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71화 (70/104)

71화.

“그 금고는 웬 것이냐.”

해시트의 서재에서 꼬리를 물고 나오는 행렬들을 쭉 지켜본 끝에 라피난이 입을 뗐다. 사람 머리통만 한 금고가 출입문을 넘어선 직후였다. 소박한 크기에 비해 제법 무게가 나가는지 금고 하나에 장정이 무려 넷이나 달라붙어 있었다.

라피난을 알아본 시종들이 곧장 금고를 내려놓고 절을 올렸다.

“폐하의 서재를 청소 중이었습니다, 재상님.”

감히 황제의 남편을 부르는 호칭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실은 라피난의 호칭과 관련해서 한차례 갑론을박이 지나간 뒤였다. 지금껏 황제의 배우자를 황비라 지칭해 왔으나 당대엔 성별이 반대였던 고로.

정작 해시트와 라피난의 입장에선 굳이 새 호칭을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대신들의 의견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러니 그따위 주제를 국무회의에 올리는 멍청이 짓을 저질렀을 테지.

안건을 받아 든 해시트는 이런 쓸모없는 주제가 국무회의장에 올라오기까지 대신들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애석해했다. 종이가 아깝다. 그래서 종이를 낭비한 이들을 한날한시에 죽여 그들의 후손이 기일을 치르는 수고를 덜어 주고자 했다.

“하하.”

찌익.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서류가 찢어졌다. 해시트는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양쪽으로 갈라진 종이를 등 뒤로 날렸다. 팔랑!

“저기 앉아 있는 카일 가문 장자의 직업이 황제의 남편이었나? 짐은 재상인 줄 알았는데.”

그녀의 대각선 자리에 착석해 있던 라피난이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재상이자 황제의 남편에겐 부인께서 굳이 서두를 깔 때 적절히 맞장구쳐 줘야 할 소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노여워 마시지요. 폐하와 혼인하고도 나랏일을 하겠다고 버틴 제 잘못입니다. 아마 대신들께서는 제가 폐하의 내조를 게을리할까 봐 걱정한 모양입니다.”

귀찮아한 것치고는 실로 갸륵한 연기력이었다. 해시트는 턱을 치켜들었다.

“감히 짐의 남편을 서럽게 만들었으니 참수형이 마땅하다.”

“사, 살려 주세요. 시정하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대신들이 당장 의자에서 내려와 엎드린 채 싹싹 빌었다. 노인네들 반응속도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앞으로 십 년은 거뜬히 부려 먹을 수 있겠다. 본보기 삼아 한두 놈쯤 퇴직시키려던 해시트는 그 정정함에 감명받아 마음을 고쳐먹었다.

“앞으로 쓰잘머리 없는 짓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도록.”

“예!”

그렇게 되었으니, 라피난을 부르는 호칭이 혼인 전과 같이 ‘재상님’으로 굳어진 자초지종이었다. 이름하여 황제 폐하에겐 물러 터졌고 다른 이들에겐 호랑이처럼 무서우신 재상님.

해시트가 들었다면 입맛을 잃고 말았을 부연이지만, 그토록 서릿발 날리는 재상을 눈앞에 둔 시종들은 입맛이 아니라 오금이 저릴 뿐이다.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시종 하나가 라피난이 더 추궁하기 전에 넙죽 설명을 더했다.

“폐하께서 서재의 사방 벽을 뜯어 아주 꼼꼼하게 청소해 두라 명령하셨습니다. 이 금고는 벽을 뜯어낸 안쪽 공간에 박혀 있었으나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았고, 또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았는지 문짝이 삐걱거려 잠시 뜯어낸 것입니다. 깨끗하게 정비하여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두려 하니 심려치 마십시오.”

“열려 있었다?”

바로 라피난이 되물었다. 시종은 억울한 꼬투리가 잡힐라 크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저희가 확인했을 땐 이미 열려 있었어요.”

“내용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감히 열어 보았다는 말이군.”

라피난의 미간이 더럭 좁아 들었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였다.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시종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것이…….”

머잖아 엎드린 시종들 틈에서 수군거림이 샌다. 야, 그래서 내가 열어 보지 말자고 했잖아!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를 곁눈질하며 라피난의 눈치를 보는 꼴이었다.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듯 처절하게 읍소한다. 재상님, 용서해 주십시오. 절대로 제가 먼저 보자고 한 게 아니라……. 몇몇은 당장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라피난은 가만히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짧은 한숨을 토해 냈다.

“꺼져라.”

웬일로 즉결처형 대신 경멸에 찬 시선뿐이었다. 시종들은 행여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감사합니다!”

일제히 합창한 이들이 벌떡 몸을 일으켜 물러났다.

금세 복도에 남겨진 이는 라피난 하나였다. 시종들이 눈치껏 놓고 간 금고까지 둘이다.

“…….”

라피난은 장정 넷이 달라붙어 겨우 운반하던 금고를 혼자서 가뿐히 들어 올렸다. 급기야 좌우로 흔들어 보기까지 했다. 텅 빈 금고에선 문짝 삐걱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진짜 비어 있군. 확인한 뒤에야 금고를 옆구리에 끼고 해시트의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평소보다 걸음이 느렸다.

해시트가 이 안에 무엇을 보관했던 걸까.

