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의미 (2)
등 뒤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함께 들려온 작은 목소리.
“······아··· 아··· 괘, 괜찮··· 아요···?”
그렇게- 겁먹은 목소리로, 기어가는 목소리로 건네진 아이의 말은 불씨가 되어 남궁설아의 육신에 다시 불을 지펴주었다.
그렇기에 이 순간.
남궁설아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등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공략을 막 끝마친 몸으로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고 모르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앞에서 위타극과 마주했던 모습이. 결국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자신들을 지켜냈다 미소 지어 보이던 그 모습이 갑작스레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 결과를 예상하고 계셨을까?
남궁설아는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위타극의 기세는 직접 검을 맞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고, 그렇게 강했던 아버지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분명 웃는 얼굴로 사지를 향해 걸어나갔다.
그건 만용이었을까? 당장의 신념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건 결국 스스로의 역량을 과신한 결과였던 걸까? 무의미한 행동이었을까···?
“······아니야.”
그녀의 입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혼미해져 가던 정신이 점점 또렷하게 날이 서기 시작한다. 떨려오던 손이 점점 멎어간다. 터질 것 같던 호흡도 점점 가라앉았고 남궁설아는 마음속의 번잡함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지킬 수 없는 신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 아니, 절대 아니었다. 스스로 옳다 믿고, 지켜내려 노력하기에 신념이었다.
미숙한 게··· 그게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두근- 멈춰버린 호흡 속에서도, 떨려오는 육신을 부여잡는 순간에도, 심장의 맥동만큼은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힘차게. 그리고 굳은 기세로.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받아들였다.
자신이 미숙하다는 사실을.
분명 남궁설아는 이렇게 위타극의 검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가까워질 정도로 나약했다. 마음이 갈팡질팡할 정도로 미숙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선 계속해서 비틀림이 생겨났고, 그건 그녀의 검을 흔들리게 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검을 들어 올렸다.
“······.”
카가가각-!!
이게 무의미한 일이 될지언정, 스스로의 신념을 감당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짓이 될지언정. 자신의 뒤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가 존재했다.
애초에 그녀가 무공을 익힌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였고, 얼마 안 가 그 마음 위로 복수를 위한 다짐이 덧씌워졌을지언정 그녀는 단 한 번도 그 마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 순간 혼미해졌던 정신을 부여잡고 앞으로 걸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죽을지언정 다른 이를 지켜내기 위한 용기는. 무의미할지언정 분명 빛을 머금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좋아했고, 존경했으며. 다시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 생각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끅··· 끄윽···”
“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이런 상황일지언정, 아니 이런 상황이기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표정 위로 떠오른 미소는 분명 따스함을 머금고 있었다.
그렇기에 걱정인지, 안도인지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다시금 전장으로 걸어나가는 그녀의 의념은 다시 한 번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순간.
그녀의 검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야 제대로 검을 들어 올리는군.”
“···!”
온몸에서 피를 흘러가면서도 걸어 나오는 남궁설아의 모습에 이하린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는 위타극을 향해 다시 검을 쏟아냈다. 남궁설아 또한 이하린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카가가각-!!
그렇게 이하린은 온 힘을 다해 위타극의 검격을 막아섰다. 남궁설아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이- 유천하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유천하가 다시 랭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남궁설아는 망설임 없이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 나왔고, 그런 그녀의 검위론 군청색의 별빛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별무리 또한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저 아름답게, 그리고 선명한 색채로.
그렇게 피어나고 있었을 뿐이었다.
“······.”
망설임을 부여잡고 힘을 준 손바닥. 손목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굳어졌고, 명정하게 연마된 정신은 하나의 일념을 피워냈다. 한 걸음 앞으로. 호흡을 멈추고 한걸음.
남궁설아는 이 순간 단 한 걸음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두려움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렇게.
탁- 남궁설아의 발이 지면을 때린 순간.
공간을 뛰어넘은 그녀의 몸이 한순간에 그곳에 도달했고, 그녀의 검은 망설임 없이 두려움을 향해 뻗어 나갔다.
창궁무애검법 蒼穹無碍劍法
제왕검형 帝王劍形
패도를 품고 그어진 섬광!
콰아아앙-!! 남궁설아의 검격이 도달함과 동시에 위타극의 몸이 일렁거렸고, 뿜어져 나온 그림자의 파동에 이하린이 튕겨 나감과 동시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과가가가-!!
