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0화
10화. 도발에 대한 대가
순조로웠다.
이성진이 한판을 던져 3위를 확정 짓자마자 강한결이 들어갔는데, 역시 선발전 4강까지 괜히 간 게 아니라고 포효하는 경기력을 보여줬다.
완전무결. 공격과 수비, 시합 운용 면에서 상대 선수보다 강한결이 워낙에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강한결이 상대라 부산 선수는 이미 기가 꺾인 상태였고, 강한결은 1분 만에 허리채기 한판을 거두고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같이 들어온 이성진, 강한결과 하이파이브를 한 지영은 곧바로 황석과 함께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이미 1회전이 끝난 만큼, 자신의 차례는 금방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지영아.”
“응? 어, 석아.”
황석.
평소 말이 없어서 돌부처란 별명을 가진 내 친구.
회귀 전에도 종종 연락을 했지만 거의 짧은 단답이라 뭔 생각을 하는지 참 알기 어려운 친구였다.
“조심해.”
“응? 뭘?”
“네 상대. 아까 경기 봤는데, 지저분해.”
“아…….”
화장실에라도 갔는지, 지영의 상대인 경남 선수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영은 황석의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했다.
왕종형.
화교 출신인 왕종형은, 시합 매너가 더럽기로 회귀 전에도 유명한 인간이었다. 황금세대를 생각하다 보니 그걸 까맣게 잊고 있던 지영은 황석의 등을 툭툭 치면서, 황석을 안심시켰다.
“걱정 마라. 내 성격 알지?”
“알아서 그래. 반칙패 당할까 봐.”
“하하. 알았어. 잘할게.”
“그래.”
황석 선수! 입장해 주세요!
“갔다 올게.”
“파이팅!”
“…….”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인 황석이 먼저 경기를 들어갔다. 황석이 들어가기 왕종형이 물기 묻은 손을 슥슥 닦으며 지영의 옆에 섰다.
룰루, 휘파람까지 불며 선 왕기형은 지영을 힐끔 보더니, 씩 웃었다.
“컨디션 좋냐?”
“…….”
“너 1학년이지? 야, 양보 좀 해주라. 형 대학 가야 되는데, 진짜 죽겠다. 응? 이번에 도와주면 내가 이 은혜 진짜 안 잊을게.”
작게 소곤거리는 왕종형의 말에, 지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설마했는데, 이런 놈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근데 생각보다 이런 일은 흔했다. 실제로 학부형들을 통해 로비가 들어 오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고등부 시합이 그랬다.
중학교야 자연스럽게 지역의 고등학교나, 재단의 고등학교로 가지만 대학교는 성적이 없으면 좋은 대학을 가기 어렵거니와, 아예 유도팀이 있는 대학을 못 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종종 이런 얘기들을 들었다.
넌 어차피 1학년이니까.
아직 기회가 많지 않냐 이런 얘기들.
“어, 웃냐? 허, 이 새끼. 싸가지 X나 없네? 웃기냐 내 말이?”
“…….”
지영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런 질 낮은 도발에 걸려들기에는, 회귀 전 지영이 받았던 시선들이 너무나 강렬했다. 그리고 그런 걱정과 안쓰러움이 담긴 시선들을 견디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들에 대한 내성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거기다 지영은 지금 회귀까지 했다.
회귀 전 나이가 스물 후반이었다고 해서, 연륜이나 경험이 쌓이지 않을 나이는 아니었다.
잇폰!
앞 경기가 끝났다.
지영은 왕종형을 무시하고는 바로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심판이 판정을 내리고 나오고, 지영은 매트로 올라가 몸을 풀었다.
슥, 스윽. 발바닥의 땀을 매트에 닦고, 퉁퉁 제자리 뛰기로 몸을 차분하게 예열시켰다.
1분쯤 지나 다른 심판이 들어오고, 인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마주 보고 서서, 다시 예의. 하지메! 시합이 시작됐다. 지영은 차분했다.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움직이는 왕종형의 손을 툭툭 뜯어냈다.
등판은 절대 내주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이는 왕종형의 잡기 싸움에 어쩔 수 없이 가슴 깃을 잡았는데…….
‘이것 봐라……?’
아주 미세하지만, 미끄러웠다.
한껏 예민해진 상황이 아니라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을 정도의 미끄러움.
‘이 새끼 이거…….’
도복 깃에 뭔가를 먹였다.
