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그래. 황실에 충성할 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러니까 귀여워해 주지 말아야지. 라피난은 다짐했다.
다음 날 또 찾아가서 사탕을 먼저 주고 다음에 말고삐를 내밀었다. 굉장히 황당한 표정의 황자에게 대충 설명해 주었다.
“키 크는 덴 승마가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설마…… 안장에 오르는 법부터 가르쳐 드려야 합니까?”
라피난은 잠시 황자보다 더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진짜 귀여워해 주지 말아야겠다.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생각이 치밀었다.
귀여워해 주지 말아야지. 다정하게 대해 주지도 말아야지. 말에서 떨어져도 일으켜 주지 말아야지. 아프든 말든 모른 척해야지. 혹시 어마마마 얘기할 땐 무조건 자는 척하고, 음, 그보다 빨리 황태자 시험을 보게 하자. 그럼 다 끝난다.
그는 억척같이 해시트를 따라다니며 승마를 가르쳤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미케나 성서를 외도록 유도할 때도 많았다. 어찌 됐든 그의 목표는 해시트가 하루빨리 황태자 시험에 통과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그 하잘것없는 목표는 얼마 후 해시트가 인생 첫 번째 자객을 만나던 날 깨져 버렸다. 하필 성 바깥까지 승마 훈련을 나간 게 실책이었다.
*
“해시트 전하!”
자객은 죽였으나 이미 죽창이 황자의 옆구리를 꿰뚫은 뒤였다. 라피난은 흔치 않게 사고가 정지해서 우뚝 멈췄다가 뒤늦게 해시트에게 달려갔다.
“기다리십시오.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아, 안 돼. 의원은 안 돼, 라피난……!”
“불러야 합니다.”
의원이 안 되면 뭐 그냥 죽어 버릴 건가. 웬 오기를 부리느냐고 짜증 내지 않은 건, 라피난에게 사정하는 해시트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안 돼! 의원은 안 된다니까!”
버럭, 외치면서 평소와 다르게 올라가는 낭랑한 목소리.
분명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안 돼! 맛없다니까!”
아, 그랬나.
그랬구나.
그는 멍하니 해시트를 내려다보았다. 피가 왈칵 쏟아지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정신을 잃은 여자아이를……. 해시트는 황비의 딸이었다. 한 번도 딸이라고 불러 보지 못했을 딸.
라피난은 황비가 군말 없이 독을 주워 먹으며 죽어 간 이유를 깨달았다. 이 애 때문이다.
“내 딸이 너 같은 남자를 만나면 좋겠네.”
이제 보니 황비에게도 제법 약은 구석이 있었다.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라피난에게 딸의 목숨을 맡기고 갔으니까 말이다.
무슨 정신으로 그녀를 업고 의원을 찾아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해시트를 치료하는 의원의 뒷모습을 보는 내내, 치료가 끝나는 즉시 저자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만은 명백하게 인지한 채였다.
의원을 죽이고 돌아와 보니 그새 깨어난 해시트가 불안한 표정으로 라피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피난은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의원도 죽였습니다.”
무고한 자를 죽인 건 처음인가 싶다가도, 가만 생각해 보면 결코 처음이 아니었다. 무고한 여자에게 독이 묻은 사탕을 건넸던 한 달이 일평생 그를 괴롭힐 걸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자신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 모든 게 마음에 짐이 되었다. 속죄하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일단은 살아남지요. 죽어 마땅한 놈들은 차근차근 죽이더라도 말입니다.”
“죽어 마땅한 놈들…….”
“예. 죽어 마땅한 놈들.”
이렇게 됐으니 살려야지 어쩌겠나. 아무것도 모르고 황비를 죽여 버렸으니 그 딸이라도 살도록 해야지 별수 없었다. 해시트는 너무 어렸고 작았고 연약했다. 자신이 떠나면 당장 시들어 버릴 것 같았다. 아름다운 꽃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날, 라피난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너무 귀여워하진 말아야겠다.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말아야겠다. 나중에 황자가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너무 상처받지 않도록. 해시트가 보는 앞에서 의원의 시체를 절벽으로 밀어 버린 것도 반쯤은 그 때문이었다.
