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결의 마음 (1)
아리엘은 머리가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눈과 이마는 타오를 듯이 뜨거웠고, 속은 메스꺼울 정도로 울렁거렸다. 온몸이 무거워진 기분. 깊게 가라앉아버린 의식. 하지만 그렇게 전원이 꺼져버린 의식 속에서도 그녀는 조금 전의 행동을 계속해서 되짚어보았다.
바로- 갑작스레 휘청거렸던 유천하와 그를 향해 뛰어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그것은 분명······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폭주하기 시작한 타천자의 능력이 위험해 보였기에 아리엘은 유천하의 상태를 인지하자마자 바로 그를 향해 다가갔고, 공간의 균열이 그를 덮치던 순간-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분명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리엘은 빠르게 생각했다.
만약 저 균열에 닿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의 유천하가 저걸 버텨낼 수 있을까.
자신의 능력으로 저걸 틀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리엘은 그의 앞에 당도한 순간 저 멀리서부터 터져 나왔던 막대한 규모의 마력 파동을 감지하였고, 다시 그 속에 실려 온 소름 끼치는 악의와 사념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이어서 세계와 동조되어있던 그녀의 의식은 곧바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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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멸화급이 역류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키이잉- 그렇기에.
그 사실을 인지한 즉시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유천하의 앞을 막아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덮치게 될 공간의 균열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오든, 멸화급 마수를 상대하기 위해선 적어도 자신보다는 유천하가 더 필요할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
그래.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행동에 그런 합리성을 덧붙여보았다.
······아니, 그건 분명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리엘 자신은 이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가 더 빠르고 쉽게 해낼 수 있다는 걸 깨닫지 않았던가?
물론 유천하의 실력이 멸화급 마수에게까지 통할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식은 본능적으로 유천하가 없으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고, 갑작스레 발생한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녀보다 유천하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론 저런 괴물을 상처입힐 수 없었고, 그것이 가능한 한 사람의 목숨은 분명히 수많은 이의 목숨으로 연결될 테니까.
그러므로 자신은 정말 순수하게, 합리적인 선택을 내린 것이다. 오직 그러한 판단 속에 내린 결정이었다- 아리엘은 무의식 속에서도 계속해서 스스로 그렇게 되뇌어보았다.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과.
유천하를 보며 쌓아온 약간의 열등감.
그러면서도··· 친구로서의 소중함까지.
이성과 감정. 사실은 결국 그 모든 게 얽힌 끝에 내린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으.”
의식을 잃었던 아리엘이 조금씩 되돌아오는 정신 속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바로 그 순간- 눈을 뜬 그녀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건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유천하의 얼굴이었다.
아무런 흔들림 없이 가라앉아있는 눈.
“정신 차렸네.”
“······.”
아니, 그녀는 조금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유천하의 표정 속에 담겨있는 염려를 느낄 수 있었다. 차분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 속에는 분명 미미한 염려가 깃들어있었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다시 멍해지는 기분.
“······아.”
하지만 의식을 되찾은 아리엘의 이성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이내 그녀는 뻐근한 이마를 짚고서는 풀어진 정신을 되잡으며 세차게 머리를 뒤흔들어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아리엘은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다르지 않을 바 없어 보이는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 질문을 건네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든 게 아까와 같은 풍경을 하고 있을지언정 단 한 가지- 분명 빛을 머금고 다색의 형상을 뽐내고 있어야 할 세상이 색채를 모두 빼앗긴 채 오래된 흑백의 사진처럼 빛바랜 풍경만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마치··· 오직 그림자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아리엘의 질문에 유천하는 자신의 눈으로 파악한 부분들을, 다시 그녀에게 말해줄 수 있는 부분만을 대답해주었다.
“녀석의 능력인 것 같은데 이상한 곳에 들어와 버렸어. 피해는 없는데 탈출 방법은 아직 못 찾았고, 지금은··· 10분 정도 지났네.”