그렇게 한순간에 터져 나온 파동마저 베어낸 채 뻗어 나간 남궁설아의 검은 그대로 위타극의 도와 맞닿아 흉포한 기파를 터트리며 피처럼 붉은 불씨를 토해냈고, 원래라면 위타극의 검격을 정면으로 받아내지도 못했던 남궁설아의 검은 이 순간. 아주 올곧은 기세로 버텨내고 있었다.
그렇게 이 순간.
카가각-!! 더 이상 그녀의 검은 흔들리지 않았고, 그에 위타극은 이채가 어린 눈으로 다시금 입을 열어왔을 따름이었다.
“두려움을 극복하였더냐.”
“······.”
떨려오는 팔을 바라보면서, 뜨거워지는 체온을 느끼면서 남궁설아는 생각했다.
왜 검법의 이름이 창궁무애인가.
왜 검은 제왕의 이름을 자처했는가.
뜬금없지만 그녀는 이제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푸른 하늘에 거리낌은 없나니. 창천의 마음을 품은 제왕의 검은 망설임 없이 제 뜻을 펼쳐 보이기 위해 존재했다.
남궁의 검은 그렇게 쌓아올린 업이었다.
“다시 물어보지. 왜 아이를 구했느냐.”
“···그게 내가 무공을 배운 이유니까!”
그 순간 가속된 그녀의 신형이 다시금 검을 뻗어냈다. 뻗어지는 푸른 궤적.
검이 맞부딪히는걸 두려워하지 않고,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을 걱정하지 않고, 그저 망설임 없이 그어지는 극한의 패격. 대기가 떨려온다. 지금 이 순간 남궁설아가 생각하고 있는 건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눈앞의 마인을 베어내는 것!
“그게 이유더냐.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그 이유는 무엇이더냐.”
다시금 검격이 교차한다.
“사람을 구하는데 이유는 필요 없어.”
“······그자와 똑같은 대답이군.”
콰아앙-!! 한순간 떨어진 서로의 칼날은 순식간에 검신을 마주했고, 붉고 푸른 빛이 산란하듯 퍼져나갔다.
반동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오로지 상대의 검신을 꺾어내기 위해 내질러진 혼신의 일격은 강철이 내지르는 거친 비명과 함께 기의 파도를 터트렸다.
그 순간 끼긱- 위타극의 도에서 선명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위타극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는 듯 여전히 가라앉은 잿빛의 눈동자로 남궁설아을 들여다보았을 따름.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남궁이여. 너희에게 무武는 무엇을 의미하더냐. 그리고 다시 너희에게 무림이란 무엇이었느냐.”
위타극을 베어내기 위해 전신의 힘을 그러모은 상태. 혼미해진 정신 속에서 부들거리는 팔을 부여잡은 채 검신을 내리누르고 있던 남궁설아는 그 순간 명정하게 벼려진 눈빛으로 위타극의 얼굴을 마주했다.
아무런 감정조차 없이 풍화된 눈빛.
세월 속에 갉아 먹혀 많은 걸 잃어버린듯한 동공이었지만 그녀는 그 속에 담겨있는 일말의 미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위타극의 지난 행적과 이제껏 계속해서 건네왔던 질문을 떠올려보았다.
그녀가 겪어온 모든 일은 저 미련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녀는 올곧은 눈빛으로. 위타극의 시선을 마주하였다.
그리고 되새겨보았다.
저 옛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던 선조들의 이야기를. 세계를 위해 심연에 뛰어들었던 현조의 이야기를. 그리고 다시 몰락해가는 와중에도 공략자가 되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던 사람들을.
그리고 다시- 그 날 위타극을 막아섰던 아버지를 떠올려보았다.
남궁- 그건 그녀에게 있어서 정말이지 바보 같으면서도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다. 이중적인 마음이었지만 가문의 영화를 잃어가면서도 의협의 가치를 내세웠던 그들이 자랑스러웠고, 다시 사지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의협의 가치를 내세웠던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두 글자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위타극을 죽이기 위해 수련해 온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녀의 지난 17년은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남궁설아의 머릿속으로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기에.
이 순간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아진 정신 속에 입을 열 수 있었다.
“스스로 옳다 믿는 일을 행하기에 의義.”
“······.”
“다시 의를 숭상하기에 협俠.”
또렷하고, 굳건한 목소리로.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자신의 신념을 믿고 검을 들어 올리니 그렇기에 바로 의협義俠이고, 그걸 지닌바 무武로서 증명하니 다시 무인武人이며···!”