아주 옛날에, 20년대 초반이나 90년대 후반쯤에 가끔 이런 방법을 쓴다고는 들었다. 풀이나 밥풀을 먹여서 도복을 뻑뻑하게 하거나, 미끄럽게 해서 잡기 싸움을 유리하게 가져가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나 됐던 거지, 지금은 당연히 반칙이었다. 그러니 아무도 깃에다가 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놈은 깃에다가 뭔가를 먹였다.
툭! 치니까 자연스럽게 손이 미끄러워질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말이다. 이 정도는 심판에게 항의를 해도 어쩌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연이어 들었다.
톡 까놓고 김밥 먹고 도복에 문질렀다고만 해도 변명이 될 그런 미세함. 아주 세심하게 작업한 도복이었다.
하지만 왕종형 이놈이 아까 한 말을 생각해 보면 이는 명백한 고의였다.
툭! 투둑!
가슴 깃을 거칠게 떼어 놓은 지영이 상체를 세우며 뒤로 물러났다.
피식.
“재밌네.”
시합 중에 지영이 중얼거리자 왕종형이 히죽 웃었다. 지영은 따로 심판에게 확인해 달라고 하지 않고, 바로 시합을 이어나갔다.
왕종형은 도복에 작업을 해놓았기 때문에 잡기 싸움에 굉장히 집중했다.
지영이 잡으려고만 하면 어떻게 해서든 뜯어냈다.
반칙의 유리함을 이끌어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영은 차분했다. 조금씩 전진하면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상태라면 높은 확률로.
마데!
시도!
시도!
둘 다 반칙을 받게 되어 있었다.
반칙을 받는 사이 도복을 고쳐 입은 지영은 하지메! 사인과 동시에 다시 나아갔다. 이번에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깃을 최대한 내주지 않겠다는 일념이 보이는 잡기 싸움이 시작되었고, 지영은 그에 한숨과 함께 가만히 상체를 숙였다.
가슴 깃도 좋고, 등판 깃도 좋으니까, 어디든지 먼저 잡으라는 무언의 메시지.
이런 지영의 도발에 왕종형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사실 지영은 잡기 싸움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굳이 먼저 유리한 깃을 잡지 않아도 상대를 메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실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또래들은 지영의 유도를 도사 유도라고 했다.
도사 유도는 느긋한 유도를 말했다.
이기면 상관없지만 지는 중이라면 도사 유도를 하면 욕 얻어 처먹기 딱 좋지만, 어차피 이기면 장땡인 게 바로 이 바닥이었다. 그리고 딱히, 이런 도사 유도가 스포츠맨십을 위반하는 방식도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기분은 좀 나쁠 수도 있었다.
자신의 먼저 깃을 선점하면 유리한 스포츠인 유도에서, 이런 자세는 곧 상대를 무시하는 게 되니까.
그리고 왕종형은 이런 지영의 도발에 반응했다.
그래서 도복을 잡는 대신, 모두걸기를 때렸다.
아니…… 이건 그냥 로우킥이었다.
퍽!
움찔!
순간적으로 피하지 못해 그대로 얻어맞은 지영의 눈매가 일순 꿈틀거렸다. 모두걸기가 아니었다. 이건 그냥 발등으로 지영의 발목을 걷어찬 거나 마찬가지였다.
짜르르 울리는 통증. 그게 지영의 이성을 단숨에 확 날려버렸다. 아니, 날려버릴 뻔했다. 가까스로 날아가는 이성을 붙잡은 지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카메라를 통해 대기실에 전달이 됐고, 황금세대가 일순간 탄식을 흘렸다.
“아…… 저 X신, 진짜.”
지영의 눈빛이 감정이 없는 것처럼 싸하게 변하자, 이성진인 탄식과 함께 왕종형을 욕했다. 그걸 지켜보는 강한결과 임효중의 표정 또한 심상치 않았다.
그들이 아는 강지영은 세상 순한 인간이지만, 매너 없는 짓거리에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경우가 그랬다.
운동선수들은 애초에 전부 부상에 민감했다. 아무리 젊고, 쇠도 씹어먹을 나이의 몸이라지만 제대로 다치면 재활을 해도 복귀까지 몇 달을 걸리는 부상이 수두룩했다. 거의 모든 스포츠가 이런 부상을 선수의 등 위에 올려놓고 진행된다.
떨어지면 대형 사고와 같은 부상이 터지는 거고.
유도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를 넘기는 운동이라서 부상이 진짜 자주 찾아오는 게 바로 유도였다. 특히 관절이나 인대 쪽은, 서른만 넘어가도 너덜너덜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황금세대는 임대성 코치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바로 부상에 관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지금 왕종형은 그냥 지영의 발목을 걷어찼다.
