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139화 (139/205)

광란의 축제 (6)

찰나를 베어가르며 그어진 흑색의 궤적.

그림자를 토해내며 허공에 떠오른 타원.

그렇게 유천하의 검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천자의 목을 베어 갈랐던 순간- 그리고 마인의 머리가 허공에 부유하는 것을 확인했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반응속도를 넘어 그가 한 번 더 수차례의 검격을 그어내던 순간.

바로 그 순간.

유천하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확인사살까지··· 결국 예상대로네 이럼.”

한없이 느려지고 느려져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압축된 세계 속에서 멸화급 탑- 몽련에 동화되어 있던 나르화리얀은 푸른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타천자의 심장에서 일렁거리는 공간의 균열을 바라보았고, 이내 담담히 옆에 있던 루타텔을 향해 말을 건네보았다.

그러자 되돌아오는 가라앉은 목소리.

“아니, 예상보다도 더 빠르다 봐야겠지.”

분명 그 목소리 속에는 다소 복잡해 보이는 심경이 담겨있었지만 나르화리얀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가볍게 말을 이어나갔다.

“응. 사건 발생하고 12분 43초. 아니, 맨 처음 적발 시부터 생각하면 18분 59초. 확실히 생도들이라기엔 너무 빠르긴 했어. 이건.”

“······타천자들이 아무것도 못 한 게 컸지.”

“특출난 애들 몇몇이 섞여 있다는 건 알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베헤딕트 저 노망난 놈까지 저렇게 당할 줄이야. 아리엘도 놀라웠지만 역시 유천하 저게 너무 이레귤러야.”

나르화리얀은 그 말을 하면서도 한없이 압축된 시간 속에서도 계속 검을 뻗어내고 있던 유천하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어 보았다.

빛 한 점 없이 가라앉아있는 검은 눈동자.

상대의 목을 베어냈으면서도 망설임 없이 그대로 확인사살까지 이어나가는 유천하의 행동은 분명 무척이나 능숙해 보였고, 그러면서도 이런 순간까지 흔들림조차 없는 그의 표정 속에선 마치 감정 없는 인형과도 같은 무기질적인 분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걸 고작 생도라 생각할 수 있을까- 순간 그런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

그렇기에 나르화리얀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 그래도 혼자 2명이나 잡아낸 것도 어이가 없는데, 이 와중에도 빈틈을 안 보이는 게 더 신기하네. 이 정도면 끝난 셈 아닌가?”

“저건 합리적인 선택이라 봐야겠지. 죽기 직전에 발버둥 치는 것 정돈 가능할 테니까. 저게 멸화급 주교란 걸 생각하면 더더욱.”

“아, 마력의 흐름이 이상해 보이긴 하네. 혹시 경험담인가? 저건 네가 죽인 놈이었잖아. 황혼급 주교까지는 죽여도 안 저러던데.”

“반반이라고 해두지. 저건 교주의 능력과 관련된 것일 테니까. 그리고 그것보단··· 확실히 아크샤님의 말씀이 맞았군. 이걸로 끝이었다면 별다른 의미 없이 마무리됐겠어.”

루타텔은 그렇게 긍정을 표하면서도 조금 꺼림직한 기색을 내비쳤는데, 나르화리얀 또한 그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였다.

애초에 그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정말 과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쯧. 기어코 그 난리를 쳐야 한다는 거네. 근데 아무리 그래도··· 난 조금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르화리얀은 그 말과 함께 의식을 확장해 분화된 차원의 정보를 되새기기 시작했다.

참고로- 현재 멸화급 탑과 의식을 동기화시켜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바로 그 자신. 그렇기에 지금의 나르화리얀은 이 꿈속의 세계에서만큼은 마치 신과도 같은 감각과 권능을 사역할 수 있었으니, 그는 한없이 압축되고 압축된 시간 속에서 빠르게 이번 집단전의 중간결과를 집산해보았을 따름이었다.

“총원 1,478명. 사망 51명. 중상 126명. 경상 348명······ 실질적인 전력 손실을 생각하면 소모는 4분의 1.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하기엔 충분한 경험이 되었을 거 같은데.”