그녀는 지난 세월 동안 그녀를 억눌렀던 두려움을 마주하였다.
“그런 자들이 살아 숨 쉬었기에 무림이다.”
전신에서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싸늘하게 식어가는 감각 속에서도 남궁설아의 목소리는 그 어느 순간보다 당당하게 토해져 나왔고, 그런 남궁설아의 대답에 위타극은 순간 힘을 빼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튕겨 나갔던 이하린이 몸을 추스르며 다시 검을 들어 올리고, 비틀거리는 남궁설아가 굳은 결의 속에 다시 검을 들어 올렸을 때.
그렇게.
흔들리던 검이 그 꽃을 피워냈을 때.
“······그럼 너의 무림을 증명해 보거라.”
위타극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다시 한 번 그녀를 향해 검을 쏘아냈을 뿐이었다.
***
벼락처럼 쏘아지는 검극이 교차하며,
큉-! 청백의 섬광이 얽혀 들어간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로지르고 흩날리는 기의 파랑은 그 잔재만으로도 수많은 빛을 산란시켰고,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강철의 화음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카가가각-!!
쾅-!!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질 때면 다시 두 개의 검명이 중첩되며, 하나의 목소리를 이루어가면서 쌓여나가는 화음.
쏘아지는 검격. 받아치는 검격.
검과 도과 맞부딪히며 쏟아내는 붉은 불씨 속에 틈새를 가르고 백색 빛의 섬광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교차하는 세 개의 검극!
콰아앙-!!
서로의 공세가 맞부딪힘으로써 대기가 떨려온다. 남궁설아의 패검이 위타극의 도를 쪼갤 듯이 쏘아지면, 다시 부족한 힘을 보충해주기 위해 이하린의 검신이 그 뒤를 밀어낸다.
교차한 세 개의 검신이 토해내는 파도 속에 별빛이 흩날렸고, 그 순간 다시 그들의 신형은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육체는 멈추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기를 가다듬는다.
심장의 맥동. 흘러가는 피. 육체를 타고 내달리는 내력을 더 빠르게. 빠르게. 관성을 붙여라. 남궁설아는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였다. 한순간이라도 멈추는 순간 한계에 다다른 몸은 움직일 수 없게 될 터. 반동이 오기 전에 최대한 지금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니까··· 한순간 한순간 온 힘을 다해!
푸슉-! 어깻죽지가 베여나감과 동시에 남궁설아의 몸이 그 칼을 스치고 나아갔고, 그 순간 이하린의 검은 다시 위타극을 향해 뻗어 나갔다. 한순간의 판단이 죽음으로 이어질지언정 그녀들은 망설임 없이 생사의 틈 속으로 발자국을 내디뎠다.
호흡마저 멈춰버린 세계. 청백의 신념이 화음을 자아내며 빗속을 질주하는 순간.
시간마저 느려지고 느려진 압축된 세계 속에서 남궁설아는 그곳을 가로질렀다. 한 보를 내디디고, 다시 한 보를 내디딘다.
검극이 교차하는 순간.
가속이 아닌 감속.
이하린의 검을 뒷받침하며 다시 서로의 검이 교차해 위타극의 공세를 받아낸다.
카가각-!! 교차한 검신이 저마다 비명을 내지를 때. 한계까지 압축된 근육 속에 혈류가 몰려든다. 쏟아져나오는 내력.
그 수용점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
쾅-! 다시금 그녀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손등에서 마력을 토해낸 이하린이 그대로 위타극의 도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다시 남궁설아는 위타극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퀴이이잉-!
쾅-!! 이하린의 검신이 튕겨 나감과 동시에 위타극의 얼굴에 새겨지는 작은 실선. 뺨을 가로지른 3cm의 자상은 미약했지만, 그건 분명 교전이 시작되고 위타극이 처음으로 허용한 일격이었다.
“······.”
그렇기에 위타극은 그림자가 새어 나오는 제 뺨을 바라본 뒤 다시 남궁설아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제는 이하린까지 함께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들의 정신은 무아에 접어들고 있었을 뿐.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격전 속에 두 사람의 정신은 점점 고양되어가는 중이었다. 한 번도 합을 맞춰본 적 없는 두 사람의 공세는 기이한 엇박자 속에 하나의 화음을 이뤄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일인 걸까. 그건 두 사람 모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아의 세계 속에 발자국을 새긴 그들의 정신은 그저. 오로지 눈앞의 마인- 위타극을 베어내기 위해서만 온몸을 꿈틀거리고 있었을 따름.
