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1화
31화. 임스테이(3)
토요일.
누군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웃고, 누군가는 본 실력을 제대로 내지 못해 허탈함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토요일.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어도 너 하나의 마음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처럼 세상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새벽은 쉬고, 오전 운동은 웨이트로 끝낸 지영은 씻고 나와 짐을 점검했다. 갈아입을 속옷 넷, 양말 넷. 혹시 할지도 모를 운동에 입을 운동복과 사복 두 개씩. 점퍼는 그냥 패딩으로 커버. 음, 이 정도면 다 챙겼다.
짐을 차에 실어놓고 점심을 먹고 나자 이선영이 나연석, 김선욱이 도착했다.
1시.
목적지인 강원도로 출발했다.
차를 타고 가는 거야 뭐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청주의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길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 심장이 천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실 지영에게 이런 여행길은 미지의 세계였다.
시합 때문에 전국 팔도를 다녔지만 그땐 언제나 시합을 위한 이동이라서 가는 내내 미약한 긴장감이 있었다. 그래서 주변을 살펴볼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합이 아니라, 순수한 여행이었다. 방송을 위해 가는 거긴 하지만 그 방송은 특성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플롯을 가진 프로그램이라, 부담도 없었다.
그래서 느낌이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게 여행을 가는 기분이구나…….’
지영은 스물일곱까지 살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무렵,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는 당연히 여행을 가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지영의 기억 속에서는 10년도 훨씬 이전의 기억이어서, 흐릿하기만 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여행 기억은 특별하게 기억에 오래 남기는 힘들었다. 갔다는 기억은 있어도, 특별하진 않았다. 적어도 지영의 기억은 그랬다.
워낙에 조용했던 지영이라 더더욱 아버지, 어머니와 계곡에 가서 고기 구워 먹고 했던 기억이 엄청나게 특별함을 가진 채 남아 있지 못했다. 아버지 사후, 그리고 본인의 사고 이후에는 당연히 여행이란 건 없었다.
그러니 지금이 머리가 여물고, 온전한 몸으로 가는 첫 여행이었다.
그래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차는 국도를 타고, 그리고 고속도로로 진입해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충청도에서 경기도,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진입하자 세상의 색감이 변했다. 황량하던 들판과 산이, 새하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강원도는 눈이 일찍 왔기 때문이었다.
지영이 탄 차는 강원도에서도 더 깊숙하게 들어갔다.
강원도 양구, 고성, 인제의 트라이앵글 한 접점에 임스테이의 촬영지가 있었고, 그곳은 아주 깔끔하게, 설원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차량 십수 대가 보였다.
대형버스도 세 대나 있어서 주차장은 좀 북적이는 느낌이었지만 내려서 주변을 돌아봤는데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잘못 찾아왔나?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여기 맞지?”
“맞지 않을까?”
두런두런 주변을 돌아보며 얘기하는 중에 이선영이 나와서 자진해 통솔자가 됐다.
“저 길 따라 올라가면 된다니까, 올라갈까요?”
“네!”
이성진의 밝은 대답을 뒤로하고 위로 올라갔다.
오솔길?
숲의 입구부터 잘 닦인 오솔길을 따라 한 20분쯤 올라가니, 산 중턱부터 전경이 확 트였다. 그리고 그걸 본 모든 사람들이 와, 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그중엔 지영도 있었다.
“와…….”
이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래. 좀… 압도적이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새하얗다. 와 죽인다가 전부였다. 그만큼 말문이 턱 막힐 정도로 뷰가 예술이었다.
넓게 트인 목장에는 양과 말 몇 마리가 푸득거리며 놀고 있었고, 그 위로는 각자 지형에 맞게 게스트하우스가 독립적으로 지어져 있었다. 일단 눈으로 보이는 건 총 일곱 채였다.
입구의 건물, 그리고 큰 식당 비슷한 건물을 포함해 전체가 한옥이었다. 전통 한옥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전경에, 이런 뷰에서 보니까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기분이었다.
‘이게 고전의 멋과 맛이라는 건가.’
여행이 이런 여행을 준다면…….
‘더 보러 다니고 싶다…….’
어머니를 모시고서.
단숨에 지영의 생각 자체를 멈추고, 바꿔버릴 정도의 힘이 있었다. 그렇게 넋이 살짝 나간 채로 구경 중인데, 저 끝에서 스태프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이 다가왔다.