“경험은 됐겠지. 충분하지 않을 뿐이지.”

“이게···? 너무 조급한 거 아니야? 의도는 알겠는데 솔직히 너도 내 말에 동의하잖아.”

“개인적으로는 동의한다. 하지만 반대로 사안의 중요성이 중요성인만큼 이다음이 필요하다는 의견에도 마찬가지로 동의하지.”

루타텔은 그 말을 읊조리며 전장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생도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당장 저 그림자 교단의 주교를 상대로 분투를 토해냈던 자신의 아이부터, 마찬가지로 그들의 역량을 벗어난 적을 상대로도 어떻게든 결의를 다져 보였던 아이들까지. 그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건 그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런 결과가 나온 이상 여기서 멈춘다면 그저 우스운 해프닝밖에 안 될 테니까.”

이번 승천제의 의의를 생각하자면, 그리고 그러한 기획이 준비되었던 배경을 생각하자면 이걸로는 부족하단 것 또한 사실이었다.

“수호자급 마수만 5개체. 그림자 교단의 주교까지 3명. 심지어 멸화급 주교까지 껴있었어. 생도들을 상대로 하이랭커를 내보낸 셈이잖아. 그 정도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20분도 안 돼서, 정작 타천자 2명은 단 한 사람한테 토벌당하고 결국 제대로 된 고난도 없이 순식간에 정리된 이 상황이 말인가?”

그에 나르화리얀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땐 분명 심각한 사태가 맞았을지언정 결과만 놓고 보자면 정말 규모에 비해선 피해가 무척이나 소소한, 그런 사건이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리 하이랭커급의 마인까지 끼어 넣었다 한들 이곳이 등천회랑인 이상, 생도들의 수가 네 자릿수에 달하는 이상 토벌 자체는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그저 그 피해와 속도가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랐을 뿐이지.

그렇기에.

“······유천하 이 녀석이 문제네. 아주.”

그 말과 함께 나르화리얀은 제 앞에 멈춰 서 있는 유천하를 노려보았고, 이내 여러 심정 속에 가볍게 그의 이마를 톡 건드려보았다. 참으로 대견하면서도, 곤란한 녀석이지 않은가- 바로 그런 생각을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물론 그 손은 슥- 하고 그대로 유천하의 이마를 투과한 채 스쳐 지나갔고, 나르화리얀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한번 찼을 뿐.

그러자 그런 나르화리얀의 행동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루타텔의 입에서 다시금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이제까지 보다도 더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말이다.

“심정은 알겠지만 이건 필요한 일이다.”

“쯧. 필요성을 모르는 게 아니라 이제 와서 보니까 너무 과한 것 같아서 이러지. 넘어설 수 없는 걸 시련이라 부를 순 없지 않겠어?”

“아니, 오히려 누구나 이겨낼 수 있는 거라면 그걸 시련이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리고는 루타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멸화급의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는 건 너도 들어서 알고 있지 않나?”

“알아. 요새 회의에서 몇 번 언급됐잖아.”

“그리고 그림자 교단의 움직임도 점점 활발해지고 있지. 그럼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

그에 나르화리얀은 미간을 찌푸렸고, 루타텔은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1차 세계침식으로부터 2차 세계침식까지가 30년. 하지만 마지막 세계침식이 멈춰선 후로 벌써 60년의 세월이 지나갔고, 침식은 여전히 계속되는 중이지. 징조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고, 우리는 다음을 대비해야 해.”

“······.”

“우리가 좋든 싫든, 이건 그런 문제다.”

나르화리얀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도 루타텔도 세계침식을 직접 겪어본 것은 아니었으나 그 이후의 여파만큼은 충분히 겪었으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나르화리얀이 이 세상에 만들어지게 된 인과는 분명 2차 세계침식에서 기인하고 있었으니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그저 기준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었다.

“······아크샤는 10년을 이야기했던가?”

