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의 검 (2)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진 적막한 암야.
폐허가 된 도시의 건물 사이로 들어온 하오란은 그 즉시 실내의 분위기를 파악하곤 조용히 숨을 죽였다. 어둠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풍경은 그의 이해를 넘어선 광경이었기에 하오란은 이제껏 살아온 삶의 가치관을 그대로 준수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말.
“······.”
하지만 하오란이 그러거나 말거나 유천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는 중이었고, 얼마 안 가 찐득한 기름과 검붉은 물기는 신기할 정도로 깔끔하게 검에서 떨어져 나갔다.
스르릉- 유천하는 그렇게 검을 갈무리하고 난 뒤에야 하오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둠을 타고 전해지는 귀기 서린 눈빛.
눈을 마주치는 순간 소름이 돋았을 만큼 살벌한 시선이었기에 하오란은 순간적으로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그의 폐부로 발을 들인 차가운 공기는 하오란의 기분을 더 섬뜩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들은 타천의 마인이 아니더군.”
“죄, 죄송합니다···! 그, 다, 다른 정보랑 조금 섞여 있었나 봅니다. 자, 잘못···!”
“상관없다. 침식된 이들은 아니었어도 마인은 맞았으니.”
그 순간, 때마침 구름이 걷혔다.
창문으로 기어들어 온 달빛은 실내로 스며들어 내부를 비추었고, 그러자 하오란의 눈에도 어렴풋했던 내부의 광경이 똑똑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건 정말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산산이 해체된 채 사방에 널려있는 수많은 시체와 한쪽에 물건처럼 쌓여있는 조금 작은 무언가들. 어렴풋이 윤곽으로만 엿보이던 것들은 하나같이 모두 잘려나간 마인들의 일부였고, 주변을 가득 메우던 혈향은 바닥을 뒤덮고 찐득하게 눌어붙어 있던 검은 핏물들로부터 올라오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인세의 지옥과도 같은 풍경.
하지만 눈앞의 광경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고, 그렇기에 그 모습을 눈으로 보면서도 하오란은 믿기지 않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이 짧은 시간 동안 뒷세계의 클랜을 단신으로 몰살시켰다고?
도대체 저건 뭐하는 괴물이란 말인가?!
하오란은 메스꺼운 기분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저도 모르게 얼어붙은 목구멍 너머로 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그러자 그 순간 유천하가 질문을 건네왔다.
“그것보다 이것들의 이름을 아느냐?”
그 말에 화들짝 놀란 하오란은 재빨리 입술을 달싹거리며 머리를 굴려 보았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쓰러져있는 시체들의 복장, 구석에 물건처럼 방치되어있는 이들. 그리고 바닥에 낭자하게 도배돼있는 혈흔의 색채까지.
사실 혈마공이라는 점 하나로도 충분히 답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반대로 너무나도 흔히 퍼져나간 게 혈마공이었던 만큼 하오란은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시체를 다루는 방식, 연공에 사용된 아이들의 연령대. 그 모든 걸 유심히 바라보던 하오란은 이내 확실히 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바닥을 뒹굴고 있는 마인의 팔 한쪽.
그곳에 새겨진 문양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적, 적원회의 분파입니다···!”
“···적원회? 유명한 이들이더냐.”
“아··· 그······ 미묘합니다.”
“미묘하다?”
그 대답에 하오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그 순간 하오란의 시야로 유천하의 눈빛이 맞닿았다.
빛 한점 맺혀있지 않은 어두운 눈동자.
그 속에 담긴 서늘한 살의는 바라만 보아도 영혼이 베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기에 하오란의 입은 빠르게 움직였을 뿐이었다.
“요, 요즘에는 몸을 좀 사리는 추세이지만 저, 적원회 자체는 유명하긴 합니다. 일단 혈마공의 본산지라 봐도 될 정도이고······”
“혈마공의 본산지?”
“아··· 옙! 정확히 말하자면 본산지는 마도련이긴 하지만 그 명맥이 혈마공으로나마 그대로 이어진 게 적원회라 사실상 대부분은 적원회가 본산지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혈마공을 배포한 건 그··· 위타극이지만 그자는 가끔 모습을 드러낼 뿐이지 어디 소속된 자는 아니니 말입니다.”
그 순간 유천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익숙한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타천자 위타극을 이야기 하는 건가.”
