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81화 (81/205)

무의 의미 (3)

마율령을 죽인 직후.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를 가로지르는 와중에도 유천하는 계속해서 번잡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금이 간 검을 바라보던 순간부터 시작된 심란함은, 그렇게 계속해서 그의 세계를 뒤흔들어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유천하는 이하린을 향해 달려가던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계속해서 그 흔들림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

분명 교주가 없는 곳에서 그는 소교주였고, 신교가 없는 곳에 와서도 그는 소교주였다.

그것이 그의 의무였고, 그의 삶이었다. 그렇기에 이제껏 그는 평온을 거부해왔다. 지난번 사건을 겪으며 그는 여유를 버렸다.

그리고 오늘.

마율령을 상대하며 유천하는 다시 스스로의 의무를 내려놓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이제서야 현실을 마주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만상세계의 부름에 응한 순간부터 그의 의무는 이미 그의 손에서 벗어난 뒤였을 뿐이었고, 이제까지의 유천하는 그저 오기와 미련 속에 과거를 붙들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기에 순례자의 길에서 했던 고뇌도.

등천의 구도자를 거치며 느꼈던 기분도.

다시- 원작의 무대 위로 올라와 인물들과 얽히며 쌓여가던 감정도.

어찌 보면 그는 합리화 속에 스스로 이 세계와 거리를 두고,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두고 온 미련이 저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기에 그는 신교의 사정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목표를 끊임없이 되새겼으니. 그걸 위해 그는 여유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훗날의 미래만을 바라보며 걸어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율령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사람의 삶을 내던진 녀석의 선택도, 그림자에 침식되어가며 내뱉었던 녀석의 본심도, 마율령은 그저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녀석이었고, 그 잠깐의 교전 속에서도 유천하는 그 사실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금이 간 검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번뇌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껏 자신은 스스로가 원하는 삶이 아닌 이런저런 의무에 얽매여 합리화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은 유천하는 다시 반 토막 난 의무를 바라보며 자신의 검에 잡념이 너무 많이 담겨있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 사실을 체감한 순간 유천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올 뻔 했다.

이하린이 보내준 위치를 향해 달려가면서도, 빗줄기에 젖어든 몸이 불쾌하게 느껴지던 순간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자신은 남궁설아에게 뭐라 말했던가?

그녀의 행동에서 항상 조급함이 느껴진다고, 더 침착하게 판단해도 될 것을 그러지 못하기에 검이 흔들리는 것이라 했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검이 바라보고 있는 게 눈앞의 상대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향하고 있기에 의념이 흔들리는 것이라 했었다.

그 기억을 되새긴 순간 유천하는 저답지 않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자신이 뭐라고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런 말을 한 주제에 오히려 조급함에 쫒기던것은 바로 저 자신이었고, 눈앞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또한 바로 그 자신이었으니까. 이게 그 순간 유천하의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위타극과 마주한 이 순간에도 혼탁한 번뇌 속에 휩싸여 있었다.

환생자 유천하. 소교주 유천하.

지금의 자신. 다시 유천하.

분명 무림에 태어나 천마신교의 업을 등에 짊어졌어도 그의 시작은 전생의 기억에 뿌리 박혀있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던 평범한 사람. 그리고 다시 ‘천마’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짊어지기 위해. 시조의 의의를 되새기기 위해 정련되어온 그는 어느 순간 소교주 유천하로 벼려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순간.

무림을 떠나온 그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소교주 유천하의 의무는 부러졌고, 지금 비 내리는 도시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건 오로지 그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건 자신이 무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밤새 검을 휘두르다 보면 시간을 잊어버릴 때가 있었다. 몸은 고되고 육신은 지쳐가지만 정신만큼은 명정해져, 고뇌도 고민도 모두 내려놓은 채, 아무런 생각 없이 검을 휘두르며 지새온 나날이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아무런 근심 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시조로부터 쌓여온 사람의 업.

