달렸다.
그리고 그녀는 종일 뻗었다.
1월 1일, 저녁 늦게 지영이 감사 전화를 하기 전까지 그녀는 시체처럼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뻗어 있는 사이, 지영의 시합 영상은 슬그머니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올라가 있었다.
새해.
한일전.
혈투.
이 세 가지는, 국뽕에 불려 나온 주모를 새해부터 과로시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