“예? 아, 예 맞습니다. 그 위타극입니다.”
참고로 유천하가 마인 사냥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2주. 침식역류 이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회랑 밖으로 나와 마인 사냥을 시도하는 중이었지만 성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애초에 한번 침식에 물든 마인은 인류를 증오했고, 그런 마인이 다른 이들과 꾸준히 교류를 이어나간다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지 않겠는가? 그런 만큼 하오란이 용병 일을 하며 얻었던 정보들은 유효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쓸모가 없어진 정보들도 많았을 따름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순간 유천하는 갑작스레 들려온 그 이름에 조금 신기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인과의 흐름을 느낀 탓이었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
“···예?”
“마도련, 그리고 위타극에 대해서.”
“······.”
그리고 그런 유천하의 반응에 하오란은 순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유천하가 보였던 행적을 생각해보면 저 말이 마치 위타극을 사냥하겠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유천하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위타극이라니?
세계침식 이전부터 살아온 그 괴물은 저 지고한 승천자가 아닌 이상 죽일 수 있다 확신할 수 없는 괴물이지 않은가?
하지만 하오란에게 있어선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도 또 하나의 괴물처럼 느껴졌기에 그는 자신의 속내를 숨긴 채 그저 아는 바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실······ 저도 자세한 정보는 잘 모릅니다. 마도련이 몰락한 것도 벌써 한 세기 전의 일이고, 사실상 위타극이 아니었으면 언급될 일도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적원회가 명맥을 이었다는 것도 그저 위타극의 손이 닿았던 것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위타극이 적원회를 비호하나?”
“······아. 그건 또 아닙니다. 적원회도 분명 마공을 익힌 이들이긴 하지만, 위타극은 타천의 마인입니다. 그럴 이유가 없지요. 그자는 별도의 거처 없이 심연의 영역 속을 돌아다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분명 유천하도 알고 있던 내용.
하지만 원작에서는 마도련이라는 과거도, 적원회라는 단체도, 그리고 혈마공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고, 그나마 어렴풋이 묘사되었던 마인들의 생태도 17년의 세월을 넘어서까지 기억될 만큼 중요한 내용은 그다지 없었을 뿐이었다.
현재 유천하가 기억하고 있는 점은 그저- 위타극은 그저 남궁설아와 관련된 메인 에피소드의 악역이었고, 그가 세계침식 이전부터 존재해온 무인이었다는 것.
그는 오직 그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순간 새롭게 들려온 마도련이라는 요소에 대해서도, 위타극의 과거에 대해서도 유천하는 큰 흥미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타천자라면 그게 당연한 일이겠지. 그런데 어째서 마도련과 적원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군.”
“···아! 그, 그건 간단합니다! 마도련의 부련주였던 위타극이 뒷세계에서 빌어먹던 잡배들에게 혈마공의 비급을 뿌렸고, 그걸 기반으로 성장한 게 적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쪽 업계에 혈마공을 쓰는 녀석들이 넘쳐나는 것도 다 그때 뿌린 비급이 하도 많아서 그렇습니다.”
“흥미롭군. 그자가 왜 그런 거지?”
“그, 그건 저도 다른 마인들도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위타극은 살겁을 일으킬 때마다 혈마공을 익힌 마인들을 찾아가 그 무공의 대가로 협조를 요구하는 편이고, 그걸 제일 많이 겪은 게 현재로썬 적원회일 따름입니다.”
“협조를 원한다고 너희들이 그런 일에 응해줄 이유는 없을 텐데.”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하오란의 말이 이어졌다.
“협조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인다는데 누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하이랭커까지 살해했다는 괴물을 상대로 말입니다. 그래서 위타극을 마주한 순간 그의 손에 몰살당하든, 아니면 사건을 수습하러 온 공략자한테 몰살당하든 조직이 반 토막이 나는 것 정도는 각오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까요.”
“······.”
“심지어 그 적원회조차도 위타극과 한번 얽힐 때마다 매번 꼬리 자르기를 하면서 이름을 바꾸는 편입니다.”
유천하는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조금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원작에서 위타극이 도시를 습격할 때 왜 그렇게 잔챙이 마인들을 많이 묘사하나 싶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
당연히 무공과 관련된 요소에는 약했던 이하린이 그런 배경설정을 했으리는 없었기에 원작의 그녀 또한 그 상황에 무척이나 당황했고, 그건 묘사를 통해 독자인 그에게도 똑똑히 전달되었던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유천하가 잠시 원작을 되짚고 있는 사이에도 하오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그렇다 보니 위타극은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편입니다. 공략자의 손에 죽은 마인보다 위타극의 손에 죽은 마인이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오죽하면 그런 별호로 불리겠습니까?”