다시 스스로가 쌓아낸 자신의 업.

세계가 변하더라도, 차원의 벽을 넘어선 이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 그의 본질을 뒤받쳐주는 자신의 세월.

그것이 바로 그가 쌓아온 무의 업.

그렇기에 유천하는 무인이었고, 그렇기에 유천하는 꿈틀거리는 심상의 매듭을 느끼면서도 위타극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

그들은 서로에 관해 묻지 않았다.

이 순간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기에 그저 서로의 손을 뻗어냈다.

단 한 번의 격돌.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이 맞물려 들어가는 강철의 교합. 벼락처럼 뻗어 나간 검신은 침묵 속에서 서로의 망념과 미련을 부딪쳤고, 그렇게 교차하는 칼날 속에서.

----------------------------------!!

바닥이 갈라지고, 대기가 밀려나갔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명은 그대로 연이어 터져 나온 기파에 휘말려 묻혀버렸고, 첫 검격이 교차한 극점에서부터 시작된 힘의 격류는 일순간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의 호흡마저 한순간에 빼앗아버렸다.

소리마저 뒤로한 채 시작된 파도.

파란을 자아내며 휘몰아치는 힘의 격류!

그리고 그렇게.

콰과가가가-!!!

콰앙-!! 뒤늦게 터져 나온 굉음 속에서 다시 한 번 서로의 검이 부딪혔다. 육신의 전력을 끌어모아 휘둘러진 일격. 그건 상대의 전력을 가늠하기 위해서도,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아닌, 오로지 상대를 베어내겠다는 일념 속에 그어진 패도의 검이었다.

서로의 검은 망설임 없이 쏘아졌고, 반 토막 난 칼날이 부딪히며 불씨를 토해낸다.

카가가각-!!

하지만 두 개의 칼날은 모두 반으로 부러져 있었고, 한쪽은 일그러진. 그리고 다시 한쪽은 풍화된 모습으로 그렇게 비명을 내질렀을 뿐. 그렇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시작된 검격은 똑같은 강세를 품고 쏘아져 나갔다.

단 한 순간. 맞부딪힌 서로의 검극!

콰아아앙-!! 그곳에서 터져 나온 기파가 사방을 유린하며 퍼져 나왔고, 그 순간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상대를 베어내기 위해 검을 뻗어냈다.

패검이 부딪혔고, 쾌검이 쏘아진다.

그리고 강검이. 다시 유검이.

그들은 만검의 갈래에 발을 들인 자들.

한 번의 호흡이 지나갈 동안 수십 차례의 궤적이 허공에 그어졌고, 다시 순식간에 뒤바뀌는 검격은 서로의 검을 향해 똑같은 모습으로 펼쳐지기 시작.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굉음 속에 강철은 계속해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피식-! 서로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유천하의 팔에서 피가, 그리고 다시 위타극의 어깨에서 그림자가 뿜어져 나온다.

“······.”

“······.”

하지만 그들은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그대로 격전을 이어나갔다. 칼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로는 다시 상대의 도를 튕겨냈고, 후려친 검신이 흔들린 순간 쏘아져 나간 검극은 휘감긴 도속에 흐트러졌다.

그리고 다시 검극이 부딪힌다.

키식- 겹쳐진 극점에서부터 터져 나온 파동은 일순간 떨어지던 빗줄기마저 밀어낸 채 공백을 자아냈고, 이내 뒤늦게 밀려 들어온 대기 속에 다시금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지근거리에서 뿜어진 핏빛의 강기는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그대로 참격을 쏘아냈고, 다시 유천하 또한 그에 칠흑의 반월을 쏘아내 그에 대응. 코앞에서 터져 나온 적흑의 참격은 그렇게 살의 속에 교차했을 뿐.

-----------------------------!!