*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으나 자꾸만 시기가 변해 갔다. 처음엔 황태자가 될 때까지, 그러다 황제가 될 때까지, 더 훗날에는 세상을 바꿀 때까지, 어느새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을 만큼.
그리고 그 일련의 시간 동안 해시트의 입에서 황비가 언급된 건 손에 꼽도록 귀했다. 정말로 가끔이었다.
“라피난. 만약 내가 내 손으로 아바마마를 죽이게 되면 말이야.”
“예.”
“어마마마께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필 그에게 용서를 묻다니, 해시트의 유약함은 이따금 황비의 농담처럼 잔인했다. 라피난이 영원히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의 두 눈을 가린 채 영원을 견디고 싶게 만들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꼭 용서가 필요한 일입니까?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요.”
그날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당신이 진실을 모르면 안 될까? 어차피 나는 이대로 당신 곁에 있다가, 이렇게 여기에 있다가.
나는 이렇게, 여기에 있다가…….
“죄송하지만 저 결혼 안 합니다. 혼담 가져오지 마십시오.”
단호한 라피난의 통보에 양친은 눈이 휘둥그레져 그의 나이를 강조했다. 얘. 너 네가 몇 살인 줄은 아니? 그야 본인 나이가 몇 살인지는 라피난이 가장 잘 알았다. 평소 부모님 앞에서 장난이랍시고 허튼소리를 일삼는 성격도 아니었다.
“네. 독신으로 살다가 죽으려고요.”
그러니까 그건 확실한 진심이었다.
“그게 이후의 인생 계획에 적합합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인가 보다. 어느덧 라피난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하루씩 죽음에 가까워지며 하루를 더 그녀 곁에서 살기를 택했다. 알고 있었다. 그냥 알게 되었다. 이 맹목적인 충심은 허무맹랑한 대의 따위가 아니었다. 마치 신의 계시처럼 다가왔다.
“라피난.”
아마도 나는 이대로 당신 곁에 있다가.
“만약 이 몸이 황위에 오르기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건 무조건 너다.”
언젠간 당신 때문에 죽을 것이다.
“해시트.”
결국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닌 셈이었다.
“언젠간 내가 당신 때문에 죽을 거란 걸, 당신 빼고 모두가 다 알았습니다.”
알고도 온 길이었다. 후회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약간의 투정을 늘어놓자면 그냥, 그래. 좀 귀여워해 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좀 귀여워해 줄 걸 그랬다. 솔직하게.
솔직하게.
솔직하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가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지금까지 해시트의 곁을 지키지도 못했다. 그러니 이쯤으로 만족하자.
라피난은 미련 없이 눈을 감았다.
*
“왜 지금에 와서야 친구를 죽일 생각이 들었지?”
해시트는 허망한 눈으로 이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숨이 끊어진 남자가 무겁지도 않은지 품에 곱게 끌어안은 채였다. 이레이는 남자의 가슴에 꽂힌 자신의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녀의 눈으로 시선을 옮겨 무심하게 답했다.
“글쎄. 너에게 내 역린을 주고 와서 감정이 사라졌나 봐.”
“역린?”
“정말로 모르는 표정이군. 책을 읽은 게 아니었나?”
의아함에 찬 눈빛이 서서히 가물어졌다.
같은 순간 해시트는 또 한 방울 눈물을 밀어냈다. 책, 이레이가 말한 그 책이라면 당연히 읽을 겨를이 없었다. 라피난이 남겨 둔 유산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찾아 전장을 누볐다. 번번이 간발의 차로 이레이가 휩쓸고 간 폐허와 마주할 때면 손쓸 틈 없는 눈물이 뺨을 적시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아직까지도 나쁜 꿈을 꾸는 기분에 잠겨 있는 그녀에게 다시 이레이가 말했다.
