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뭐?”
“어차피 당신이 지금부터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나흘 뒤에 내가 데려다주는 게 더 빨라. 당신네 그 잘난 재상이 지금쯤 수습 잘해 뒀을 테니 안심해. 이런 게 처음도 아니잖아?”
“뭐야? 이봐, 애초에 난 여기 왜 데려온……!”
“아 참.”
문밖을 나서던 그의 걸음이 딱 멈췄다. 문턱을 밟은 채 내뱉은 말에 웃음기라곤 전무했다.
“약 먹기 싫으면 그것도 알아서 하도록. 어제는 당신이 급성 몽유병이라도 걸려서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제 시간에 약을 챙겨 먹은 줄 아는가 본데.”
설마, 해시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게 꿈이 아니었다고? 그녀의 의심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이레이가 덤덤히 덧붙였다.
“궁금하면 부디 끝까지 버텨 보시길.”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그런데 혹시 궁금해한다고 오해하면 어쩌지. 해시트는 그날 점심과 저녁 식사에 딸려 나온 약사발을 얌전히 비웠다.
*
아무래도 이곳은 이레이의 현지 거처 같았다. 야만족의 왕이 제국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니, 해시트는 그 이유를 막론하고 수도에 돌아가는 즉시 몰수하겠다 결심했다.
이 층짜리 집 안 곳곳엔 생활의 흔적이 촘촘히 묻어 있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흰 벽마다 탁 트인 창문이 나 있었고, 그 창마다 짙푸른 해안선이 너르게 펼쳐져 있었다.
감시인의 시선을 무시한 채, 파도 하나 없이 잠잠한 바다와 광활한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해시트는 시나브로 현실을 잊곤 했다. 무슨 고민 중이었더라. 아, 저 창문으로 탈출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 중이었다. 그렇듯 어떻게든 수도로 돌아갈 궁리만 하다가도 허송세월하기 일쑤였다.
이레이도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새벽녘이 다 되어야 방으로 들어갔다. 딱히 해시트를 포로 삼아 제국에 뭔가를 요구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해치거나 굶기지도 않았다. 챙겨 주는 식사도 제법 괜찮았다.
왤까? 어쩌면 이레이가 가져다주는 약에 이상한 성분이 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말에 따르면 수술 부위가 썩지 않도록 도와주는 치료제라고 했지만, 순 거짓말이었는지 알 게 뭔가.
그러나 해시트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때면 이레이는 화를 참는 기색이 여실했다.
“내가 그런 눈에 뻔히 보이는 수를 쓸 것 같나?”
“그럼 진짜 속셈이 뭐야. 말해.”
“없다.”
“제릴은 왜 죽였지?”
“그 질문 지겹지도 않은가 보군.”
그 뒤론 늘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붕대만 갈아 주고 나가 버리곤 했다.
*
고요히 쌓여 가던 그의 분노가 터진 것은 감금 사흘째, 바로 오늘 새벽이었다.
이레이는 또다시 창문으로 탈출을 시도한 해시트를 발견하자마자 감시인의 팔을 잡아끌어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아악! 절박한 비명이 울렸다.
“전하, 살려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나 말고 저기 황제에게 빌어야지.”
그가 무심한 말투로 감시인을 타일렀다. 감시인은 필사적으로 이레이의 팔에 매달려 버티고 또 버텼다. 그 채로 몇 번이나 해시트를 돌아보며 외쳤다. 이레이가 바라는 대로.
“살려 주십시오. 황제 폐하! 제발 살려 주십시오!”
글쎄, 겨우 이 층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시트는 걸음을 멈췄다.
감시인은 배가 부푼 여자였다.
떨어지면 죄 많은 어른은 살지언정 무고한 아이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 그 여자였다. 해시트가 감옥에 가두었던 야만족.
제국의 황제를 앞에 두고도 꼿꼿하기 그지없던 그녀가 지금은 배 속의 아이를 살려 달라며 처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해시트가 멈추지 않으면 이레이가 자신을 떨어뜨릴 것이라 확신하는 듯했다.
실제로 여자를 대하는 이레이의 태도에선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찰나 눈이라도 깜짝했다면 해시트도 설마 임부를 떨어뜨리겠느냐 의심해 봤겠지만, 결국 그녀는 욕지기를 삼키며 제 발로 집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야 했다. 해시트가 현관을 넘는 동시에 이레이가 여자를 끌어 올려 주었다.
계단을 밟으며, 해시트는 애써 덮어 두었던 기억을 헤집었다.
“폐하께서는 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답하지 않은 질문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스스로가 싫었다.
한편 안전을 확보한 여자는 언제 울부짖었냐는 양 평소처럼 행동했다. 이층으로 올라온 해시트가 곧장 이레이의 뺨을 후려치든 말든, 그러다 그에게 손목이 잡혀서 서로 노려보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황당했는데, 이레이는 한술 더 떠서 여자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해시트의 손목을 홱 끌어당겨 얼굴이 부대낄 정도의 거리에서 속삭였다.
“하루를 못 참고 일을 치시는군.”
“이해해라. 하루라도 빨리 네놈 면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안 본 새 머리가 나빠졌나 봐. 얌전히 기다리는 게 네게도 이익이라는 걸 알 텐데.”