밀려난 대기 속에 뭉개진 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와 동시에 부딪힘 속에 깨져나간 강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파편은 당연히 이하린이 서 있던 곳으로도 날아왔고, 그녀의 뒤에는 남궁설아와 어린아이가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온 힘을 짜내 검강을 발현해낼 수밖에 없었다.

콰아앙-!!

“······윽!”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편을 막아내는 순간 그대로 손이 저릿해졌을 정도. 전력을 쏟아내는 그들의 검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압력을 그 속에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하린은 말로 형용하기 힘든 심경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유천하가 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몇 분이나 더 버틸 수 있었을까? 3분? 아니, 이 몸 상태론 1분이라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 몇 분을 상대한 것만으로도 이하린의 몸 상태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하린은 염려와 걱정, 그리고 희망을 담아 유천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메시지를 보고 온 것인지, 아니면 도심을 헤매다 발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유천하는 그녀들을 대신해 위타극과 맞서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 순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

반 토막 난 유천하의 검.

카각- 그 위에 새겨지고 있는 균열을.

***

그렇게 일순간에 수십 합을 마주한 결과.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단 한 걸음- 그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라는 사실을.

물론 똑같이 초절정의 벽을 앞에 두고 멈춰 서있는 이들이었기에 분명 그들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극의를 넘어 벽에 올라선 자와 극의를 넘어 벽을 마주한 자. 그건 단 한 수의 차이. 아니, 그것보다도 더 얕은 실낱같은 틈새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위타극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적이었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별 볼 일 없는 자였다면 아무런 상관없었을 터. 하지만 그게 아니었기에 위타극이 꺼낸 말은 단 한 가지였을 뿐이었다.

“······훌륭하군.”

전신을 저밀어오는 살의와 정련된 기세 때문에 잠시 착각했지만 새롭게 나타난 적은 분명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소년이라기에는 성숙한, 하지만 청년이라기엔 아직은 앳된 기색을 품고 있는 얼굴.

하지만 그런 상대가 갖추고 있는 실력만큼은 실로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어떻게 저런 나이로 저런 무예를 펼쳐낼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저런 무업을 쌓을 수 있었던 걸까. 아직 무림이 존재하던 시절 위타극이 마주했던 수많은 무인들 중에서도 이 순간 그의 눈앞에 나타난 유천하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절정의 극의. 그 너머에 발을 들인 자.

저 무림이 살아있던 시절에도 무의 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이들 중 극히 일부만이- 만 명의 무인이 존재한다면 그 중 한 명만이 극의를 깨우쳐 벽을 넘어 서야만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절정고수라 칭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절정의 너머.

초절정의 세계에 발을 들인 자는 마도련과 무림맹이 살아 숨 쉬던 시절에도 단 4명에 불과했고, 그 벽 앞에 도달한 자도 50명을 넘기지 못했다. 그렇기에 초절정의 벽. 그 바로 앞에 멈춰 서게 된 자신만 해도 무림에서는 분명 손꼽히는 실력을 지닌 고수였다. 그건 지금에 와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렇기에 위타극은 실로 오랜만에 놀랍다는 감정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인과의 흐름 속에, 어떤 사연을 품었기에 이런 자가 만들어질 수 있는 걸까.

카가가가각-!!

위타극은 메마른 자아 속에서도 그 사실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에 갉아 먹히고, 다시 심마에 사로잡힌 채 세월에 풍화되었을지언정 그 또한 무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위타극은 다시 심마에 휩싸였다.

이 비틀린 시대에선 모든 게 부질없었기에.

“허나 부족하다.”

콰아아앙-!!!

무엇이 무고, 무엇이 무림이란 말인가.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위타극을 붙잡고 있는 화두는 이미 심마가 되어 망념으로 변한 지 오래였고, 그렇기에 위타극은 유천하의 무위에 감탄하면서도 안타까웠고, 또한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어떠한 삶을 거쳐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타극이 느끼기에 유천하는 분명 자신보다 하수였다.

