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결국 라피난은 면피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들릴락 말락 한 작은 한숨 뒤, 그가 자조적인 혼잣말을 이었다.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닐 텐데.”
왔던 길을 성큼 되돌아가 다시 침대맡에 앉자 쥰이 조금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물어보면 또 죽이겠다고 난리 피우실…….”
“안 죽여.”
아니, 못 죽인다는 말이 옳았다. 해시트가 제 팔이 잘릴 각오로 살려 준 목숨을 라피난이 함부로 해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그, 제가 폐하께 비밀 유지도 못 해 드리고요…….”
“마음대로 해.”
“그냥 신전에 가서 상담받으시는 게 어때요?”
“고해성사엔 취미 없다.”
대화를 주고받을수록 쥰의 표정이 점점 더 복잡해졌다. 곤란함과 짜증의 사이를 오가다가 불쑥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고 말했다.
“저기, 일단 제 안대부터 돌려주시겠어요?”
라피난은 묵묵히 주머니를 뒤적였다. 이윽고 검은 손수건에 싸인 같은 색 안대가 쥰의 손바닥으로 올라갔다. 왜인지 라피난의 시선은 그 위에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다. 손수건을 보는 것인지 손바닥을 보는 것인지 묘연했다.
그에 어색함을 느낀 쥰이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나서야 라피난도 천천히 시선을 떼어 냈다. 그러면서 운을 뗐다.
“이렇게 매일 사탕을 올려 드렸다. 황비 전하의 손 위에. 전하께서 쓴 약사발을 비우고 나면 한 알씩.”
“…….”
“그렇게 전하가 돌아가실 때까지.”
과거를 서술하는 그의 얼굴은 그다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어차피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밝히면 됐다.
“겨우 한 달 걸렸다.”
쥰은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포장이 뜯어져 있던 사탕에 독이 묻어 있다는 건 몰랐고, 내가 모르는 걸 전하께서 알고 계신 줄은 더더욱 몰랐다. 내가 무언가를 알게 된 건 돌아가신 전하의 입술이 파란색으로 물든 걸 보았을 때.”
그때.
그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지만 곧 특유의 딱딱한 말투로 덧붙였다.
“언젠가 전하께서 하셨던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지.”
“……뭐라고 하셨는데요?”
내내 듣기만 하던 쥰이 불쑥 되물었다. 라피난은 그게 의외라는 듯 그녀를 빤히 보면서 대답해 주었다.
“그 사탕, 전하께서 안 드시면 내가 먹어야 한다고.”
“…….”
마침 창을 타고 들어온 햇빛이 라피난의 눈동자를 비추었을 때다. 깜빡. 빛에 잠긴 투명한 녹색이 천천히 가려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음, 이제 사탕 지겹다.”
“싫으면 드시지 마십시오.”
“안 돼. 한 번 황비궁에 들어온 음식은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단다. 사탕 한 알이라도 마찬가지야. 내가 안 먹으면 이거 네가 먹어야 할걸?”
“별로 상관없는데요.”
“넌 단 음식 싫어하잖니.”
“……그건 맞습니다.”
그녀는 병약했고, 자신의 배로 낳은 황태자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열일곱 살 라피난이 보기에 그 둘의 공통점이라곤 그저 약하고 아름답다는 것뿐이었다. 한철 피었다가 흘러내리는 꽃처럼 언제 떠밀려 스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름다운 존재는 왜 금방 죽어 버릴까. 그 의문에 오래도록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게 진실이라면 왜 폐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문득 쥰이 질문했다. 라피난은 즉답했다.
“굳이 밝힐 필요 없으니까.”
“재상님. 그럼 계속 폐하를 기만하실 작정입니까? 듣자 하니 폐하께서는 앞으로도 최소 삼십 년은 재상님을 내치실 마음이 없어 보이시던데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요.”
쥰의 웅얼거림은 못내 불만에 차 있었다. 해시트가 악에 받쳐 내뱉던 말을 모두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되게 짜증 나거든요. 죄송하지만 지금 제겐 재상님 과거사를 들어 드릴 정신이 없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설렜던 남자는 알고 보니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고, 몇 년이나 짝사랑했던 상사는 보아하니 사람조차 아니……, 아아! 아무튼 생각할수록 황당하다고요. 그러니 저한테 미루지 마시고 폐하께 직접 고백하십시오. 하루빨리요.”
그 불만 아래 깔린 옅은 연민이 모처럼 라피난이 실소하게 만들었다. 그는 빙그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반듯이 내렸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용건이 끝났다는 양 앉아 있던 의자까지 구석으로 치워 두고 걸음을 옮겼다.
“시끄럽다. 남의 속죄 방법에 대해 참견하지 말도록.”
“앗, 잠깐만요. 재상님!”
“쉬어.”
속죄라니? 제 입으로 뱉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달리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
오늘 저녁은 웬일로 이레이가 아닌 감시인 여자가 가져다주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쯤 일찍. 방 안에는 시계가 없었지만 노을 지는 해의 방향으로 알 수 있었다.
타라. 해시트는 오전에 들은 그녀의 이름을 되뇌며 물끄러미 타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왕은 어딜 가고 네가 왔나.”
“폐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꼭 높은 분에게 수발을 받으셔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받아치니 조금 머쓱하다. 타라의 배 속 아이의 아버지를 해시트가 짐작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가질 필요 없는 가책이었다. 어차피 이레이나 타라나 해시트에게 불편한 건 똑같았다. 그녀는 말없이 스푼을 들었다. 다 먹을 때까지 나가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습관처럼 반찬의 뒷면을 뒤집어 보다가 푹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독을 넣었군.”
