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천의 구도자 (3)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영약이라니. 이게 무슨 상황인걸까.
“······정말이지 이건.”
영약- 그건 각종 영물이 벼려낸 생명의 응집체부터 시작해, 기운을 내포한 다양한 식물 등. 자연의 조화가 만들어낸 고밀도의 기운 밀집체를 일컫는 말.
그런만큼 영약은 무척이나 희소한 귀물이었다. 일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한번이라도 접하면 다행이었고, 대부분은 소문으로만 어렴풋이 들어본 그런 물건.
심지어 나조차도, 천마신교 소교주라는 신분으로도 제대로 된 영약은 이제껏 단 한 번만 접해봤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귀해 보이는군요.”
심지어 내 손 위에서 영롱한 빛깔을 늘어트리는 이 물건은 이전에 보았던 영약보다도 더 많은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걸 취한다 해서 저 기운의 반절이라도 얻어낸다면 다행이겠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수준.
이게 무슨 대환단이라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가만히 물건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하린에게서 감탄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흡수할 수 있게 정제했는데도 이 정도 크기라면······ 티르유씨 이거 설마?”
“응. 황혼급 탑에서 나온 근원석이야.”
“······황혼급!!”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아니 내 생각만큼 대단한 물건인가 보다.
“하린이 너도 이건 예상 못했나 보네.”
“저는 여명급정도를 말씀드린 건데···?!”
“직접 보고 판단한 결과야.”
“아···!”
경악스러운 표정이 이하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비록 등급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이하린의 반응만으로도 내 손에 들린 물건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귀한 물건인가 보군. 하긴 제대로 흡수할 수만 있다면 내공이 최소 5할은 더 늘어날 수준이니······.’
물론 제대로 흡수하려면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해도 이건 엄청난 일이었다.
부단한 연공이 아닌, 한 번의 섭취만으로 그러한 효과를 볼 수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영약이라 불리는 것이고,
또한 흔히 접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놀란 부분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실 인형설삼이니 공청석유니 하는 전설의 영약을 들고 온다 한들 거기서 흡수할 수 있는 내력이 얼마나 되겠는가?
백년설삼을 먹는다 한들 100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100년의 세월 동안 자연스레 쌓인 기운이 다른 밀집체보다 더 풍부한 것일 뿐.
그 속에 담겨있는 기운이 대략 50년 정도라 치면, 그걸 흡수한다 한들 제대로 체화되는 양은 10년도 안 될 것이다.
애초에 그건 당연한 이야기.
무언가에 고여들고 모여들어 내재된 기운은 단순히 섭취한다고 해서 본인의 것으로 체화되는게 아니었다.
내공이란 게 그리 간단히 늘어나는 것이었다면 사람을 생으로 잡아먹어서라도 내공을 늘리려는 마인들이 넘쳐났을 것이다. 애초에 백년삼은 귀할지 몰라도 사람 정도는 흔하게 널려있지 않은가?
실제로 그런 마공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공을 늘리는 건 그렇게 사람을 잡아먹는 마인 이라 한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물과 생물이 쌓아온 수많은 세월이 깃든 기운. 그것은 섭취하더라도 꾸준한 연공을 통해 거르고, 거르고, 다시 걸러내야 그 기운의 십 분지 일이라도 몸에 체화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정순함이군.’
섭취하는 순간 그대로 체화될 만큼 순수하게 정제된 이 영약은 실로 말도 안 되는 귀물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가 전도유망한 인재로 보일 거란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내겐 좋은 일이었다만 물건의 가치가 절대 낮아 보이지 않는 만큼, 함부로 받기에는 조심스러운 상황.
세상 모든 일에는 인과가 존재했고, 내 역량을 벗어나는 영역을 준비 없이 거머쥐려 한다면 그건 언젠간 큰 탈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그게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소교주로서 생활하며 얻게 된 깨달음이었기에 나는 순수히 의문을 내비쳤다.
“······저야 좋기는 한데 파격적이군요. 괜찮은 겁니까? 계약금이라기에는 조금 과한 것 같습니다.”