“아! 맞아 다친 곳은 없어? 아까 왜 그런 거야?! 그게 뭔 줄 알고 그대로 있던 건데···!”
“나는 멀쩡하니까 네 몸부터 챙겨. 그리고 애초에··· 너는 대체 그걸 왜 네가 대신 맞아주려 한 거야? 여파만으로 기절하는 애가.”
“······.”
염려 어린 물음에 되돌아온 걱정과 질책.
그렇게 교차한 서로의 물음에 그들은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차마 뭐라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을 마주하게 된 아리엘은 그저 못 들은 척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의식을 잃고 있었던 만큼 정말 할 말이 없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그렇다고 솔직한 대답을 돌려주기엔··· 조금은 부끄러운 내용이었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 그것보다··· 다른 애들은? 하린이도 바로 앞에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균열 자체에 휘말린 건 너랑 나밖에 없어. 정확히 말하자면 나한테 쏘아진 걸 네가 몸으로 막아서려다 같이 휘말려 들어온 거지.”
“······.”
“하린 씨는··· 우리가 없어져서 많이 당황하긴 했는데 지금은 3학구로 떠난 상태야.”
정확히 말하자면 이하린은 제 눈앞에서 사라진 그들의 모습에 순간 패닉에 빠졌지만, 그래도 저작권리의 가호로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고선 잠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상황을 파악하러 떠나버렸다.
당연히 유천하로서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까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그녀가 다소 안도한 기색을 내비친 걸 확인하였기에 그로서도 안심할 수 있었을 뿐.
그리고 물론.
“······다행이네 그건.”
아리엘로서도 이 상황에 휘말린 게 그녀뿐이라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안심하게 되었다.
애초에 타천자의 마지막 발악이 이러한 종류의 것이었던 이상 대신 맞아주기는커녕 같이 휘말려 들어온 상황에 아리엘은 자신이 무모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같이 그 앞을 막아섰던 이하린 대신 자신만 이곳에 들어오게 된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 아니겠는가?
물론 그와 동시에 아리엘은 카룬드 때도 그렇고 마력 파동에 휩쓸리기만 하면 의식이 꺼지는 제 몸의 내구도에, 그리고 결국 같이 휘말렸다는 부분 자체에 대해서 씁쓸함을 느끼긴 했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유천하가 무사하고, 자신 또한 무사하다면 지나간 일을 신경 쓸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우선 이 상황부터 해결해야 한다.
“······.”
그렇게 아까부터 조금이지만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천하의 모습에 아리엘은 혹시나 잔소리라도 듣게 될까 봐 살며시 그의 눈치를 살피며 빠르게 합리화를 끝마쳤고, 이내 사방을 향해 마력까지 퍼트리며 주변을 파악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뭐야 여기.”
이곳이 눈에 들어오는 풍경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이질적인 곳이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아리엘의 입에서 다소 벙찐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내 차분하게 되돌아오는 대답.
“공간의 틈. 이면 세계. 허상 차원. 분류하자면 그런 쪽이겠지만 정확히는 몰라. 아니, 우리가 알 수 없는 쪽이라 하는 게 맞겠지.”
“······뭐?”
“뭐라 말하기 모호한 곳이라는 소리야.”
유천하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미간을 찌푸린 채 순간 허공을 노려보았고, 아리엘은 그런 유천하의 행동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금 사방으로 마력을 퍼트려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결과는 동일했을 뿐.
이곳에는 대기 중에 마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분명 시야 너머로는 아까와 같은 풍경과 함께 그 속에서 움직이는 생도들의 모습까지 엿보이고 있었지만, 정작 그들 중에서 이곳을 인식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저게 뭐야··· 이게,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신이시여. 제발··· 씨발. 이 씨이바알···!!
-3학구. 어서 저··· 아, 아니 실체화되기 전에 일단 사람들부터 대피시켜야 해. 빨리!
-대피? 도대체 어디로? 어느 세월에···?
“······.”