물론 지영의 사고 수준에서 젊은 남녀지, 실제로는 지영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이는 분들이었다.
다가온 스태프 둘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자신들이 임스테이 스태프임을 밝히고는 일행의 면면을 확인했다. 그러다 가장 뒤쪽에 서 있는 지영과 황금세대를 보고는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워낙에 연예인들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라 평점을 찾는 게 빠른 것 같았다.
“연희고 분들이시죠?”
“네, 맞습니다. 저희는 말씀드린 충주 방송국 관계자 셋이고, 여기 이분이 연희고 임대성 코치 선생님. 보호자 겸 인솔자세요. 그리고 그 뒤에 풋풋한 애들이 연희고 아이돌들.”
요즘에는 인터넷에서 누가 아이돌이라고 부르자고 해서, 연희고 황금세대로도 부르고 아이돌로도 불렀다.
뭐 어떻게 부르든, 사실 지영을 포함한 친구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런 호칭도 처음에나 부담스럽지 계속 듣다 보면 그냥 익숙해지기 때문이었다.
“와, 그래 보이네요. 아이돌. 딱 봐도 아이돌이네. 이야.”
“그러게요. 직업 특성상 연예인들 정말 자주 보는데 이 애들도 진짜 아이돌 애들과 비교해도 조금도 꿀리지 않겠어요. 아. 일단 올라가실게요. 저쪽에서 체온 체크하시고, 안으로 들어가서 체크인하실 거예요.”
두 스태프의 말에 이선영이 일행을 다시 이끌었다.
간이 막사에서 발열 체크 등과 기분 문진표를 작성하고, 정문으로 향했다.
대감집의 입구 같은 문턱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임스테이 시즌 2를 출연자들이 나와 서 있었다. 이때 이선영과 나연석, 김선욱은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정식 출연자는 지영을 포함한 친구들이지, 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임대성은 인솔자 겸 보호자라서 남았다.
“어머, 어서 오세요.”
이 프로그램의 중추인 임윤옥 선생님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머리가 하얗게 셌다.
이미 임윤옥의 나이가 70이 넘었으니 당연했다. 예전에는 악역, 강한 역을 많이 해서 ‘마녀’라고도 불렸지만 나종석 PD와 몇 번의 작품을 통해 지금은 세상 푸근한 느낌을 가지게 된 배우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푸근하게만 보이지도 않았다.
느낌이 있었다.
수십 년간 연기력 하나로 그 치열한 연예계에서 살아남은 사람만의, 강렬한 아우라가 보이지 않게 주변을 감싸고 있는 느낌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그런 게 정말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연희고 유도부 코치 임대성입니다.”
그리고 그 인사를 임대성이 자연스럽게 받았다.
임대성 코치의 나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제 고작 서른. 하지만 연희고 이전에 연희중부터 지영과 친구들을 맡아왔다. 그리고 그 덕분에 학교를 포함해 유도회, 이런저런 자리에 하도 끌려다녀서 높은 사람을 만나는 것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법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강한결이 임대성의 옆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연희고 주장 강한결입니다. 이틀간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어머. 부탁은요 무슨. 어린 친구가 참 말도 잘하고 반듯하네. 헌앙해 아주.”
동서 막론. 애어른 할 것 없이 잘생기고 예쁜 건 상대의 거리를 부수는 무기가 된다.
지금이 딱 그랬다.
“선생님. 날도 추운데 손님들 일단 안으로 모시죠?”
“어머, 그래야지. 내 정신 좀 봐.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한옥으로 들어가 사인을 하고, 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오늘 오는 손님은 세 팀이에요. 원래 네 팀이었는데, 한 팀은 못 온다나 봐요. 호호.”
듣기로 두 팀이 펑크 났다고 했고, 지영의 팀이 들어온 거니까 한 팀은 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아예 구하지 않았던가.
“여기, 여기 부용 객실이 여러분들이 묵을 방이에요. 이 중에서 가장 큰 방이 세 개, 작은 방이 하나가 딸려 있으니 쉬기엔 충분하실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기본적인 숙소 이용사항은 우리 최 주임이 안내해 준 뒤 자세히 설명해 줄 거예요. 그리고 저녁은 6시 30분, 7시 30분. 이렇게 고를 수 있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6시 30분으로 하겠습니다.”