“네놈 말을 믿느니 신관이 뇌물 안 받겠다는 소릴 믿을래.”
“그래서 붙잡힐 걸 알면서도 자꾸 도망가나?”
“네가 안 붙잡으면 되잖아. 그리고 내 몸에서 손 떼!”
해시트가 경멸에 차 일갈했다. 그녀의 명령에 이미 가라앉아 있던 이레이의 파란 눈동자가 더욱 매서워졌다. 그가 되물었다.
“붙잡지 말라,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누가 옛날이야기 하자고 했나?”
“그런 줄 알았는데. 옛날처럼 품에 끼고 달래 줘야 얌전히 잠들겠다고.”
“조용히 못 해!”
퍽! 해시트는 붙잡힌 오른팔과 다친 왼팔 대신 있는 힘껏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여자를 찾았다. 들었을까? 하지만 여자를 찾을 새도 없이 이레이에게 턱이 붙들려 다시 정면을 바라봐야 했다. 조용히 해 줄 마음 없는 이의 말은 갈수록 못된 심보만 더했다.
“과거와 같은 것을 줄 수는 없지만 흉내 정도는 내 줄 수 있지. 원한다면 언제든지 말해.”
못되고 말고를 떠나서 이 정도면 인륜의 문제지 싶다. 아니, 인륜을 기준에 두면 이놈은 인간이 아니니 문제없다고 우기고도 남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양심은 있어야지. 양심까지 내다 버린 줄은, 뭐 그야…… 그것도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곱씹다 보니 분한 마음이 허무하게 식어 갔다.
해시트는 그를 무시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어느새 여자는 이층을 벗어났는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타라는 왜 찾나.”
그 여자의 이름이 ‘타라’인가 보다.
묻지도 않은 정보가 제멋대로 머릿속에 각인됐다. 인상을 찌푸린 해시트가 거칠게 이레이를 쳐 냈다. 탁, 그제야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신경 꺼.”
“친해질 생각 마. 그 여잔 당신 싫어해.”
“누군 좋아하는 줄 알아?”
제정신이라면 좋아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해시트는 기가 막혀서 이레이를 흘겨보다가 떨떠름하게 시선을 떼어 냈다. 이런 놈이랑 살고 있는 그 여자도 아마 제정신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목소리가 자연히 날카로워졌다.
“약속 지켜. 분명 내일이라고 했다.”
딱 하루만 더, 하고 싶지 않은 상상을 하며 알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하는 시간을 견뎌 내기로 했다. 이레이는 그를 피해 방으로 돌아가는 해시트의 등 뒤에 대고 마지막까지 비아냥거렸다.
“난 약속은 지켜.”
“…….”
“당신도 알잖아.”
하루만 참자. 해시트는 한 번 더 되뇌었다.
*
라피난 카일에게 생사를 오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언제부턴가 완전히 몸에 익다 못해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적응하기 힘든 고된 업무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가 열일곱 살에 알게 된 황태자가 하루가 멀게 몸져누웠기 때문이다.
해시트는 승마를 하다가 자객에게 칼을 맞는가 하면, 사냥이라도 나간 날엔 백이면 백 활을 맞고 돌아왔다. 그때껏 사지가 멀쩡한 게 되레 기적이라 여겨질 만큼 온몸에 기운 자국이 가득했다.
워낙 다칠 일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철이 들어서인지, 해시트는 곧 감기나 열병 정도로는 내색조차 않게 되었는데, 낮에는 열에 잠겨 꾸벅꾸벅 이마를 떨어뜨리다가 밤이면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는 어린아이를 일부러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 또한 라피난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다정하게 대해 주는 방법을 몰랐던 탓이다.
혹은 책임지지 못할 애정을 주었다가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봐서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조금 잘해 줄 걸 그랬지.
라피난에겐 문득문득 이레이를 바라보던 해시트의 눈빛이 떠오르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건 해시트가 라피난을 볼 때나, 그리고 여기 누워 있는 쥰 데이티니스를 볼 때와도 확연히 달랐다.
사흘 밤낮의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드디어 눈을 뜬 쥰은, 침대맡에 앉아 있는 라피난을 보자마자 허탈하게 군소리를 꺼냈다.
“뭐야. 안 죽이셨네요.”
“쉬어라.”
라피난은 거두절미 몸을 일으켰다. 깨어난 것을 확인했으니 용건은 끝났다.
물론 쥰 또한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이러다 라피난이 나가 버릴라, 그녀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묻지 말도록.”
“폐하는 돌아오셨나요?”
“……아직.”
“젠장, 전쟁 나게 생겼군요. 어떡하죠?”
“이기는 수밖에 없지.”
“폐하께선 이 상황을 모르시겠죠?”
“글쎄…….”
“저기, 재상님. 제가 본 남자가 이레이 린 대장님이 맞나요?”
문고리에 걸친 라피난의 손이 짧게 떨렸다.
맞다 해야 할지 아니라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껍데기는 분명 동일했으나, 그 속을 채운 내용물이 비워지고 깨진 지 너무 오래되어서…….
침묵하는 라피난의 뒤에서 쥰이 불시 질문을 바꿨다.
“그 남자, 인간은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