단 한 수의 차이.

허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차이였다.

하지만 자신은 침식에 사로잡힌 마인이었고, 유천하는 피륙을 지닌 사람이었으니 이 싸움의 결과를 예상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푸슉-! 다시 유천하의 가슴이 베임과 동시에 피가 터져 나왔고, 동시에 떨어져 나간 위타극의 귓가는 그림자가 되어 허공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일렁거리는 그림자는 느릿하게나마 그 형체를 재생시키고 있었고, 사람의 몸을 가진 유천하는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닥치거라.”

서걱-! 물론 그런 와중에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검을 내지르는 유천하의 기세는 분명 대단하였지만 그 모든건 죽음으로서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었기에 위타극은 무감에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

그 눈을 마주하며 유천하 또한 생각했다.

한 세기를 살아온 괴물이라 했던가? 확실히 위타극은 자신보다 강했다. 유천하는 첫 격돌부터 이어진 수십 합의 교차 속에 그 사실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녀석은 그 세월만큼이나 강대한 힘을 그 속에 품고 있었고, 그건 단순히 내공이 많다거나 힘이 강하다거나, 그런 수준의 이야기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무武

위타극은 그의 도가 증명하듯 세월 속에 삐걱거리고 풍화되어갔을지언정, 분명 마인 임과 동시에 무인이었다.

망념에 사로잡혔을지언정 그가 쌓아온 무는 위협적이었고,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 무의 기량. 유천하는 한순간의 격돌 속에서 그것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카가가가-!!

그렇기에 다시금 교차한 검극 너머로 위타극을 응시하며 유천하는 생각했다.

적원회의 마인들과 마율령을 정리하고 오느라 업륜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그 와중에 그의 검은 반으로 부러져 버렸다. 그나마 위타극의 도 또한 반 토막이 난 상황이었기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절대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뿐.

하지만 그 모든 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피해를 감수하고 마율령을 상대한 것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검을 터트린 것도, 그리고 다시 위타극과 검을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마저도. 그 모든 건 그의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현실을 직시했다.

“······.”

상대와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 봤자 서로 초절정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 채 벽 앞에 서성이고 있는 반푼이 들이었을 뿐. 그러니 이 순간 유천하가 해야 할 건 다시 망설임 없이 검을 쏘아내는 것이었다.

심상의 매듭이 꿈틀거린다.

복잡한 머릿속에서 심마가 일렁거렸다.

그리고 다시.

퀴식-! 피가 튀어 올랐다.

베인 뺨이 화끈거림과 동시에 유천하의 검 또한 위타극을 베어냈고, 그 어깨에서 그림자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다시 유천하의 손이 베였다. 그리고 위타극의 옆구리가 베여나갔다.

한순간에 교차하는 수십 번의 교합!

카가가각-!! 찰나에 중첩된 파열음이 화음을 이루어나가는 순간에도 그들은 검을 휘둘렀다. 단 한순간의 판단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갈림길 사이에서 그들은 망설임 없이 팔을 뻗어냈고,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교차하는 검극 아래 흐트러지는 궤적 사이에서 유천하는 망설임 없이 생사의 줄타기를 펼쳐내고 있었을 뿐.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도.

검극이 부딪히며 자아내는 강렬한 굉음도.

거칠게 발을 내디디며 신형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소리도. 다시 화음처럼 쌓여나가는 생사의 소음도.

모두 이 순간 교차하고 있었다.

------------------------------!!

그렇기에 유천하는 바라보았다.

수십 번의 궤적이 이어지는 흐름을. 몰아치는 격류 속에 생겨나는 대기의 틈새를. 그리고 다시 그 호흡의 틈새를 비집고 유천하는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바람을 타고 달려나간다.

흐름을 끊어내며 검을 쏘아낸다.