“그런 별호?”
그 말에 유천하의 반문이 돌아왔고, 하오란은 그에 조심스레 입을 달싹거렸다.
“예. 사실 이제는 잊혀진 이름이지만 저희 사이에선 아직도 전해지는 말이 있습니다. 두려워서 그렇게 부르는건지, 조롱을 담아 그렇게 부르는건지는 사람마다 조금 다르지만요.”
그 말을 이어나가면서 하오란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마인으로서 먹고 살게 된 이후 들었던 여러 소문. 그리고 그걸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을.
“오래전- 이제는 사라진 무림의 시절. 사람들은 그자를 살검악귀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침식이 시작된 후 행방불명되었던 그가 다시 남궁세가를 몰살시키며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날 이후 강호의 인물들은 그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분명 1세기 가까이 지나간 과거의 일.
하지만 뒷세계에 살아가는 마인들에게는 현재까지도 와 닿는 이야기였기에 전해져오는 이름.
비록 과거의 기록 속에만 남아있는 행적일 뿐이지만 그건 분명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함부로 입에 올릴 만큼 가벼운 이름은 아니었던 만큼 하오란은 누가 들을세라 아주 조심스레 그 단어를 입에 담았을 뿐이었다.
“무림을 살해한 자. 살무제 위타극이라고 말입니다.”
***
내가 게이트를 넘어 회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이었다. 행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목적지 근처의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발로 뛰어다녔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잿빛탑 공략이나 침식토벌이라면 모를까, 마인 사냥의 흔적이 드러나면 이래저래 복잡해질 게 뻔했으니 말이다. 괜히 조금 편해지고자 불쾌한 일을 야기하고 싶진 않았다.
하물며 이곳에는 분명 마인만을 사냥하기 위한 특무기관이 존재했으니 아직 변수를 늘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따름.
자칫하단 일이 꼬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나저라 무림을 살해했다라··· 광오하군.’
나는 아까 하오란으로부터 들었던 정보들을 떠올려보았다. 분명 원작에서도 위타극을 토벌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긴긴 했지만, 그래도 주연들과 랭커의 손에 토벌된 일회용으로 소모된 악역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제의 위상은 더 대단했던 모양.
원래부터 쉽지 않은 적이라 가정하고 있긴 했지만 내 생각보다도 더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파악했던 등천자들의 수준을 생각해보자면 하오란으로부터 들은 내용의 절반만 사실이라 할지라도, 절대 쉽게 볼 만한 상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이랭커를 죽였지만 승천자와의 조우에선 패퇴했다 했으니, 원작의 기억과 방금 들은 정보를 조합해보면 위타극은 아마 절정의 초극- 초절정의 벽을 마주하고 있는 무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리고 그 말은 즉.
‘나보다는 강하다는 건가······’
지금의 나보다는 확실히 강하다는 말.
물론 실전의 싸움은 단순히 경지의 높낮이만으로 구분되는 게 아니었고, 나 또한 절정의 극의를 넘어가는 무인. 그런 만큼 자신이 없냐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하지만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면 안 된다.
내가 목표하는 방향성이 확실한 만큼 굳이 불안전한 도박을 감행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위타극은 언젠가는 꼭 처리해야 할 마인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했다.
‘최소 7성. 유식에 도달해야겠지.’
당장 전력을 상승시킬 방법은 분명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더 무공을 가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지의 격차를 편법으로 따라잡으려 해봤자 결국 후회하게 될 게 뻔했으니 말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게이트 관문소에서 나오는 순간, 마침 반대편에서도 익숙한 모습의 사람이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무엇을 하다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흙먼지에 뒤덮여 회색빛이 되어버린 백색의 머리카락과 짜증이 가득 서린 붉은 눈동자.
그곳에서 진시우가 걸어 나왔다.
우리는 서로 건너편의 출구에서 나오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시선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
“······.”
그렇게 잠시 시선이 교차했고, 볼일이 없었던 만큼 나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진시우의 입이 열리며 짜증 서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시간에 어딜 갔다 오는 거지?”