“과하지. 하지만 투자가치는 충분해.”
도대체 뭘 보고 저런 판단을 내린 걸까.
“판단의 근거가 무엇인가요?”
“근거?”
“예. 단순히 순례자의 자격만으로는 이런 대우가 안 나왔을 테니까요.”
원작의 이하린도, 지금의 이하린도 나와 같은 루트를 거쳐서 왔지만 이런 대우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등 뒤에 미어져 있는 검, 활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후원금. 그리고 공략에 필요한 이런저런 지원. 그게 그녀가 계약으로 얻어낸 전부 아니었을까?
이건 분명히 내게만 주어진 특혜였다.
내 의문에 티르유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유는 복합적이야.”
“복합적이라면?”
“우선 계약을 자처한 태도. 접경지에서 보였던 행적. 순례자의 자격. 업륜이라는 실적. 마음가짐. 그리고 하린이의 요청까지 모두 고려해서 결정한 결과야.”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이하린을 쳐다보았고, 이하린은 내 눈빛에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을 뿐이었다.
공항에서부터 뭐가 그리 바쁜가 했더니 설마 부탁하고 있던 게 이거였던 걸까? 이 상황에는 그녀의 기여도도 꽤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이하린의 행동에 대한 당혹감이 고마움과 같이 피어올랐을 때, 티르유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선 황색탑에서 보여줬다는 검강.”
“예.”
“기관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검강이라면 천중무련 소속의 유망주라 할지라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힘이야. 하물며 쏘아 보낼 정도의 숙련도라면 말할 것도 없지.”
분명 검강의 경지는 결코 낮지 않았다.
사실 기억 속 묘사를 떠올려보면 올해 입학하는 주연인물 중에서도 그 기준을 충족시킬 만한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말이다.
특히나 단순히 기운을 욱여넣어 만들어낸 검강이 아니라, 의념으로 빚어낸 검강은 제대로 된 고수를 가르는 기준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업륜.”
“업륜.”
“비록 일 획일지라도 그건 만상세계가 칭송할 행적을 보여줬다는 증거니까.”
그런 관점에서 이것도 얼추 납득되었다.
수호자급의 기준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만, 황색탑에서 싸웠던 마수를 기준으로 생각해본다면 현시점의 생도들로선 확실히 버거운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실력만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진 않았을테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이 내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게다가 넌 먼저 계약을 요청했잖아.”
“그것도 중요한 겁니까?”
“당연하지. 우리가 누구인지 알면서 그런 제안을 했다는건 적어도 헌터를 지망하는 녀석은 아니라는 소리잖아? 그건 정말 중요한 요소야.”
“그렇군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가장 중요한 건?
“침식역류가 터졌던 그날, 너는 기절하는 순간까지 검을 휘둘렀어. 그런 몸 상태로도 말이야.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아.”
“그것만으로도 널 후원할 가치는 충분해.”
그제야 나는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첫날의 분투가 꽤 긍정적인 인상을 남긴 모양.
하긴 그런 곳에서 그런 몰골로 튀어나왔으면 마수랑 싸우다 그렇게 됐다 생각하겠지. 누가 사람과 싸우다 왔다 생각하겠는가. 실력과 성장 가능성도 높이 산 모양이지만, 전반적으로 보였던 태도 자체가 꽤 유효했던 모양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진중해진 티르유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느껴질진 몰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다른 게 아니야.”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 목소리엔 방금전 보다도 조금 더 무게가 실려있었다.
“세상에 필요한 건 마석이나 캐러 다니는 헌터가 아니라, 침식을 향해 나아가는 공략자니까.”
“······.”
“물러서느냐 나아가느냐. 그 양자택일의 선택지에서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자. 우리는 그런 자를 원했고, 내 눈에는 너는 그런 사람처럼 보였어. 아니야?”
“······아.”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중원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어느 어린 날의 기억이.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거라.’
그와 동시에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짧게 스쳐 지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검혈마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망설임 없이 투쟁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 흔치 않아.”
“······.”