마치 자신들이 신기루라도 되는 것처럼 그대로 몸을 통과해 지나치기까지 했다. 그것도 아무런 저항조차 없이, 가뿐하게 말이다.
도대체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정말 유령이라도 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혹시나 해서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건물의 잔해를 만져보려 해봤지만 손은 그대로 벽을 투과해 지나쳤을 따름. 설마 아까 유천하랑 함께 죽어버린 건 아닐까– 순간 아리엘의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마저 떠올랐을 정도였다.
그렇게 그녀는 빠르게 몇 가지 검증을 거쳐본 끝에, 결국 이곳이 현실과는 다른 좌표에 위치한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곳에서도 차원 너머, 현실의 상황을 똑같이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로 인해 지금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콰과과과과과과-!!
아리엘은 결국 저 상공에 떠오르고 있는 잿빛의 형상을 확인한 순간. 끊임없이 몸을 꿈틀거리는 그림자의 밀집체를 목도하고선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수백 미터 크기로 일렁거리는 그림자.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잿빛의 산.
그리고.
그곳에서 터져 나온 일그러진 포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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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하듯 토해져 나온 마수의 울음소리에 떨리듯 대기가 진동하였고, 저런 게 어떻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걸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마저 아리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아리엘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저런 비현실적인 규모의 무언가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파괴 행각을 벌인다는 건-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끊임없이 깎여나가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저게 ‘수호자급’ 마수라는 점이었다.
잿빛탑에서 역류해 그 속에 탑의 근원석을 박아 넣은 채 압도적인 마력을 토해내는 부정의 사념체. 그것도 여명급도, 황혼급도 아닌 멸화급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어버리기엔 충분했다.
아니, 저걸 보고 어떻게 평정을 유지할까.
그녀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여명급을 처음 봤을 땐 확실히 다른 개체들에 비해 압도적이라는 감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황혼급을 처음 봤을 땐 그저 괴물이라는 생각만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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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 위에는 재앙이 부유하고 있었다.
실체화된 악의를 그 속에 가득 품고서.
막대한 부정 사념을 사방에 토해내면서.
“저거 전부··· 마력이 가시화되는 거지?”
“마력 맞아. 그것도 아직 실체화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새어 나온 정도밖에 안 되겠지.”
“······도대체 어느 정도로··· 마력이······.”
아리엘은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비록 이곳에선 마력을 감지할 수 없었지만 지금 멸화급 마수의 주변에는 육안만으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뭉쳐진 마력이 가시화된 파문을 새기며 퍼져나오는 중이었다.
심지어 아직 제대로 현실에 실체화를 이뤄내지도 못하고 있음에도 그런 수준이었으니 그야말로 정말, 정말 말도 안 되는 마력량!
저 비대한 마력 때문에 실체화까진 시간이 걸린다지만, 오히려 저 마력을 모조리 실체화시킨다면 도대체 저걸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아리엘로서는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저기서 온전히 실체화까지 이루게 된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마력을 쏟아내게 되는 걸까.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심층 마력은 최소 7만, 아니 10만?’
애초에 보편적으로는 여명급 마수라 해도 단독 토벌을 가정한다면 상위권 공략자- 즉 등천자만이 확실히 이긴다고 확신할 수 있었고, 그런 여명급에 비해 3~5배의 마력 차이를 갖춘 황혼급은 그들 중에서도 다시 완숙한 경험을 지닌 이들만이 상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미쳤어. 정말 미쳤어.’
그 기준에서도 5~10배에 마력량을 지닌 괴물은 도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걸까.
일개 단일 개체가 지니기에는 그야말로 규격 외의 단위였고, 저 정도까지 마력이 뭉쳐진 이상 단순히 많은 이들이 함께 공격한다 정도의 공격으로 해결할 수준을 넘어선바.