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짧게 손뼉을 부딪쳤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역시 밥이 아니라 약에 넣을 걸 그랬나 봐요.”
“그랬으면 한 입 정도는 먹었을지도.”
“아쉽습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더니 마음이 급해졌어요.”
“이레이도 알고 있나?”
“아뇨.”
이레이 말마따나 타라는 해시트를 싫어했다. 기꺼이 살심마저 품었다고 하니 그냥 싫어하는 수준도 아니고 증오하는 모양이다. 해시트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식 모르게 이런 짓을 벌이다니 용기가 대단하군.”
“성공한다면 죽더라도 후회는 없었으니까요.”
“아이를 살리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설마 복수심에 견주겠습니까.”
“짐이 살아생전 야만족 사람에게 그 정도의 원한을 사게 될 줄은 몰랐구나.”
그것도 남자 때문에 말이다. 달갑지 않다. 정말이지 달갑지 않았다. 대충이라도 해명해 두는 게 좋을 성싶어 해시트는 넌지시 눈썹을 긁적였다.
“너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내겐 제법 사이좋은 남편이…….”
그때 이레이가 벌컥 방문을 열고 등장했다. 해시트는 당장 하던 말을 끊고 소리쳤다.
“너 손 하나 까딱하기만 해!”
하지만 그녀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타라는 목이 졸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었다. 한 손으로 타라의 목을 움켜쥐어 허공에 들어 올린 이레이가 아무런 감흥 없이 내뱉었다.
“죽을 줄 알고 한 짓이겠지.”
“큭, 커흑……! 사, 살려 주…….”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마.”
타라가 몸부림쳤다. 바닥을 디디려 버둥거리는 두 발목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숨을 쉬어 보겠다고 한껏 고개를 비틀어 댔지만, 지켜보는 이레이의 눈빛은 무감각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언제쯤 숨이 끊어질까 시기를 재는 듯했다. 해시트는 무작정 잡히는 대로 이레이에게 집어 던졌다.
“내려놔! 네가 이 여자를 나무랄 자격이 있는 줄 알아?!”
베개부터 시작해 화병과 포크까지 집어 던졌지만 그는 꿈쩍도 안 했다. 아예 해시트에겐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았다. 초조해진 해시트는 직접 그에게 달려가 마구 손찌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실수로 다친 쪽 팔을 휘둘러 크게 신음하고 말았다.
“으윽!”
흘긋, 이레이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돌아갔다.
“가지가지 하는군.”
그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곧장 타라를 놓아 주고 해시트의 어깨를 붙잡아 앉혔다.
풀썩, 타라가 바닥으로 주저앉는 소리에 맞춰 해시트의 붕대가 스르륵 풀렸다. 이레이는 능숙하게 해시트의 팔을 고정해 두고 그 위로 찡그린 얼굴을 기울여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수술 부위가 덧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잠시 후 얼굴이 멀어질 땐 다가올 때에 비해 한결 무던해진 표정이었다. 멀어지는 그의 얼굴 너머로 타라의 숨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허억, 허억, 허억…….”
그녀는 이레이가 해시트의 상태를 확인하는 내내 바닥에 주저앉아 밭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혼자서.
갑자기 해시트는 까마득하게 숨이 막혔다. 정작 목이 졸린 사람을 앞에 두고서 잘도 그런 감상이 들었다. 혼란스러움과 함께 울컥 울화도 치밀었다. 결국 이레이에게 바락바락 악을 쓰고 말았다.
“위선 떨지 마. 역겨우니까. 넌 그냥 날 괴롭히고 싶은 거잖아? 나한테 아직 보여 줄 게 많아서!”
그 말에 이레이가 순간 얼굴을 굳히는가 싶더니 곧 도발하듯 대꾸했다.
“의외로 처지를 알고 있군.”
“그래서 아직도 보여 줄 게 남았나?”
“발에 채여 넘치지.”
“기대되는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짓씹고 해시트가 이레이를 지나쳐 타라에게 달려갔다. 잡고 일어나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지만, 타라는 해시트의 하얀 손을 보자마자 부르르 몸을 떨며 스스로 일어났다.
탁! 매서운 손길에 뿌리쳐진 손등이 아팠다.
“같잖습니다, 폐하. 위선은 대체 누가 떨고 계신지요!”
해시트는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래서 질세라 언성을 높였다.
“정신 차려. 어쩌다 저런 놈에게 홀려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네게 한 짓을 겪고도 모르겠나? 저런 자식이 애 부모 노릇은 제대로 할 것 같냐고! 헛된 희망 좀 그만 버려.”
“무슨 말씀이십니까? 헛된 희망을 심어 준 것도 폐하이시잖아요!”
“뭐야?”
“제가 왜 베누스의 왕에게 제 아이의 부모 노릇을 바라나요? 전하가 제 남편도 아닌데!”
“…….”
흥분으로 격양되었던 해시트의 표정이 단숨에 차가워졌다. 속에서 시린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려 했다. 저도 모르게 휙 뒤를 돌아보자 이레이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눈 한 번 깜짝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등 뒤에서 타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 야만족 사람이 아닙니다. 이 미케나에서 나고 자란 제국 백성, 하지만 제국이 버려도 좋은 백성.”
“…….”
“그래서 비참하게 버려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