저건 기술도 뭣도 아닌, 그냥 폭력이었다. 세상 순하지만 한 번 눈이 돌아가면 가장 무서운 게 강지영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황금세대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왕종형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런 황금세대가 자신을 걱정하는지도 모르는 왕종형이, 다시 한번 지영의 발목을 노리고 모두걸기를 날렸다.
이번엔 그래도 교묘하게 발바닥과 발등의 미묘한 각도로 걷어찼다. 가슴 깃을 잡은 상태에서 걷어차 지영은 이걸 피할 수 없었다.
피하는 순간 자세가 무너지고, 기술에 걸릴 위험이 올라가니까.
빡!
그렇게 두 방째 맞았을 때, 지영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확 진해졌다.
‘발목을…… 노리네?’
다른 데도 아니고, 발목을?
심지어…… 뼈가 가루가 되었던 그 발목을?
지영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던 그 사고가 만든 끔찍한 기억이 다시금 새록새록 기억나기 시작했다.
부아앙!
끼기긱!
쿵!
꺄아아악!
온갖 부정적인 소음이 이어지고, 그다음은 으적! 우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끔찍한 고통이 뇌리를 강타했다. 그런 기억이 떠오르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트라우마다.
지영은 눈이 돌아 가버릴 것 같은 분노를 느끼는 와중에도 자신이 느끼는 이 분노와 고통, 두려움이 회귀를 했음에도 나아지지 않은 PTSD라는 걸 깨달았다.
회귀 전엔 정신과 진료를 제법 받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힘들어져서 약물을 포함한 모든 치료를 끊었던 지영이었다.
그런 외상후스트레스 장애가 다시금 지영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시합 중인 지금.
마데!
시도!
시도!
두 번째 반칙.
반칙을 받자 심판에게 꾸벅 인사를 한 왕종형이 지영을 보며 히죽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마치 경기가 재밌다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지영의 눈엔 아니었다.
이놈은 자신의 도발을 걷어참으로써, 시합이 자신의 뜻대로 풀려가고 있다는 걸 지금 자신에게 어필하는 중이었다.
마치, 이제 어쩔 거냐? 큭큭!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 왕종형을 가만히 보던 지영은 하지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앞으로 나아갔다.
상체를 숙여 깃을 주자, 이번에도 왕종형은 모두걸기를 가장한 로우킥를 시전하셨다. 하지만 지영은 언제까지고 똑같은 기술에 당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왕종형은 1회전 때 구혁이 지영에게 뭔 기술을 걸다가 되치기를 당했는지, 그걸 알았어야 했다.
파박! 툭.
로우킥을 치러 나오는 순간 지영은 짧게 스텝을 밟고 안으로 파고들어 가 순간적으로 안 뒤축을 걸어 어깨로 툭 밀쳤다.
워낙 빨라서, 왕종형은 치려던 자세 그대로 몸이 뒤로 붕 밀려났고, 급히 상체를 틀어 겨우 한판을 면했다.
와자리!
심판의 절반 사인이 떨어지고 주춤거리며 일어나는 왕종형.
그런 왕종형을 지영은 가만히 바라보면서 도복을 고쳐 입었다. 꿈틀, 평온한 지영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표정이 꽤 험상궂게 변했다.
그러곤 이제 2분 30초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확인하곤 곧장 달려들었다. 이미 지도가 두 개라, 하나만 더 받아도 게임이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남은 건, 공격밖에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지영은 도복 깃을 이번에도 의도적으로 내줬다. 왕종형은 지영의 가슴 깃과 소매 깃을 잡자마자 바로 털어서 업어치기를 걸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하니 스텝도, 중심도 엉망이라 기술이 제대로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런 왕종형의 기술을 너무 편안하게 방어한 지영은, 지영이 굳히기를 여태 안 했기 때문에 마데도 안 했는데 일어나려는 왕종형의 목깃을 순간적으로 잡아채서 틈을 만들고,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서 자신의 가슴 깃을 단단히 잡았다.
그러곤 허벅지 안쪽으로 목을 걸며 그대로 사선으로 굴렀다.
한 바퀴 구르는 사이 이미 지영은 팔을 잡아채 당긴 상태였고, 자비 없이 몸을 틀어 꺾었다.
뚝! 뚜둑! 우두둑!
섬뜩한 소리가 연달아서 들려왔고, 지영은 팔을 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지영이 일어나고 수초 뒤.
“악! 아악! 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이, 체육관을 가득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