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뽑아서 나를 죽여라. 내 역린이 있던 자리가 어딘지 너도 알고 있잖아. 그게 저 녀석의 소원이었다는 것도.”
마침내 그는 땅에 꽂은 검을 도로 빼내 해시트에게 쥐여 주기에 이르렀다. 억지로 오가는 손길에 묻어 있던 핏물이 서로에게 옮겨 붙었다. 이레이는 금세 더러워진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황제. 믿지 않겠지만 나도 당신만큼 괴롭다. 친구를 잃은 슬픔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괴로워해야 하는 삶,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를 버려야 하는 기분을 너는 아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이 싫어 직접 내다 버린 감정을 다시 찾고 있다고 했다.
해시트는 울컥 조여 드는 목청을 억지로 풀어 헤쳤다.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떼어 냈다. 갑자기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이레이 너는……, 너는 왜 베누스의 왕이 되었지?”
그녀는 이레이가 왕이 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넌 왜 왕이 되었지?”
“기억 안 나는데.”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나.”
“그것도 몰라.”
“……아는 게 뭐야.”
“글쎄.”
아는 게 뭔지도 모른다면서 떨리는 입술을 겹쳐 오던 남자라는 사실만을 알았다. 그의 입술은 차가웠지만, 다음 날 아침 비추는 일출은 그녀를 녹일 듯 따스하게 내리쬈다.
불현듯 이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잊어버린 기억이 이제야 떠올랐다는 양 천천히 말했다.
왜 왕이 되고 싶었더라.
“그러고 보니…… 왕이 되어 보면 널 이해할 수 있을까 늘 궁금했지.”
여전히 너무나 단조로워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끝내 해시트는 두 눈을 감아야 했다. 잔뜩 고여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주변에는 아직도 장사 지내야 할 시체가 천지인데, 이 세상에 죄지은 자는 오직 그녀뿐인 것만 같았다.
“이레이.”
단 한 걸음도 돌이키지 못할 후회 속에서 해시트는 생각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왜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녀를 사랑한 잘못으로 그 남자가 감정을 잃어버린 책임을 도저히 질 수 없었다.
“네 역린은…….”
그녀는 힘겹게 대답했다.
“내 눈물에…… 녹아 사라졌다.”
제 앞에 목을 내놓고 무릎 꿇은 그를 보면서도 끝내 검을 들 수 없었다. 잠시 후, 몰려온 제국군들이 이레이를 둘러싸고 창을 겨눌 때까지.
*
만약 신이 있다면, 아니, 만약 해시트 미케나 티플리스가 신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이 순간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신이시여. 제발 시간을 되돌려 주소서.’
그리고 만약 그녀가 믿는 신이 그녀를 특별히 여겨 보살폈다면, 아니, 만약 지나가던 낯선 신이었을지라도 그녀를 몹시 긍휼하게 여겨 주었더라면, 분명 그 신은 해시트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을 것이다.
모래시계가 똑바로 선 채 모래를 아래 칸에서 위 칸으로 흘려보내고, 파도의 거품이 해변이 아닌 푸르른 수평선을 향해 달려 나가고, 달그림자가 희미해지며 다시 노을이 오고, 그렇게, 또다시 수백 수천 수만 수억 번을 반복하여 그녀를 가장 행복했던 한때로 되돌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란 얼마나 얄팍한 단어인가.
과연 해시트의 삶에 그런 것이 존재했단 말인가?
묻는다면, 답은 그렇다였다. 분명히 존재했다였다. 가장 행복했던 한때, 그인즉 가장 슬프지 않았던 어느 날.
그날, 너는 부서지는 햇빛에 눈을 뜨게 된 그 순간부터 피식 웃음이 흘러나올 것이다.
“어제는 꿈자리가 유난히 사납더군.”
“그렇습니까? 어쨌든 할 일이 많으니 그만 일어나시지요.”
“망극할 놈. 넌 주군이 악몽을 꿨다는데 걱정하는 척도 안 하나?”
그리고 잠깐 뜸을 들여 그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라피난.”
너는 이상하게도 그 석 자가 혀에 아릿하다고 생각한다. 사무치는 것은 고통인가 애달픔인가.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다. 잠깐 가슴을 움켜쥔다. 하지만 네 앞의 남자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눈빛과 말투로 커튼을 걷어 낼 뿐이다.
“그래서 무슨 꿈을 꾸셨는지요, 황태자 전하.”
촤륵, 이미 반쯤 걷혀 있던 커튼이 완전히 사라지며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온다. 잠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찔하다. 너는 손등으로 눈가를 가린다. 그러면 간밤에 꾼 꿈이 기억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갑자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너는 본능적으로, 빛에 가려진 남자의 형태를 좇는다. 말한다.
“비밀이야.”
“……지금 저와 장난치시는 겁니까?”
“설마. 네가 받아 줄 위인이냐?”
가엾어라. 너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모른다.
하지만 글쎄, 만약 알았다 하더라도 그대로 꿈속에 살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곳엔 네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므로.
곧 또 다른 남자가 창문 밖에서 얼굴을 내민다. 그는 커다란 몸을 날렵하게 뛰어 사뿐히 네 침실을 내딛는다.
“일어났어? 해스.”
늘 그렇듯 껄렁하고 시큰둥한 목소리. 그러나 너의 귀엔 전에 없이 다정하게 들린다. 뜀박질 결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손가락. 보다가 너는 홀린 듯이 몸을 일으킨다. 빨간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이마가 웬일로 답답하지 않고 단정하게만 보인다. 너는 무심코 그 위에 손을 뻗어, 말한다.