“어머, 고마워라. 호호. 일찍 드시면 저나 우리 직원들 퇴근이 빨라지거든요. 호호.”
밉지 않게 넉살을 떠셔서, 지영은 저도 모르게 그걸 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더니, 정말 예쁘긴 하지만 어딘가 인위적인 아름다움이란 느낌을 주는 여자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다.
시선이 마주쳐서 지영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다시 임윤옥 배우님의 말에 집중했다.
“그럼 6시 30분. 에고, 기본적인 사항은 됐어요. 호호. 운동부 학생들이라고 했죠?”
“네, 청주 연희고 유도부 학생들입니다.”
“그래요. 연희고면 연희재단이죠? 박옥순이 이사장으로 있는.”
“이사장님을 아십니까?”
“사사로이 친구 사이기는 해요. 호호.”
역시, 저 정도 위치에 있는 배우님은 인맥도 남다르다.
그런데 그걸 그리 젠체하는 느낌은 없었다.
“운동하는 친구들이니 저녁은 아주 푸짐하게 준비해 드릴게요. 최 주임, 손님들 안내해 드려.”
“넵!”
임윤옥 배우의 말에 뒤에서 훤칠하게 생긴 남자 배우가 앞으로 나섰다.
유명한 배우다.
말해 입 아픈.
“선생님. 계산 안 하셨습니다.”
“어머! 어머어머! 내 정신 좀 봐! 호호! 미안해요. 저희 게스트하우스는 선불이거든요. 호호!”
부사장이라 할 수 있는 미중년 배우, 이서운의 말에 임윤옥은 얼른 일어나려다 말고 자리에 앉아 계산을 진행했다.
숙박비용은 코치가 계산했다. 오늘은 따로 유도부 공금을 사용하지 않는 터라 나중에 따로 정산하면 된다.
그렇게 계산을 하고, 찬 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가 인턴에서 주임이 된 배우 최유신을 따라 가장 멀리 있는 부용 하우스로 향했다.
“와 다들! 와. 와아. 아니, 진짜 이런 말 실례인 건 아는데…… 왜 이런 얼굴로 운동을 해요?”
피식.
실례가 될 말이 맞다.
하지만 최유신이 가진 개구진 느낌과 넉살이 그걸 상쇄시키고 오히려 지영을 포함한 친구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게 만들었다. 확실히 임스테이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맡은 사람다웠다.
“어, 운동 무시하는 거예요?”
그런 분위기 메이커의 말을, 이쪽도 분위기 메이커가 받았다.
약점을 잡겠다는 능글능글한 눈빛으로 이성진이 그 말을 받자, 최유신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어휴! 무시라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하! 저도 소싯적에 운동 좀 했었어요! 그래서 절대 그런 생각 안 하거든요? 하하, 이거 잘못하면 큰일 나겠다. 입조심 해야지!”
“에이, 저희가 뭐 잡아먹나요? 편하게 해주세요. 편하게!”
“학생? 우리 지킬 건 지킬까요?”
“시작은 형이 먼저 했는데?”
이성진의 능글맞은 말에 최유신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표정을 가다듬고는,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하며 정중히 사과했다. 물론 그게 전부 능청에서 나온 거라, 다들 아무렇지 않게 그냥 웃었다.
어느새 앞으로 간 이성진이 최유신과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친화력 갑인 귀공자께서 벌써 배우가 가진 벽을 허물고 있었다. 좋지 않은 이유로 저렇게 된 거라 임대성을 제외하고는 전부 편하게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미리 공지 받은 대로, 카메라가 따라붙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분쯤 올라서, 안에 입은 티셔츠가 땀에 살짝 흥건해질 때쯤 부용 하우스에 도착했다.
“어때요? 여기 죽이죠?”
“……와.”
우와…….
산인데, 절벽을 등지고 한옥을 지어놨다.
그래서 눈 덮인 나무를 품고 있는 절벽과 한옥의 조화는 가히 예술이었다.
다들 나이는 어려도, 예술을 보는 눈은 있었다.
그래서 다들 감탄 중일 때, 지영은 조용히 속으로 다짐했다.
‘여기, 꼭 어머니 모시고 와봐야겠다.’
이런 절경을.
꼭 어머니에게 보여주기로 다짐한 지영이었다.
그리고 그런 지영을 포함한 연희고 아이돌을, 삼각대에 세팅된 카메라 옆에서 마스크를 쓴 두 사람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