“그래. 늦어도 10년 안에는 시작될 거라 짐작하고 있지. 2번의 세계침식을 겪은 분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우리도 경청할 수밖에.”

“그때를 위한 경험이랍시고 괜히 좌절감과 절망만 심어주게 된다면? 두려움이 각인으로 남아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된다면?”

“······그럼 적어도 공략자가 돼서 침식으로 뛰어드는 것보단 평온하게 살게 되겠지.”

저 말이 향하고 있는 방향의 끝에는 과연 누가 서 있게 될까. 나르화리얀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는 루타텔이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타텔은 분명 평소에도 자신의 아이- 아리엘이 공략자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심경을 은연중에 몇 번이나 드러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로서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쯧. 그래. 한다고 해. 이미 정해놓고 이제 와서 이래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 절망하든 무력함을 느끼든, 어차피 언젠가 한 번쯤은 반드시 겪어야 하는 문제겠지.”

그리고는- 한가지 바람을 되뇌며 손을 들어 다시 세계를 조작해나가기 시작했다.

“1시간, 1시간만 버텨라 이 꼬맹이들아.”

그렇게 나르화리얀은 아크샤로부터 받아온 기억을 그대로 이 거대한 꿈속에 이어버렸고, 다시 몇 가지 조건을 설정해보았다. 이 일이 그들에게 올바른 절망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속에서 두려움을 딛고 재앙에 맞서는 희망을 보여주기를 바라며. 잿빛의 마수를 저 상공의 너머로 띄어 올렸다.

화려한 승천제는 개뿔- 속으로 그런 생각과 함께 아크샤의 말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어?”

세계의 시간을 다시 되돌리려던 나르화리얀은 저도 모르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

“······.”

타천자를 향해 멈춰 있어야 할 유천하의 동공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유천하의 검격은 분명 초속의 세계에서 이루어졌다. 아리엘의 언령이 만들어낸 주박이 어느 정도의 강제력을 띄고 있는지는 그도 직접 겪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눈앞의 타천자 정도의 능력자라면 저항해내는 게 가능하단 사실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검극은 찰나를 베어 갈랐다.

다른 이들이 그의 움직임을 인지하기도 전에 오로지 아리엘만이 목도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유천하의 검은 일격에 타천자의 목을 베어냈고, 이격에 남아있던 한쪽 팔을, 세 번째에 심장의 근원석을 베어냈을 따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콰직-! 그의 검은 다시 한번 타천자의 신체 내부에서 발현된 왜곡에 근원석을 스치고 지나갔고, 균열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뒤틀린 검로는 상대의 가슴을 길게 갈라내었을 뿐.

“······.”

물론- 그 사실을 인지한 즉시 유천하는 곧바로 타천자를 향해 한 번 더 검을 내질렀다.

당연히 저대로 내버려 둬도 죽기야 하겠지만, 잠깐의 시간이 상황을 어느 정도까지 귀찮게 뒤틀어낼 수 있는지 지난번 마율령을 통해 충분히 배웠었던 그로서는 이번에도 그런 번거로운 일에 처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하물며 안 그래도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이 갈수록 점점 더 강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툭.

유천하의 감각. 정확히 말하자면 만상의 눈은 저 자신의 이마를 건드리는 흐릿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고, 허공에서 솟아난 손이 저를 스쳐 지나간 순간 끊임없이 늘어지고 있던 시간의 편린을 인지하게 되었다.

--------------------------------------------······

그건 분명히 보편적으로는 불가능했을 일.

하지만 만상의 눈은 애초부터 언제든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러한 차원의 너머- 그 편린을 들여다보는 게 가능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저 이제까지는 계속되는 위화감 속에 무의식적으로 인지의 왜곡을 느꼈던 그의 직감이 본능적으로 정신간섭을 막기 위해 그러한 인식을 회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현재 유천하의 상태는 오온을 넘어 유식唯識에 도달해있었다는 것.