솔직히 말해서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10만 AC라면 생도들의 역량으로는 마력 방벽을 깨트리는 건 고사하고 방벽에 제대로 흠집을 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었고, 아무리 언령이라는 힘이 단순히 마력만으로 결정되는 종류의 이능이 아니었다 할지언정 분명 생도 중에서 최상위권에 있는 그녀조차도 단순 마력량은 5천을 못 넘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표층 마력은 그럼 최소 2만에서 3만.’
그녀의 마력이 고작 그 정도고, 다시 유천하의 마력량도 5천 AC를 가까스로 넘긴 상태에서 과연 누가 저 괴물 같은 마력의 밀집을 뚫고 마력 방벽을 긁어낼 수 있다는 걸까.
최소 일격에 2천 AC는 넘겨야 마력 방벽에 생채기라도 낼 수 있을 터- 그렇다면 정말 상위권 유망주는 돼야 방벽에 ‘생채기’를 입히는 게 가능할 것이고, 마수의 재생력을 넘어선 화력으로 방벽을 깎아내려면 일격에 거의 4만 AC에 가까운 값을 때려박아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걸 어떻게?
‘······.’
순식간에 현 상황의 조건과 가능성을 계산해본 아리엘은 결국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멸화급 마수가 정말 그 이름에 걸맞게 항거할 수 없는 재앙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건 최소 하이랭커 규모의 공략대나 국가차원의 대응이 필요한 사태.
단신으로 저것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저 위대한 승천자들밖에 없었으니, 아무리 지금 그녀의 옆에 있는 유천하가 뛰어나다 한들 그에게 최소한의 기회라도 만들어주려면 적어도 생도들로서는 ‘마력방벽’만이라도 깎아내야 했다. 한 명의 하이랭커급으로 대항하기엔 저건 규격 외의 괴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리엘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그렇기에- 이 순간.
“······빨리···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해.”
아리엘은 조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현재 회랑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몇만 명이란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언정 자신들은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제로에 가까운 확률조차도 최소한의 조각을 맞추려면 한 명이라도 더 뛰어난 역량을 갖춘 개개인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라도 합류해야 해. 어서··· 빨리.”
바로 이곳에 있는 자신들이라도 말이다.
***
유천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3학구의 상공을 바라보는 아리엘의 모습을 잠시 지켜봤고, 이내 허공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물론 유천하 또한 지금 상황이 심각하단 것도,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지만, 그로서는 이 사태에 빠지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
“······.”
예를 들자면 당장 지금도 자신의 눈앞에서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쉬쉬거리고 있는 익숙한 사람- 나르화리얀에 대해서 말이다.
[집단전. 시련. 협조. 부탁.]
“······.”
허공에 글자를 띄워내며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의 행동에 유천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우선 그는 이 상황이 시험이라는 것 자체에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이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애초에 이건 이상한 구석이 너무나도 많은 상황이었고, 다시 원작과는 무척이나 동떨어진 흐름의 사건이었다.
간섭을 깨트렸더니 아까보다 더 명확히 인지되기 시작한 상황. 이런 상황에 회랑의 가드가 안 보인다는 것부터가 이상하긴 했다.
하물며 타천자까지 나타나지 않았던가?
적어도 교수진과 가드들, 그리고 승천제를 구경하러 온 다른 공략자들까지 생각한다면 마지막 타천자와 격전을 벌이고 있어야 했던 건 아리엘이나 이하린 같은 생도들이 아니라 현장에서 뛰고 있는 그들이 되어야 했었다.
차라리 카룬드 수준의 마인이었다면 어찌 이해하겠다만, 마지막에 상대했던 녀석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동선이 꼬이더라도 1학구의 한복판에서 그런 짓까지 벌인 마당에 그런 규모의 마력 유동조차 못 느낄 만큼 무능한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등천회랑의 임직원이 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왜곡을 얼마나 세게 걸어 놓았길래 그 부분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그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당장 자신 또한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고도 오히려 정신 간섭에 걸렸고, 저항하다 보니 이런 곳에 오게 되지 않았는가.
[너. 오류. 간섭. 깨트림.]