만상의 눈이 바라본 세계 속에서 일념은 다시 칠흑의 선율로 타올라 빗방울을 흘려보냈고, 검명과 기파. 그리고 다시 불씨가 터져 나오는 격전의 가운데서 유천하는 더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공세의 호흡이 만들어내는 흐름.

그리고 그사이에 새겨진 틈새.

푸슉-! 동시에 다시 피가 튀어나온다.

검을 그러쥔 팔에 길게 자상이 그어지며 피가 새어 나왔고, 위타극의 다리가 베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멈칫하지 않았다. 의념으로 육체와 검을 붙잡고 그대로 흐름을 끊어냈고, 다시 칼을 타고 흘러내리는 불씨 속에 극점이 튕겨 나간다.

내려치는 검. 받아치는 도. 휘감는 검극, 튕겨내는 도신. 때론 강하게, 다시 부드럽게, 그리고 빠르게. 순식간에 교차하는 교전 속에서 그들의 몰골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수한 무의 격돌!

푸슉-! 그렇기에 귓가가 베여나가는 순간에도 유천하는 점점 무아에 빠져들었다.

분명 위타극은 강했다. 그보다도 더욱. 어쩌면 이 순간이 그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애초에 무인의 삶은 투쟁이었다. 무인이 어찌 생로만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결국 무극에 도달하기 위해선 생사의 간극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줄 알아야 했다. 망설이지 말고, 주저하지 않고, 베어야 한다면 모든 것을 베어내야 했다.

이제껏 유천하가 지나쳐온 싸움의 대부분은 그에게 불리한 순간들이었고, 유천하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여도, 약한 상대여도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뎌 길을 찾아냈을 뿐. 그의 눈은 생로만을 바라보지 않기에 다시 생로를 찾아낼 수 있었고, 다시 생사의 간극으로 나아갈 줄 알았기에 그는 이곳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생각했다.

끼긱- 거리는 검신의 비명을 들으며 이 순간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에게 부족한 건 단 한 수의 우위.

당연히 그건 극복 못할 차이는 아니었다. 경지가 그보다 조금 더 높다 하여, 단순히 경지의 수준만으로 모든 게 결정지어진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무는 그렇게 편리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하린도, 피를 흘리며 바닥에 몸을 뉘인채로도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남궁설아도, 그녀들은 위험하긴 했지만 버텨냈다.

원작보다도 한참 이른 시간에, 부족한 인원과 역량 속에서도 그녀들은 버텨냈다.

그리고.

그녀들의 성장은 조급함 속에 피어난 꽃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급함에 쫒기며 달려갔기에 이하린은 죽을뻔했고, 남궁설아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의 성장은 조급함을 버리고 여유를 찾았을 때 다시 피어났을 뿐.

그렇다면 자신도 다시 여유를 채워야 할까.

카가가각-!!

유천하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급함 속에 여유를 버렸고, 평온을 버렸다. 언젠가는 다시 주워야 할 때도 오겠지만 지금 와서 땅을 기웃거려도 부질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건 이 상황에 맞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게 이 순간 유천하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고, 그렇기에 유천하는 아까부터 들어온 번잡함 마음속에 다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비워내자.

그것이 유천하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머릿속에 들고 있는 번잡함을.

계속해서 요동치는 심란함을.

여유를 버리고, 평온을 버렸듯이.

의무를 버리고, 다시 조급함을 버리고.

생生을 버리고, 사死를 버리고.

그렇게.

유천하는 오온五蘊을 직시하였고, 유천하의 세계는 점점 무아無我의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

무武란 무엇인가.

유천하의 머릿속에 그 물음이 새겨진다.

그리고 다시 유천하는 오온을 되새겼다.

생멸변화의 모든 것이 다변하고, 생사가 입멸하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니. 만상의 본질이 공허하기에 다시- 이 순간의 고뇌도, 번뇌도, 모두 마음속 표상에 불과할 뿐.

어찌 보면 이제까지 유천하가 걸어온 삶은 비워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었다.