타천자를 베어내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놓은 상황에서 차원 너머에서 교차한 이질감은 한순간에 그의 감각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이제껏 회피하고 있던 부분을 강제적으로 인지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유천하는 이 순간 저도 모르게 세계를 인지하던 시점을 차원의 너머로 확장시키게 되었고, 만상의 눈은 그곳에 겹쳐져 있던 세계를 단번에 그에게 전달해주기 시작했을 뿐.

그러니까 바로.

[······.]

“······.”

검을 뻗어내고 있던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있던 한 사람- 나르화리얀의 형상을 말이다.

그렇게 한없이 늘어지고 늘어져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세계에서 유천하는 갑작스레 변화하는 주변의 풍경에 빠른 속도로 사고를 이어나갔고, 다시 난데없이 나타난 나르화리얀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능성을 되짚었다.

그것도 금이 가버린 타천자의 근원석을 향해 검을 뻗어내면서,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나르화리얀이 왜 저런 상태로?’

‘마력으로 이루어진 세계. 정신 간섭.’

‘여기는 현실, 아니 현실이 아니야.’

‘인지의 기반 자체가 왜곡되고 있어.’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하지만.

‘······상황은.’

그의 생각이 결국 정답에 도달한 순간.

키이잉-!!

그 즉시 그는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찌릿한 이명에 한순간에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에 휩싸였고, 다시 멍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마치 모든 걸 잊어버리라는 듯. 그렇게.

“······.”

“······.”

그리고 이내- 그와 동시에 타천자를 향해 그어지던 검이 허공에서 덜컥 멈춰버렸고, 그렇게 그의 정신이 멍해진 사이에 드디어 아리엘의 언령에 사로잡혀있던 타천자의 감각도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시점으로 따지자면 아리엘이 언령을 읊조리고 대략 1초하고도 반이 지나갔던 순간.

그리고- 그 순간 타천자는 깨달았다.

카가각··· 치직.

바로 자신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검신에 베여 금이 가버린 근원석에선 이미 그림자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그가 알기로는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었다. 재생은 오로지 근원석의 마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러한 근원이 파괴당한 이상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을 뿐.

그렇기에 타천자는 빠르게 제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의 호오와는 별개로, 그건 이미 항거할 수 없는 결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의 이성은 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을지언정- 그를 타천자로 만들었던 그의 본능은 추잡하게 삶을 갈구하기 시작했고, 다시 더 빠르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

그리고 그렇게.

수용에서 절망, 그리고 분노에서 다시 부정으로- 역순으로 뻗어 나간 마인의 의식은 결국 순식간에 휘몰아쳐 한없는 분노에 맞닿아버렸고, 그것이 제 죽음과 이어진 순간.

바로 그 순간.

----------------------------------------------!!

콰드드드득-!! 그는 제 죽음을 대가로 심장의 마력을 모조리 치환해 저 자신의 특성과 교주에게 부여받은 특성까지 모조리 폭주시켰으니, 그렇게 타천자 베헤딕트는 유천하를 향해 휘몰아치던 왜곡의 선형마저 모두 풀어헤쳐 그대로 추악하고도 추잡한 악의와 함께 사방 전역을 휘저어버리기 시작했다.

오로지 순수한 분노와 절망을 담아서.

최대한 많은 생명과 함께 죽기 위해.

그저- 혼자 죽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순식간에 뻗어 나간 부정 사념은 끝없는 악의와 추악한 절망을 담고서 마인의 생명을 불태워 100m의 한계를 넘어 침식의 마력을 퍼트리기 시작했고, 멍하니 그들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던 생도들은 그걸 깨닫기도 전에 단번에 그곳에 휘말리고야 말았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

순식간에 뒤섞이는 공간의 단면.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균열.

당연히 그들은 그 마력의 규모도 규모였거니와 그 속에서 전해지는 숨이 막힐 정도의 악의 속에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그 왜곡과 균열에 휘말려 한 명씩 사방으로 튕겨 나가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니, 저 미친!”