위타극의 공격이 다가온다.
그걸 막아서기 위해 교차하는 두 개의 검.
쾅-!! 변속제어의 특성은 순식간에 감속에 접어들며 위타극의 흐름을 뒤틀었고, 그렇게 공세의 맥이 끊어진 사이 다시 이하린의 검이 위타극의 검을 얽매였다. 그 순간 다시 자유롭게 가속된 남궁설아의 검은 쾌검이었고, 다시 패검이었으며, 다시 둔검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변화하는 검형속에 남궁설아는 끊임없이 검격을 쏟아냈고, 검의 반려를 통해 본능적으로 남궁설아와 합을 맞추고 있던 이하린 또한 무초의 세계 속에서 만검의 갈래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흩날리는 빗줄기. 산란하는 검기.
그 속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친다.
“······.”
“······.”
호흡조차 할 시간이 없었던 세계였기에 그녀들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지만 얽혀들어 가는 직감 속에 그녀들은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개의 실타래가 짜아올리는 흐름.
모든 게 느려진 심적권청의 세계 속에서 이하린과 남궁설아는 이 순간 육체에서 느껴지는 고통마저 잊어버린 채 황홀한 감각 속에 휩싸였다. 의념이 거세게 타올랐다. 촘촘히 짜인 바람과 염원이 얽히고 얽혀 만들어낸 영혼의 실타래는 그렇게 찬란한 별빛 속에 녹아들었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청백의 섬광!
시간마저 베어버리고 공간을 뛰어넘은 검격은 점점 복잡한 선율을 자아내며 위타극의 몸에 선을 그려냈다.
콰아아앙-!!
터져 나오는 기의 파랑 속에 그녀들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그 순간 잠시나마 현실로 돌아온 남궁설아는 터질듯한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폐는 찢어질 것 같았고, 자신들로부터 흘러나온 피는 코가 아려올 정도로 짙은 혈향을 풍기며 주변에 내려앉아 있었다.
당장에라도 쓰러져 기절할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남궁설아는 두렵지 않았다.
이 순간 그녀가 두려워해야 할 건 자신의 죽음이 아니었다. 한순간의 망설임 끝에 스스로의 신념과 마음을 증명해내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 아이를, 어린 날의 자신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
이 순간 그녀가 두려워해야 할 건 오직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딘다.
무리하게 좁혀들어간 간극만큼 순식간에 쏘아진 검격에 남궁설아의 귓불이 찢겨 나갔지만, 머리가 잘려나간 건 피했기에 남궁설아는 다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 위타극의 호흡을 바라보았다.
마인이 자아내는 공세의 흐름을.
자신과 이하린이 만들어내고 있는 간극을.
죽음과 맞바꿔서라도 녀석을 죽일 수 있는 한순간의 틈새를!
그 순간- 남궁설아는 들을 수 있었다.
위타극의 도가 내지르고 있는 비명을.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마인의 검은 이미 낡을 대로 낡아 있었고, 계속되는 강격속에 그 검은 점점 그 잔해를 흩날리고 있었다.
이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고수란 무엇인가.
침식역류가 일어났던 그 날- 유천하가 보여주던 검무. 마치 춤을 추듯 이어졌던 그의 검로는 분명 그녀가 바라는 이상향에 맞닿아 있었다.
맹렬하지만 고요하게. 그는 흔들리지 않는 검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을 자아냈다.
단 한 수. 한 수의 앞일지언정 현재의 너머를 내다볼 수 있는 자. 상대의 호흡을, 흐름을, 움직임을, 기세를, 그 모든 걸 읽고 한 치 앞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자. 그것이 바로 고수였고,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남궁설아 또한 그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발견한 틈을 찌르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 몸을 내력을 통해 억지로 붙잡는다. 더 빠르게. 더 확실하게 검을 뻗어내기 위해 이를 악문 그녀의 입에선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이룰 수 있게, 그리고 어린 날의 기억처럼 무력함 속에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있게. 그녀는 그런 세월 속에 검을 휘둘러왔고, 그렇기에 이 순간 남궁설아의 검은 과거를 향해 뻗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기절한 줄 알았던 집행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미약한 목소리.
“······주언. 동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마법진을 그려낼 힘도 없었기에 새어 나온 말 한마디. 하지만 미약할지언정 또렷하게 짜올려진 언령은 순식간에 깨져나갔지만, 분명 잠시나마 위타극의 몸을 휘감았다.