“이레이. 넌 머리 기르지 마라.”
“어? 갑자기 왜?”
“이마가 못생겼어.”
툭 내뱉었지만 사실은 간절하다. 그러나 그는 네 속내를 모른 채 투덜거릴 것이다.
“저 생일이라고 말을 막 하는군. 딱 오늘까지만 봐줄게.”
“봐…… 뭐? 네놈은 꼭 내 탄신일에 죽어 보고 싶지?”
“별로. 아, 그냥 생일이 아니라 성인식이었다면 다시 생각해 봤겠지만…….”
“라피난. 이 자식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려.”
그렇다. 오늘은 너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다.
“말조심하도록, 이레이 린. 그리고 전하를 알현하려거든 제대로 된 절차를 밟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나.”
네가 일생 동안 곁에 두고 함께 대의를 추구하기로 맹세한 저 남자는, 조금 있다가 선물이랍시고 사나운 군마를 대령할 것이다. 너는 어째서인지 마구간에 가기 전부터 그걸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딱한 너는 이게 꿈이라는 사실만은 모른다, 여전히.
“오늘은 네가 이해해 줘, 근위대장 나리. 다른 녀석들보다 빨리 선물을 전해 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 남자가 소중하게 꺼낸 모포 더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벌써 알고 있다.
“봐라, 해스. 귀엽지?”
낑낑대며 울고 있는 작은 짐승,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막여우. 아직 눈도 뜨기 전이다. 너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짐승의 사랑스러운 자태를 구경하다가, 불시 정신을 차리곤 남자의 머리통을 후려갈긴다.
“이, 이 미친놈아! 이런 갓난쟁이를 납치해 오면 어쩌자는 거야! 자식 잃어버린 어미 생각은 안 해?!”
“윽! 기껏 고생해서 잡아 왔더니 고맙단 말도 없어?”
“고생……? 혹시 안 죽이고 살려서 데려온 게 고생이었다는 거냐?”
퍽. 한 대를 더 친다. 이번엔 팔뚝이다. 남자의 단단한 피부와 손바닥이 맞부딪히며 마찰열이 일자, 너는 갑자기 서러워져서 계속 팔을 휘두르고 만다. 아프다.
“이 천하의 나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명확한 이유를 모르는 채로, 치미는 화를 견디지 못해 철썩, 철썩, 쉬지 않고 그를 때린다.
“속 좁은 자식, 치사한 놈. 금방 후회할 거면서……! 이 나쁜 놈아, 나중에 곤란해지면 결국 무섭다고 도망칠 거지!”
어느 순간부턴 목울대가 꽉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입술이 부르르 떨린다. 그런데도 이게 꿈이라는 걸 모른다.
그때 따뜻한 손길이 네 어깨를 감싼다.
“전하.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라피난……?”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혹시 어제 꾼 꿈 때문이십니까?”
“……라피난…….”
너는 죽을힘을 다해 울음을 참는다. 평생토록 부정해 온 신의 존재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사실, 너는 이게 꿈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너는 이게 꿈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너는 눈을 감는다.
‘신이시여. 우매한 제가 뒤늦게 당신을 믿고 따르건대.’
어깨에 닿은 남자의 손길이 너무나 따뜻하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같은 순간 너에게 다가오는 남자의 눈빛은 끊임없이 요동친다. 감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미안해. 남겨진 이들이 슬퍼할 거라곤 미처 생각 못 했어.”
“…….”
너는 제자리에 웅크린다. 말없이, 그제야 네가 이미 한참 전부터 울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너를 향한 걱정스러운 목소리들이 쏟아진다.
“라피난, 혹시 해스에게 여우 털 알레르기 같은 거 있어?”
“그런 병력은……. 하지만 의원을 불러오겠다.”
“뭐야.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여기 멀쩡한 의사가 있는데.”
격의 없이 주고받는 두 남자의 대화가 너의 가슴을 백 번쯤 찢고 천 번쯤 못질을 한다. 꽝꽝, 뼈마디마다 사라지지 않을 각인이요, 낙인이 새겨진다.
‘신이시여. 부디 제게……,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미련한 해시트여, 너는 아직까지도 부정하고만 싶다.
그러나 너는 거짓말을 못 한다. 비로소 인정하기로 결심한다. 입술을 깨물며 두 남자를 올려다본다. 말한다.
“아니, 아니야.”
사실 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이건 거짓말이잖아.”
쩌적! 깊이 박힌 못 하나가 너의 심장을 갈라 둑을 터뜨린다. 왈칵 범람한 추억이 환상을 닦아 낸다. 돌이킨 자리에는 진실밖에, 너의 사람이라곤 없다. 가 버렸다. 또다시. 허나 억울해 마라, 네가 보낸 것이니……. 그런데도 너는 체통도 없이 카펫 위를 기며 울부짖는다.
아, 답답한 해시트여.
사실은 너뿐 아니라, 나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너를 긍휼히 여긴 내가 시간을 되돌려, 네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대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리란 것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너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남자의 죽음을 막지도 못했을 것이고, 네 실수 중 가장 사소한 것조차 바로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실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
모든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내가 점지해 준 운명은 더더욱 아니었다.
운명일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자들의 선택이었으니까.
나도 보고 있었다. 너희들 모두가 매 순간마다 선택이라는 것을 했다. 그러니 후회도 오롯이 너희 자신의 몫이어야만 하리라.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죽음을 각오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