“나의 역린.”
이것이 그가 진작 밝혔어야 하는 진실이다.
“드래곤의 감정은 모두 거기에 있거든.”
“……설마, 그게…….”
해시트는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짠 소금기가 밀려들자 혀가 녹아 버릴 듯 아렸다. 그러나 눈물에 녹아 사라진 그의 역린을 떠올리면 갑자기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내 손으로 직접 뜯어내 너에게 주고 왔지.”
어느덧 그는 감정이 사라진 존재답게 야멸차기 짝이 없다. 해시트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온정이라곤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단조로운 목소리로, 해시트가 모르던 사실들을 하나 하나 짚어 줄 뿐이었다.
“기쁨, 애정, 그리움, 다정함. 그밖에 미련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추억은 기억으로 대체되었고 그중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경계가 무너져 버렸지. 당연히 소중함이나 특별함을 느낄 리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친구였던 자를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었다.”
“그럼 나도 죽여 봐.”
곧장 해시트가 그에게 자신의 검을 집어 던졌다. 툭, 맥없이 나동그라진 검은 흙바닥 위에서도 아름답게 빛났다.
거짓말!
해시트는 속으로 악을 썼다. 억지 생떼라도 부리고 싶었다. 누가 거짓말이라고 말해 줬으면. 녹아 사라진 것이 그의 감정이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거짓말이 아님을 알면서도 또 악을 썼다.
“어디 나도 죽여 봐라. 사실이라면 왜 나는 죽이지 못하는데!”
“얘기했잖아. 너에게 내 역린을 주고 왔다고.”
그때 이레이가 검을 주워 들고 해시트에게 다가왔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해시트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래서 괴로웠다. 두려움보다 슬픔의 통증이 훨씬 더 쉽게 사람을 지배하더라. 그녀는 매달리다시피 붙들고 있던 라피난의 옷깃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이레이가 검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푹! 들판의 잔디를 한 뼘씩 옆으로 밀어 낸 검날이 흙바닥 깊숙이 박혔다.
그가 말했다.
“평생에 쓸 감정을 모두 거기에 두고 왔다.”
“…….”
“되돌리는 법은 나도 몰라.”
그의 뒤로 펼쳐진 너른 평지 곳곳에는 여전히 시체가 가득했다. 제국 백성도 있었고, 침략해 온 야만족 병사들도 있었으며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동맹국 전사도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여기저기 넘쳐흘렀다. 대부분 그가 죽인 사람들이었다.
이레이 린. 감정을 잃어버린 잔악한 드래곤이 제 욕심을 못 이겨 벌인 전쟁이었다. 만일 신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만일, 신이 있다면.
그는 눈앞의 황제가 마치 신이라도 된다는 양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감히 닿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면서 입을 열었다.
“버겁다면 지금이라도 돌려줘.”
그도 후회하는 눈치였다. 뼈저리게 시간을 되돌리길 원하는 낌새였다. 그러는 순간조차 그의 새파란 눈은 미동 없이 차가웠다. 연모를 논할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겨우 찾아온 봄을 쫓아 버릴 듯 매섭고 날카로웠다.
“말해. 내 역린은 지금 어디에 있나.”
해시트는 차마 그 앞에 대고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네가 찾아서 가져가.”
“그냥 말해. 어디에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잊어버렸어.”
“그럴 리가.”
“사실이야.”
“해스.”
“…….”
불시에 이레이의 새파란 눈이 땅에 꽂힌 검을 훑었다. 지금 그는 그녀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돌려주지 않을 거라면 지금 당장 그 검을 뽑아.”
그는 그녀의 검을 부르는 중이다. 차라리. 이렇게 살게 둘 바에야 차라리, 조금 전 그의 손으로 죽인 그의 친구처럼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