단 한 순간에 벌어진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히려 몸을 지탱하며 그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존재했으니, 그건 바로 타천자와 맞서 싸웠던 이들이었다. 아직도 세계와의 동조를 풀지 않은 채 마력을 틀어내는 아리엘과 자신의 몸이 뒤틀리는 것도 무시하며 달려나가는 이하린.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는 마르네와 이솔라까지.

하이랭커급 각성자가 목숨을 도외시하고 이능을 폭주시켰던 만큼 그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그녀들은 그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발을 박찰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리엘과 이하린으로서는 더더욱 말이다.

왜냐하면.

“천하 씨!”

그 혼돈의 중심부- 바로 그곳에서 검을 뻗어내던 유천하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휘청거리고 있는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현재 유천하의 상태는 한순간에도 수십 번씩 휘몰아치는 의식의 교차에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그건 조금 전 시야에 들어왔던 광경에 정신의 왜곡이 시작되고, 다시 의식이 그것을 인지하며 부여잡는 걸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던 탓.

정신의 간섭이 일어나는 즉시 만상의 눈이 세계를 직시하며 다시금 현실을 인지한다. 그러한 인식의 기반이 왜곡 당하려는 순간 유천하의 정신이 한순간에 일념을 그려낸다.

그야말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의식의 교차.

차라리 진시우나 이하린의 경우처럼 곧바로 인지의 왜곡이 이루어졌다면 그나마 괜찮았겠지만, 그의 정신력은 간섭이 시작된 즉시 그것에 강제로 저항해 버텨내는 데 성공했고, 오히려 그러한 의식의 집념은 끊임없는 정신간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물론.

[진짜··· 이건 뭐 하는 녀석이야 도대체?]

[정신력만으로도··· 이게 가능하긴 했군.]

현재 차원의 너머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르화리얀과 루타텔로서는 그런 유천하의 상태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을 뿐.

저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세계의 간섭에 저항하는 것은 단순히 의식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저항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탑에 들어온 것이라면 모를까, 이미 왜곡된 차원 안에 들어온 상태에서 저렇게 간섭을 떨쳐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들의 상식선에서는 말이다.

그렇기에 두 명의 승천자는 유천하가 저들을 인식했다는 사실도 당황스러웠고,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의 간섭에 저항해내고 있다는 사실에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의 활약은 담담히 지켜봤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지금은 정말이지 놀라웠으니까.

그러나.

콰과과과과과과과과-!!

현재 상황이 허상이라는 걸 알고 있는 그들이나 유천하라면 모를까, 지금의 상황을 온전한 현실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던 주연들로서는 폭주의 중심에 놓인 상태로 휘청거리는 그의 상태가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고, 그렇기에 그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각자 다른 이유를 그 속에 품고서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카드득-!! 타천자의 몸이 갈라지며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휘청거리던 유천하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온몸의 감각이 달아오르는 기분- 분명히 이 순간에도 그의 의식 속에서는 끊임없이 의식의 교차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순간 그러한 사실을 잊게 했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규모의 마력의 전조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무척이나 빠르게 몰려드는 마력의 해일.

허공에서 시작되는 격렬한 무형의 파문.

그렇게.

모두가 타천자의 마지막 발악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그리고 주연들이 유천하의 상태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오로지 유천하만이 혼탁한 정신 속에서도 그 전조를 눈치챘다.

그렇기에- 그는 멍해지는 의식 속에 순간적으로 헛웃음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이내.

카륵··· 콰아아아앙-!!!

임계점을 넘어선 타천자의 몸이 그림자로 화해 터져 나감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화한 마력이 공간의 균열을 일으키며 그곳을 중심으로 주변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저 멀리- 3학구에 있던 멸화급 탑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림자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정말 말도 안 되는 규모로 말이다.

유천하는 그렇게 저를 지키려는 듯 앞을 막아서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공간의 균열에 휘말렸고, 그곳에 빨려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잿빛으로 물들어가는 멸화급 탑.

그리고 그곳에서 튀어나온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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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 없는 몸뚱어리로 하늘 위를 부유하는 잿빛의 고래.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의 파문을 일으키며 일렁거리는 수백 미터 크기의 그림자- 바로 멸화급 마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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