저번에도 그러더니 참 거슬리는 말투였다. 원래의 성격이 저렇다는 걸 알았기에 그러려니 할 뿐이었지만,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건 녀석이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는 점.
분명 진시우는 아무한테나 말을 걸만큼 친화력이 좋은 녀석이 아니었고, 이런저런 비밀이 많은 만큼 오히려 최소한의 사회성마저 다소 떨어지는 녀석이었다.
즉 다른 이에게 먼저 시답잖은 이야기를 걸어올 녀석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이 시점의 진시우가 나한테 관심을 가질 일이 뭐가 있을까- 나는 그것을 잠시 되짚어보았다만 딱히 떠오르는 점은 없었다. 그저 타천자 토벌건의 관심이 아직 남아있는 게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해볼 따름.
그렇기에 나는 간단히 대꾸했다.
“너한테 말해줄 이유는 없지.”
“······.”
내 대답에 진시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고, 나 또한 그 시선을 담담히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 짜증 섞인 눈빛 속에는 약간의 의아함이 담겨있었기에 나 또한 덩달아 조금 의구심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잠시 시선을 마주하던 진시우는 이내 조용히 입을 달싹거렸다.
“너······”
“······.”
“······아니. 됐다.”
그리고는 볼 일이 끝났다는 듯 몸을 돌린 그는 화이트라인 기숙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태도에 다소 어이없는 기분이 들긴 했다만 딱히 신경 쓸만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나도 이내 관심을 끊어냈다.
‘진시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솔직히 말해서 진시우도 분명 원작의 주요인물이긴 했지만 내가 신경을 써야 할 만큼 나약한 녀석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은 멘탈 상태가 안 좋을 뿐이지, 필요한 순간이 되면 알아서 제구실을 할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원작의 이하린도 진시우를 위해 딱히 특별한 행동을 하진 않았었다.
그저 멸화급 탑의 역류가 터져 나왔을 때 진시우의 머리를 후려쳐 트라우마에서 정신을 차리게 해줬을 뿐. 만약에 그런 일이 필요하다면 나도 녀석의 머리 정돈 때려줄 수 있었다. 그게 뭐가 어렵겠는가.
그런데 순간 이하린을 떠올렸더니 자연스레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났다.
과연 이하린이 쓴 ‘원작’의 내용과 내가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의 내용. 그리고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무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만큼 이하린이 쓴 설정 속엔 분명 과거의 이야기인 마도련이나 위타극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적혀있지 않았을 테고, 위타극은 그저 남궁설아를 위한 악역으로서 대략적인 설정만 짜여 있었을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내가 본 원작 속에서도 마도련이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었다.
물론 이곳은 더 이상 소설 속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였기에 아리엘의 성격도 그렇고, 하오란이나 적원회같은 뒷세계의 조직도 그렇고 이 세상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에는 각각의 개연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개연성이 거슬렸다.
‘마도련. 무림. 위타극.’
뭐··· 그간 알아본 바에 따르면 무림이라 한들 이곳이 중원 무림과 동일한 곳은 아니었다. 지나온 역사가 달랐고, 중요한 기점들이 달랐으니 말이다. 사실 무림이라 해도 이야기 속에서는 상당히 흔히 쓰이는 소재에 불과했다. 실제로 무림에서 살아왔던 나로서는 조금 얼떨떨할 뿐이지만···
그렇기에 나는 조금 궁금했다.
이하린은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원작에서의 그녀는 설정 밖의 이야기에 당황하면서도 항상 무언가를 아는듯한 느낌으로 묘사되었기에 그녀의 속내가 조금 궁금해지는 밤이었다.
물론 그걸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나는 천천히 접근해볼 생각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아직 충분히 많았고, 내가 이곳에 온 지도 이제야 겨우 한 달 반이 지나갔을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숙소로 복귀하고 있자니, 그 순간 어두운 밤을 가로지르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즉시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그러자 허공 속에서 상대와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 밤은 무슨 날이라도 되는 걸까?
이 시간에 주연인물을 연달아 만나다니 조금 신기한 기분.
“······.”
“······.”
그렇게 나와 시선을 마주친 그녀는 이내 밤길을 내달리던 몸을 멈춰 세우더니 내 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밤의 색채마저 빨아들일 정도로 짙은 군청색의 머리카락은 은은한 달빛 속에 조금씩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