그런데 나르화리얀도 이게 깨질 줄 몰랐던 모양인지 저를 바라보며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는데, 한번 간섭을 깨트린 탓인지 그로서도 이제는 자신에게 다른 행동을 취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건 당연한 말이었다.
유천하는 작게 미간을 찌푸려보았다.
“······.”
어찌 보면 지금의 상황은 유천하도 회랑 측도 예상치 못한 사고라고 볼 수 있었다.
간섭이 가해지는 걸 정신력으로 떨쳐내고, 다시 간섭이 가해지고, 떨쳐내고를 계속 반복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빈틈이 생겨버렸다. 그로 인해 원래라면 당하지 않았을 발악에 발목을 잡혀버렸으니 유천하가 이곳에 끌려오게 된 이유 자체가 그 간섭의 여파 때문이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로서는 다소 어이가 없는 부분이었을 따름.
그건 주어진 상황이 아닌 외적인 변수. 그것도 시스템 룰 차원에서 발생한 오류였다.
그러니 당연히 어처구니 없을 수밖에.
물론 그렇다고 이걸 다른 아이들에게 말해줘봤자 대부분은 정신 간섭을 이겨내지 못할 테니 무의미했고, 시험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회랑 측도 상당히 곤란해지긴 할 터. 유천하는 작게나마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유천하로서도 이 상황에 마음에 드는 구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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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저런 것까지 준비해 놓았을 줄이야- 전날 밤 재밌는 모습을 기대한다 했던 나르화리얀의 말이 다르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아니, 첫 만남에서부터 승천제에 관해 이야기하던 루타텔의 모습까지 스쳐 지나갔고, 아무리 집단전이라 해도, 생도들의 숫자가 많다고 해도 멸화급 마수가 나올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으니 그로서는 당혹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천하는 조금 즐거웠다.
원래라면 저런 괴물 같은, 아니 괴물을 상대할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1학기가 끝난 뒤에야 찾아왔을 테니, 이렇게 허상 차원에서나마 맞닥트리게 된 건 분명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상황을 파악한 유천하로서는 정신 간섭을 깨트리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행동하는 것과 죽음을 각오하고서 행동했을 때 얻게 되는 결과에는 분명히 큰 차이를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랬다면 정작 이하린이나 다른 이들의 목숨을 신경 쓰느라 골치 아팠을 테니 이렇게 된 게 영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현실이라면 그걸 무시하진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한가지.
“······빨리···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해.”
그렇게 생각하니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유천하는 분명 조금 전 의식이 혼미해졌던 상태에서도 분명히 그녀들- 이하린과 아리엘이 했던 행동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그를 향해 덮쳐오던 공간의 균열과 그것을 받아내기 위해 앞을 막아섰던 두 사람.
이하린에게도, 아리엘에게도 아까의 상황은 분명 현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균열에 닿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대신 맞아도 상관없다는 듯 그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라도 합류해야 해. 어서··· 빨리.”
“······.”
차라리 이하린은 계속 타천자의 특성을 베어내고 있었고, 방어에 자신 있어 한다는 걸 알았으니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까처럼 여파만으로도 의식을 잃을 정도로 방어력이 낮은 아리엘까지 대체 왜 그랬던 걸까- 솔직히 말해서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잠시 만상의 눈으로 차원의 너머를 바라보았고, 멸화급 마수가 끌어모으고 있는 마력의 양을 빠르게 계산해보았을 뿐.
‘실체화까진······ 앞으로 20분 정도인가.’
그렇게 온전히 실체화되기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조급해 보이는 아리엘을 보며 다시금 입을 열어보았다.
아까부터 아리엘이 대답을 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을 현실로 인식하고 있는 그녀에겐 의아하게 느껴지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그로서는 아까 헤어지기 전의 아리엘이 내비쳤던 모습과 조금 전의 행동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물론.
[······.]
지금 그의 옆에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루타텔의 표정도 신경쓰였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