전생의 가치관을 비워냈고, 마음의 번민을 비워냈고,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검을 든 자의 선택이었기에 유천하는 의무를 버려 마율령을 베어냈고, 다시 이하린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

그렇게 주어진 의무에서 벗어나고 있었기에 이 순간 유천하는 다시 한 번 더 생각을 버릴 수 있었다.

세상을 규정하는 건 스스로의 마음이었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고, 다시 인지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 마음이 갖는 힘.

그렇게 세상의 모든 건 인지 속에 비롯되었고, 현실을 규정하는 건 다시 ‘나’였으니. 다시 세계를 인지하려면 ‘나’를 정립해야 했다.

그는 무의식 속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를 관조하고, 세상을 지각하여, 만물의 표상을 깨닫는다. 그것이 오온의 세계였고, 다시 유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번뇌를 깨닫고 의무를 벗어던진 유천하는 이 순간 혼란스럽다는 생각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볼 수 있는 세계는 무한했기에 다시,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는 유한했을 뿐이니까.

그렇기에.

유천하는 비워내는 것을 선택했다.

자신의 본질을 명확히 직시할 수 있도록. 이 순간 흐드러지듯 검을 피워내고 있는 그의 정신은 더 깊은 내면으로 접어들었다.

만상의 법칙은 공空

만상의 구성은 허虛

세상의 모든 것은 스스로의 생각과 한계 또한 마음이 만들어낸 제약이었고, 가능과 불가능 또한 인지 속에 비롯됐으니 다시 공허했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모든 것을 비워냈다.

감정도, 생각도, 편견도, 감각도, 의식도.

그렇기에 무無

이 순간 유천하의 감각은 무의식과 본능의 너머- 진정한 무아無我로 접어들었고, 그는 경계의 바깥에서 다시 공허를 체감했다. 소교주의 의무에서 벗어났기에 ‘나’를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잊었기에 공허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다시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그 물음 속에. 모든 걸 비운 세계 속에서 유천하는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었다. 검을 휘두른다. 이제까지의 삶 동안 무수히 반복해왔던 동작을 유천하는 펼쳐냈다.

그것이 그의 본질이었기에.

무아에서 본질이 피어났다.

무아無我속에 피어난 무의武意

그렇기에 다시.

무武

“······아.”

우웅- 그 순간 유천하는 깨달았다.

위타극을 향해 검을 뻗어낸 유천하의 검은 반 토막이 나 있었지만,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스스로 뜻하는 바를 무로서 관철하니 무인이었고, 그렇기에 이곳은 다시 그의 무림이었다.

그는 언제나 무림에 서 있었고, 이제껏 그래 왔듯이 다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본질을 그렇게 인지했다.

그렇기에 다시- 유식唯識이었다.

콰아아앙-!!

맞부딪힌 검격속에 유천하의 검이 신음을 내뱉었다. 키긱- 점점 짙어지는 균열. 그어지는 빗금. 이미 한번 파열된 검이었기에 유천하의 검은 먼저 한계에 다다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비워냈으면 다시 채워내면 될 뿐이었고,

버렸으면 다시 얻어내면 될 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유천하는 이 순간 마음속 번민이 씻겨져 나가는 걸 체감했다.

그와 동시에.

콰직-! 마침내 검은 온전히 깨져나가며 허공에 흩날렸고, 비산하는 파편 사이를 가르고 적색의 강기가 다가왔다.

하지만 유천하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저 무의식 속에 그대로 흘러가듯 위타극의 도에 손을 갖다 댔다. 툭- 흑색의 별빛에 둘러싸인 그의 손에서 피가 터져 나왔지만, 그는 그대로 적색의 망념을 흘려냈다.

마치- 바람에 따라 꽃이 흩날리듯이.

그렇게 위타극의 도는 그대로, 유천하의 맨손에 맞닿아 허공 속으로 흘러갔을 뿐이었다.