카각-!
그리고 그 잠깐의 순간.
미미한 언령이 붙잡은 찰나의 찰나.
그 틈새에서 남궁설아의 검은 확실하게 쏘아져 나갔다. 빗방울마저 느려진 초속의 틈새를 내달리는 남궁설아의 검에선 군청색의 별무리가 피어올랐다.
흔들리지 않는 검.
다시 흔들리지 않는 마음.
지난 세월 동안 수없이 흔들리며 싹을 피워왔던 그녀의 세월은, 이 순간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한줄기 신념을 피워냈다.
그렇게.
서걱-!
아름답고, 그리고 강인한 마음은. 이 순간- 푸른 마음을 품고 위타극의 검을 베어내며 그림자를 가로질렀다.
***
추적 거리는 빗속에서 한 신형이 비틀거린다. 온몸에서 피를 흘려가며, 뻗어 나간 검을 부여잡은 채로. 다시 피를 토하며 그 몸은 서서히 지면을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다급히 쓰러지는 남궁설아의 앞을 가로막은 이하린은 눈앞의 마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남궁설아의 검.
그 검에 가슴을 베인 위타극은 그녀를 마무리할 생각이 없다는 듯. 그저 멍하니. 부러진 자신의 도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랬다. 남궁설아의 검은 목표에 닿았다. 자신이 베이는 것조차 감수하며 그려낸 패도의 궤적은 위타극의 도를 부수고, 그대로 그의 가슴마저 뚫어냈다.
하지만- 심장에 닿지 못했을 뿐.
“······조금만. 제발 조금만 버텨주세요.”
“······.”
“몇 분만. 몇 분 만이라도 더···!”
위타극을 경계하면서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이하린의 목소리에 남궁설아는 신기한 기분 속에 휩싸여가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시도는 실패했다. 아니 성공했지만 위타극을 죽이진 못했고, 오히려 자신이 죽음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궁설아는 알 수 없는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이유를 깨달았다.
비록 복수를 하진 못했을지언정 자신은 그의 검을 베어냈다. 유천하와 수련할 땐 검이 깨질까 봐 두려워했던 마음이 그 순간만큼은 들지 않았고, 그렇게 자신은 최선의 일격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후회하지 않았다.
싸움이 시작되고 몇 분이 지났을까.
이제 10분, 아니 8분이 되었을까?
집행자들이 버티라 했던 이유도, 이하린이 버티라 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지만 남궁설아는 왠지 모르게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녀는 위타극의 검을 베어냈고, 이후 찾아올 지원이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집행자들이 그리 강조했던 만큼 최소 위타극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자가 올 터. 그렇다면 검이 반 토막 난 이상 위타극은 온전한 제 실력을 선보이진 못할 테니 이 다음에 위타극과 싸울 자는 분명 더 수월하게 위타극을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비록 그 대가가 제 죽음일지언정 그녀는 위타극을 막아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피를 흘리는 몸으로, 죽어가던 아버지가 미소를 지어보였던 이유를 그녀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을 지켜냈다는 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지켜냈다는 게 만족스러워 웃으셨던 거일 테지.
그렇기에 이 순간 흐릿해진 시야로 위타극을 바라보며,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제서야 위타극의 입이 열렸다.
“······부질없군.”
죽어가는 몸으로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던 탓일까. 아니면 그 모습에서 다시 과거의 향수를 느꼈던 탓일까. 이제껏 아무런 감흥 없이 서 있던 위타극의 얼굴 위로 미미한 불쾌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만족스러운 거냐.”
“······.”
“무엇이 의협이란 말이더냐.”
“······.”
“무엇이 무인이란 말이더냐. 너는 네가 말한 걸 증명하지 못했다. 너도, 이 녀석도,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내 손에 죽을 터인데 너는 왜 웃고 있는 거지?”
남궁설아는 위타극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미소가 그를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다시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기에. 그녀는 혼미해진 정신속에서도 위타극의 시선을 마주했을 뿐이었다.
위타극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남궁연월도, 너의 아비도 모두 어리석었다. 너 또한 어리석다. 의가 무엇이 중요한 건가. 신념이 중요했더냐. 더 이상 무림은 존재하지 않지. 몰락한 세계에서도 그 가치가 그리도 중요했더냐···?”
“······.”
“나는 너희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너희의 무림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남궁연월은 왜 나를 살렸던 것이냐. 그의 무림은 무엇이었기에 그는 심연에 뛰어들었던 거지? 너희는 왜 다른 이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냐. 도대체 왜···?”