“이득과 안위를 위해 뒷걸음질 치는 자는 결국 언젠가는 침식에 먹히기 마련이야. 그렇다고 한계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멈춰 선다면 언젠가는 일개 사냥꾼으로 전락해버리고 말겠지.”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기억.
나는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유천하 너한테 투자하는 거야. 넌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싸우는 걸 선택한 사람이니까.”
“······.”
“너는 그걸 너의 행동으로, 그리고 순례자의 자격을 쟁취해옴으로서 증명한거야. 순례자의 자격 또한 단순히 강하다해서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
“······.”
“넌 공략자의 자질이 있어. 알겠어?”
“······예. 이해했습니다.”
나는 이내 기억을 떨쳐냈다.
지나간 과거에 매몰되는건 좋지 않은 일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내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앞으로 나아가거라.’
방향성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강해질 것이고, 다시 돌아갈 것이다.
오로지 한가지 목적을 위해서.
다른 건 중요치 않았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도 검을 휘두를 것이다. 티르유가, 그리고 등천의 구도자가 내게 기대하는 게 마수를 토벌하고 탑을 공략하는 것뿐이라면 얼마든지 응해주마.
그걸 통해 나는 성장할 테니까.
“그렇다면 망설임 없이 받겠습니다.”
“그래. 너는 충분히 자격을 보여줬어.”
그렇게 귓가로 들어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저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누르며-
“망설이지 말고 강해져. 그리고 침식에 뛰어들어. 네가 돌려줄 대가는 오로지 그것뿐이니까.”
나는 다시 한 번 목표를 되새겼다.
***
계약이 체결된 후, 우리는 중앙 건물을 나와 등천의 구도자에 마련되어 있는 기숙시설로 향했다.
등천회랑의 입학식까지는 아직 2주가 좀 넘는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그동안 지낼 곳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이곳에는 기숙시설이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티르유나 이하린은 내게 호텔도 알아봐 줄 수 있다 했지만 기숙시설에는 수련시설도 구비되어있다는 말에 나는 그냥 이곳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왕 시간이 난 김에 내상도 치료하고, 이것도 섭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손에 들려있는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에 바로 흡수해야겠어.’
에테리얼 크리스탈의 기운은 무척 정순하였기에, 이 정도면 혼자 기운을 운용해도 제대로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저 기운을 모두 받아들이는 건 힘들겠지만 정신을 집중해 연공을 한다면··· 적어도 지금 내력의 6할 정도는 더 늘어나지 않을까?
업륜까지 고려한다면 사실상 이 세계에 오고 나서 거의 2배 가까이 내력이 상승하게 되는 셈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
‘그래도 나쁘지 않아.’
물론 업륜이나 영약 같은걸 앞으로도 쉽게 얻을 수는 없겠지만, 짧은 시간 만에 이렇게 내력이 상승시킬 수 있다는 건 정말 고무적인 성과였다.
내게 가장 절실했던 건 시간이었고, 무인에게 세월은 곧 쌓아온 내공의 양과 직결됐다. 그렇기에 나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에테리얼 크리스탈의 기운을 느끼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얼굴 위로 기분이 드러났던 걸까.
이하린이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좋으세요?”
“······예. 그렇네요.”
이하린이 건넨 말에 조금 민망해지긴 했으나 입은 솔직하게 움직였다. 이걸 얻게 된 이유에는 그녀의 공도 없진 않았으니 말이다.
“덕분에 좋은 걸 얻었네요. 감사드립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의견만 제시했던 건데요 뭘!”
“의견만···? 회의하는 동안 네가 보낸 메시지만 스무 건이 넘었는데?”
“저, 저는 모르는 이야기에요······.”
알고보니 에테리얼 크리스탈 지급 건을 맨 처음 이야기한 사람은 이하린이었다 한다.
원래는 추천서와 기본적인 지원만 예정되어 있었던 걸, 이하린의 요청으로 인해 회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지급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저번의 도움도 그렇고, 언젠가는 반드시 갚아드리겠습니다.”
“······민망하네요.”
정말 부끄러운 모양인지 이하린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건 그렇고··· 왜 나한테 이걸 줬는지는 정말 모르겠네.’