“천하씨!”

그리고 그 순간 울려 퍼진 목소리.

걱정과 염려가 담긴, 유천하를 향해 건네지고 있는 마음. 유천하는 무의식 속에 멍해진 시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검을 내던진 이하린의 모습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 표정이 엿보였다.

“······.”

무수한 감정이 담겨있는 그녀의 눈.

그리고 허공 속에 날아오는 이하린의 검.

피에 젖어있는 검. 그러면서도 백색의 검.

그 순간 유천하의 정신은 깨어났다.

무아에 접어들었던 그의 정신은 현실로 돌아왔고, 세계의 경계를 무시했던 그의 움직임은 다시 현실에 접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위타극의 검격을 흘려낸 유천하는 그대로 춤을 추듯 회전하며 등 뒤로 날아온 백색의 검을 받아낸다.

툭- 얼마나 강하게 검을 부여잡고 있었으면 아직까지 손잡이에 온기가 남아있을까.

그렇기에 유천하는 검병을 그러쥐었다.

백색의 검신 위로 솟구치는 흑색의 별빛.

그렇게 흑백이 어우러진 검신은 찬란한 빛을 품고 일념을 내세웠다.

그리고 다시- 이 순간.

쿠구구구구구구-!!!

유천하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였다.

풀려나오는 일곱 갈래의 매듭.

유천하가 쌓아온 모든 것의 총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비웠을 때 도달한 곳.

유식 唯識

심상에서 풀려나오는 일곱 갈래의 매듭 속에 유천하의 검은 세계를 가로질렀고, 칠흑이 그려낸 궤적은 그대로 그림자를 도려내기 위해 흘러갔다.

시간을 가르고 쏘아진 흑백의 궤적.

그리고 그림자에 새겨진 기다란 선.

“······!”

서로의 신형이 교차했고, 그 순간.

-----------------------------!

서걱-!! 위타극의 몸 위로 그어진 참격과 함께 위타극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갔다. 위타극의 가슴이 갈라짐과 동시에 그림자가 터져 나왔고, 그건 이제까지처럼 타천자라고 무시하기엔 너무나 큰 피해였을 뿐.

“······.”

“······.”

그렇기에 갑작스레 변화한 유천하의 움직임에 눈을 부릅뜬 위타극은 그대로 멍하니 얼어붙었다. 하지만 유천하는 이제까지처럼 묵묵히 위타극을 향해 검을 뻗어냈을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그 순간- 위타극의 입에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 유천하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그리고 그 변화가 이 순간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에. 위타극은 그렇게 입을 열었고, 그 목소리엔 무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군. 벽에 올랐더냐.”

그리고 유천하는 위타극의 목소리를 인지함과 동시에 그제서야 깨달았다. 멍해졌다 다시 또렷해진 세상 속에서 스스로의 상태를 관조한 결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천마신공 7성에 도달했음을.

그의 내면속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던 심마는 어느새 가라앉아있었고, 심마에서 피어난 일곱 갈래의 매듭은 다시 그의 내면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위타극이 다시 한 번 말을 건네왔다. 그리고 말에는 다시 감탄과 허망한 감정이 담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도대체 너는···?”

저 물음에 뭐라 답해야 할까.

유천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도 유천하. 각성자 유천하. 순례자 유천하. 환생자 유천하. 소교주 유천하. 그를 지칭할 수 있는 말은 지금도 무수히 많았으니까.

허나- 이 순간 그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유천하.”

오로지 그 한마디면 충분했을 뿐.

“······.”

“······.”

그렇게 담담히 되돌아온 답변 속에 다시 그들은 서로의 검을 뻗어냈다. 부러진 망념과 새롭게 벼려진 무의는 무의 항연을 펼쳐 보였고, 그것은 마치 춤과도 같았으니.

그곳은 새롭게 피어난 무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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