위타극이 말하는 이야기는 어떤 세월을 품고 있는 걸까. 남궁연월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 그녀의 눈에는. 위타극의 모습이 과거에 사로잡힌 망념처럼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대답했다.
“······그게··· 남궁의 검이니까.”
작게, 빗소리에 파묻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고, 그 순간- 다시 위타극이 멈춰 섰다.
“······.”
“······.”
그렇게 남궁설아를 바라보는 위타극의 눈빛은 잠시지만 흔들렸고, 그는 이내 눈을 감았다 뜨고는 다시 풍화된 눈으로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살고 싶다 애원해 보거라.”
“······죽어도··· 그럴 일은······ 없어.”
“그런가.”
그 대답과 동시에 위타극의 몸에서 다시 흉악한 살의가 터져 나왔고, 그에 잠자코 위타극을 경계하고 있던 이하린의 검에서도 다시금 의념이 피어올랐다.
“······그자가 내 목숨을 살려 보낸 순간부터 모든 건 정해진 결과였지. 너희가 죽은 것도, 너의 아비가 죽은 것도, 이 순간 네가 죽는 것도 모두 그의 업보. 남궁이여. 너희는 남궁연월의 의협을 감당하지 못했다.”
“······.”
“무림이 사라진 뒤에도 너희는 어리석었을 뿐이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으로 사람을 살리려 했다는 것 부터가 너희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것이지. 그렇기에 처음부터 부질없는 소리였다.”
-너희의 무림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다름없으니까.
담담하게 흘러나온 위타극의 말은 남궁설아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었지만, 왠지 남궁설아는 그 말에서 위타극의 흔들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이 길어진 것부터가 그의 생각이 흔들렸다는 걸 의미하기에 남궁설아는 위타극이 무언가에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타극은 반 토막 난 도를 들어 올렸고, 그로부턴 흉포한 살의가 새어 나왔다.
그렇게 사지가 찢겨나갈 듯한 살기 속에 이하린은 아득- 이를 악물며 검을 들어 올렸고, 이내 위타극의 손이 다시 흐릿해졌다.
압도적인 살의를 품고, 핏빛의 망념을 반 토막 난 도에 덧씌운 채. 뻗어져 나오는 위타극의 손. 그리고. 그렇게 그렇게 남궁설아가 담담히 제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순간.
바로 그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그리고 이어서.
콰아아앙-!!
코앞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기파에 남궁설아는 감겨가던 눈을 들어 올렸고, 그러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치렁거리는 머리를 질끈 묶은 채, 흑색의 별빛 속에 휩싸여 위타극을 향해 검을 내지른 자.
“······!”
“······아.”
마인의 앞을 막아선 뒷모습.
남궁설아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살릴지 죽일지 결정하는 건 검을 든 자의 마음이지.”
그리고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하물며 무를 추구하고, 행함으로써 증명하니 무림이 어찌 없다는 말이냐.”
“······너는?”
하지만 그 목소리 속엔 불쾌하단 감정이 실려있었고, 그 목소리의 주인. 유천하는 피를 흘리며 휘청거리는 이하린과 남궁설아의 모습을 한번 흘깃하고는 그대로 위타극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무란 업이다. 하늘이 아닌 사람이 쌓아올린 업. 누가 무림을 부정할 수 있을까. 누가 무림을 죽일 수 있을까.”
난데없이 나타난 그. 그리고 그의 입에서 갑작스레 흘러나오는 말. 하지만 그 말에 담겨있는 내용에 남궁설아는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유천하의 검을 알고 있기에.
자신이 유천하를 통해 검을 깨달았기에.
그녀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그의 등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렇다면 증명해 보거라.”
유천하로부터 피어나는 기세에 위타극은 다시 무감속에 가라앉아 그를 바라보았고, 유천하 또한 아무 말 없이 위타극을 응시하였다. 단 한 번의 격돌. 그 속에서 서로의 실력을 느낄 수 있었기에.
끊임없이 쏟아내리던 비가 멈춰 섰고, 한순간에 멈춰버린 세계 속에서 그들의 검.
반 토막 난 검과 도는 그렇게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콰가가가가-!!
바닥이 갈라짐과 동시에 막대한 기의 파도가 사방을 향해 터져 나왔고. 이 순간 그런 유천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궁설아의 머릿속엔 왠지 모르게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올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