애당초 뭐가 들어 있기는 했을까? 황제가 이 작은 공간에 몰래 간직해 두었을 비밀이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금고의 존재에 대해서 해시트에게 들은 바 없어 신경 쓰였다. 그가 흘긋 옆구리에 낀 금고를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서재에 숨겨 두다니.”

신기하네. 이런 것까지 저를 닮아 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문득 실소를 흩트리다 말고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깜빡, 눈꺼풀이 여닫힌다. 투명한 녹안으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애써 묻어 둔 기억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모두 황제 폐하께서 귀띔해 주신 덕분입니다.”

알테 공국 사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몇 달 전, 해시트에게 바칠 검을 들고 찾아온 그는 으레 남들처럼 공치사하지 않았더랬다.

*

“재상님께서 부탁하신 광물은 저도 처음 만지는 재료였거든요.”

한데 그게 해시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영문 모를 소리에 검을 구경하던 라피난이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과묵함을 아는 사절은 괘념치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광물을 쇳물에 섞어 제련하려면 녹이진 못해도 잘게 부수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불에 달궈도 그을린 자국 하나 남지 않고, 눈발에 얼린 뒤 내리쳐도 실금 하나 남지 않으니……. 지금에야 드리는 말씀이지만, 지난 사 년간 저도 마음고생이 심했답니다.”

그러고는 허허롭게 웃는다. 그쯤이야 라피난도 익히 알다 못해 구구절절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도저히 제힘에 부쳐서 공국까지 찾아가 의뢰했던 것이니까.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왜 갑자기 해시트의 공이 언급되느냐이다.

“계속 말해 보도록.”

“얼마 전 화친 행사 때요. 폐하께서 친히 제 숙소에 행차하시어 정답을 알려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정답?”

라피난의 목소리가 변했다. 사절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훤한 기억을 돌이켜 보는 데만 온 정신이 팔린 채다. 성취감에 젖어 뿌듯한 얼굴이 또박또박 해시트의 정답을 회고했다.

“‘따뜻한 소금물에 담가 봐.’라고요.”

“…….”

“폐하의 말씀대로 했더니 광물이 굳기 직전의 사탕처럼 흐느적거리다가 단단해지길 반복하더군요. 그때 쇳물에 빠뜨리니 거짓말처럼 녹아들어 제련할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소금물.

해시트가 어떻게 그런 지식을 알고 있었을까? 그가 불태운 서책에도 그런 내용은 전무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쩌면 이레이에게 들었을지도 모르겠단 추측이 들었다. 그가 또 얼토당토않은 모험담을 늘어놓는 척 비밀을 누설했을지도…….

미심쩍게 검과 사절을 번갈아 보던 라피난은 불현듯 검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다.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검집 안으로 검날을 집어넣었다. 스릉. 검집이 닫혔다. 어차피 과정과 상관없이, 이 물건은 반드시 해시트의 손에 쥐어져야 했다.

만일의 만일을 대비해서.

사랑을 깨우쳐 버린 흉포한 드래곤이 혹시 그녀를 찾아오더라도 대비할 수 있도록, 여느 때처럼 노파심 때문에 미리 수선을 떨었다고 해 두자.

라피난이 까딱 턱짓으로 문짝을 가리켰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나가 보도록.”

뒤를 도는 순간 목이 날아갈 이에게 마지막 치하 정도는 아끼지 않았음이다. 사 년 동안 검을 재련해다 바친 노고를 목숨과 함께 세상에서 지워 버리며, 그는 묘한 찜찜함까지 억지로 뿌리쳤다. 해시트가 어떻게 드래곤의 비늘을 재련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까?

*

그리고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소금물.”

그게 뜻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바다도 볼 수 없는 제국 수도에서 해시트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던 따뜻한 소금물이란, 하나뿐이다.

라피난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안이 텅 비어 버린 네모진 금속 상자 안에는 본디 어떤 반짝이는 형상이 존재했을 터였다. 확신한 동시에 바르르 입술이 떨어졌다. 그는 회피하지 못했다.

“눈물.”

매일 책을 읽는단 핑계로 서재에 틀어박혀서 한바탕 흐느끼다 돌아왔을 여자를 떠올리자 느닷없이 몰려온 감정이 그를 둘러싸고 빠져나가게 두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울고 싶어질 만큼의 허망함이 차오른다. 그 뒤엔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해시트는 이레이의 정체를 알고 있다. 추측건대 아주 오래전부터.

아. 그들이 주고받은 형체 없는 선물이 단지 추억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인즉슨 지금껏 선의의 거짓말에 놀아난 이는 해시트가 아닌 라피난이다. 그녀는 단지 그의 거짓말에 놀아나는 척 장단을 맞추어 주었을 뿐이다.

흩어져 있던 인과의 퍼즐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어렴풋이 의심하던 기분과는 완벽하게 달랐다. 라피난은……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때맞춰 다다른 해시트의 침실에서 나온 시종 두 명이 재잘대며 문을 닫고 있었다.

“걱정이야. 날이 이리 추워졌는데 우리 폐하께서는 여전히 창문을 열고 주무시니.”

“그게 어디 하루 이틀이니? 나는 폐하께서 창을 닫고 주무시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래도……. 감기 걸리실까 봐 걱정되니까 그렇지.”

“글쎄, 우리가 참견할 일이 아니래도. 우리 같은 아랫것들은 그저 이불이나 두툼히 깔아 드리면…… 에구머니나, 재상님 오셨습니까?”

뒤늦게 라피난을 발견한 두 명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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