솔직히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호의를 보내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번 일로 이하린이 내게 호의를 보내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이 정도는 양보해도 상관없을 만큼 숨겨놓은 기연이 많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미래를 위해 미리 주변 전력을 강화하려는 생각이었을까?
둘 다 그럴듯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확히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진 않았으니 상관없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얼마 안 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
“데스크에 말하면 배정된 방으로 안내해줄 거야.”
“예.”
“필요한 게 있으면 데스크 직원에게 요청해. 어지간하면 들어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참고로 나는 등천회랑 입학 전까지 혼자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어차피 티르유는 바로 공략을 위해 접경지역으로 떠난다 하고, 이하린 또한 남은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다 했다.
지금 그녀들은 그저 초행인 나를 배려해 숙소까지 배웅해주고 있는것 뿐이었다.
“기본적인 등록이 끝나면 스마트 워치도 하나 보내줄게. 내일 오후쯤이면 직원이 찾아갈 거야.”
“아. 감사합니다.”
“······저도 틈틈이 연락드릴게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입학 전까지 침식공략을 몇 번 더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육체를 가다듬는게 우선이었기에 이곳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게 중요했으니 말이다.
“입학식 전에는 돌아올게요···!”
“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렇게 약간의 대화를 나눈 뒤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등 뒤에서 티르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천하.”
“···?”
뒤를 돌아보자 티르유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지만 왠지 아까와도 같은 진지한 기색이 느껴졌다.
“헤어지기 전에 한 번만 더 물어볼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이하린도 티르유의 행동이 의아했는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침식과 마주했을 때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어? 사냥꾼이 아닌 한 명의 공략자로서 말이야.”
“예.”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와 상관없이, 나 스스로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시간은 언제나 소중했고, 나는 그 시간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더 이상 시간과 노력이 부족해 후회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으니까.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닦아서 그 힘에 걸맞는 의무를 짊어질 수 있겠어? 의무 없는 권리가 아닌, 권리에 걸맞은 의무를.”
“예.”
사실 권리나 의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세계의 돈도, 명성도 내게는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오직 힘.
그걸 위해선 어차피 나는 침식과 맞서 싸워야 했다. 가호도, 업륜도 오직 그걸 통해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
“······.”
그렇게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고, 내 시선을 마주한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돼.”
망설임 없던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티르유가 조금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만으로도 차가웠던 표정이 한순간에 변하는 느낌이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내가 필요로 하는 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그리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건 오직 그것뿐이니까.”
“···예.”
“스스로의 의무를 짊어지고 나아갈 용기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해서 만상세계는 우리에게 이런 힘을 부여한 거야.”
조금은 처연하게 느껴지는 미소.
그 표정은 이타를 위해 이기를 내려놓은 자가 지어 보일 수 있는 노고의 흔적이었고,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었던 나는 그녀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여인은 인류를 위해 많은 걸 내려놓고 침식과 맞서 싸운 이였으니까.
“유천하 너는 등천의 업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겠지?”
등천자라면 눈앞의 그녀와 같은 경지.
단순히 경지의 문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잠시 고민했고.
이내 대답했다.
“예. 충분히요.”
“그렇다면 환영할게.”
내 대답에 상냥히 미소 짓는 그녀.
티르유가 내게 손등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자연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것은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툭-
그녀의 손등 위로, 내 손등이 맞닿는다.
따뜻한 온기가 부드럽게 교차했다.
“···알고 있었네?”
교차한 서로의 손등.
나는 이 동작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잘 부탁합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
서로의 등을 맡기겠다는 하나의 약속.
그림자를 향해 나아가는 공략자들의 인사.
“침식에 맞서는 이상, 등천의 구도자는 언제나 너와 함께 나아갈 테니까.”
그렇게 인상 깊었던 소설의 글귀는 이 순간 현실이 되어있었고, 나는 이 순간 완벽히 이 세계에 녹아든 기분이었다.
천마신교 소교주 유천하가 아닌,
환생자 유천하가 아닌,
소설 속에 들어온 각성자 유천하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