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70화 (69/104)

70화.

#1. 낮과 밤

시종 몇 명이 높은 사다리에 올라가 서재 천장을 닦고 있다. 이미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샹들리에도 굳이 헝겊으로 문질러 윤을 낸다.

성 안의 모든 곳이 그럴 테지만, 이곳은 특히 눈길 닿는 곳마다 매끄러운 대리석과 번쩍이는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금만 청소를 게을리해도 한눈에 더러워진 티가 났다. 그야 황제의 개인 서재이니 특별한 게 당연했다.

“어이, 거기! 먼지떨이 좀 던져 줘!”

“이 서책들은 새로 분류해 둬야겠지? 크기별? 아니면 제목별?”

“주제별로 나눠야지, 멍청아.”

“조심해! 사다리 흔들리잖아!”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또 다른 몇몇은 바닥에 엎드려 카펫을 걷어 내는 중이었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화려한 문양이 둘둘 말려 가려진다. 웬만한 침대 열댓 개를 붙여 둔 면적의 거대한 카펫은 티플리스 3세의 즉위를 축하하며 알테 공국에서 보낸 선물이었다.

“출입구 쪽 바닥에 수평이 안 맞네. 반대쪽을 좀 갈아 낼까?”

“그 문제는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다. 넘어지실 일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셨어.”

“그럼 창틀은?”

“창틀이 왜?”

“이리 와서 봐 봐.”

매일 부지런히 쓸고 닦는 것이 업무인 황제궁 시종들에게도 오늘은 드문 대청소 날이라, 다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일터에 나와 있었다. 대청소 날에는 평소 출입이 제한되는 공간까지 마음껏 출입할 수 있다. 미리 챙겨 온 발판을 딛고 선 누군가가 서재 한쪽 벽의 책장을 있는 힘껏 밀어 냈다.

구우웅……!

책장과 벽이 어긋나면서 벽 너머로 새로운 방이 드러났다. 평소엔 시종들이 출입할 수 없는, 황제의 비밀 공간이었다.

책장 뒤에 이런 공간을 만들어 두다니 수상한 냄새가 솔솔 풍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놀라워하지는 않았다. 원래 높으신 분들이란 이렇듯 비밀 공간 한둘쯤은 숨겨 두고 사는 법이니. 하물며 이 서재의 주인은 대미케나 제국의 황제가 아니신가. 밀실 한둘이 아니라 열둘이라도 애걔 소리가 나올 만했다.

“애걔? 의외로 소박하시네.”

실제로 김빠진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황제 해시트의 ‘비밀 공간’이 실망스러울 정도로 단출했기 때문이다. 창문도 없는 벽면엔 보석은커녕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았다. 그 비좁은 공간에 겨우 한 사람이 앉을 만한 책상이 달랑 의자 하나와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라, 금고를 두고 가셨네.”

“자물쇠도 안 채워 두셨어.”

사람 머리통만 한 작은 금고가 덩그러니 놓인 채다.

야만족 베누스를 징벌하기 위해 황제 해시트가 서쪽 국경으로 달려가 버린 지금, 황제는 떠나기 직전 시종장을 불러서 이곳 서재의 사방 벽을 뜯어내 꼼꼼히 청소하라 일러두었더랬다. 그런데 개인 금고를 미리 치워 두지 않았다니 뜻밖이다. 황제궁의 시종들을 그토록 신뢰하는 것일까?

그러다 저 안에 든 보물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다간 억울한 한두 명의 목이 날아가는 것으론 끝나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그나저나 도대체 얼마나 귀한 보물이 들어 있을지 궁금해 죽겠다. 시종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새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금고 앞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한 명이 불쑥 금고로 손을 뻗었다.

“구경만 하자고. 어떤 게 들어 있을지.”

“아서라. 괜한 화를 당할라.”

“보기만 한다니까.”

“폐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거라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추측도 충동 앞에선 아무런 소용 없었다. 벌컥! 만류할 새 없이 금고의 문짝이 열렸다.

“으악! 열지 말라니까!”

지레 겁에 질린 누군가가 질끈 눈을 감았다. 어떤 이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정작 일을 벌인 장본인은 짐짓 허탈한 한숨만을 내쉬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그랬다. 금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안에 존재하는 물질이라곤 어쩐지 코끝을 간질이는 묘한 향기뿐. 그조차 형체는 없었다.

꽃, 혹은 들풀이거나 사람의 체취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람이 아닐 수도, 그러나 거기까지 추측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름 모를 향기에 몇 번인가 눈을 껌뻑이던 시종들은 이내 언제 농땡이를 피웠냐는 듯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바보야.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폐하께서 몰래 금고에 보관하실 정도의 물건이라면 이미 따로 챙겨 두셨겠지. 아무렇게나 두고 떠나셨겠어?”

“내 말이. 아랫놈들에겐 보이지 않도록 잘 갈무리해 두셨을 거다. 우리 폐하가 얼마나 꼼꼼하신 분인데.”

그들은 다시 청소 도구를 집어 들었다. 성실하게 벽의 얼룩을 닦고 창틀의 먼지를 털어 냈다. 머잖아 승전보를 울리며 금의환향할 그들의 아름다운 황제를 기다리며.

*

해시트는 그녀의 눈물이 제가 가진 유일한 추억을 녹여 없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겨우 한 조각에 그쳤던 남자의 편린은 어느 날 그 위로 떨어진 굵은 눈물방울과 함께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존재한 적도 없었다는 듯 깨끗이 증발해 버렸다.

이제 그 남자가 해시트의 곁에 머물렀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홀로 서재에 앉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의 존재를 떠올릴 때면, 해시트는 더 이상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있었던 일이 없던 일이 되어 버리는 세상이 왔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전해 주고 간 작별 인사마저 그녀의 미련을 덧없다 비웃는 듯했다.

“연모하였다.”

새벽녘 달리는 말 위에서 해시트는 그토록 덧없는 미련을 곱씹었다.

하지만 이 기억도 언젠가 잊히고 말리라. 세계에 영원한 것은 없다. 혼자서라도 간직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하리라 여겼던 한때는 어느덧 과거가 되어 버렸다. 필시 그 남자에게는 훨씬 더 예전에 먼 과거가 되었을 터였다.

그건 애석한 일인가, 다행스러운 일인가.

해시트는 판단하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지금 그녀가 달려가는 그곳에 그 남자가 서 있으리란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이미 제 손으로 버린 남자를 추억할 시간에 그를 죽여야만 한다는 확신뿐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남자가 그녀의 백성들을 죽일 것이다.

“지금 너를 죽일지, 나중에 네 백성들을 죽일지 고민 중이야.”

예전부터 남자는 가장 꺼림칙한 말들만 골라 실천에 옮기곤 했다. 실로 못된 심보라고 생각하면서도 진작 버릇을 고쳐 두지 못했다. 그것이 해시트의 패착이었다, 책임지지 못할 애정을 준 것은. 그리고 받은 것은.

처음부터 뿌리쳤어야 했는데.

뿌연 새벽안개가 그녀를 뒤덮었다. 해시트는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곧 아침이 밝았다가 머잖아 어둠이 내려온다. 낮과 밤이 몇 번이나 뒤바뀌었다. 서쪽 국경이 점점 가까워진다.

도시에 닿을 때마다 말을 바꿔 타느라 하릴없는 휴식을 취할 때면, 그녀는 습관처럼 허리춤을 매만져 검집을 확인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손의 열기를 식힌 뒤엔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은 채 가만히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라피난.”

그럼 쥰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정정해 주곤 했다.

“폐하, 재상님은 성에 있습니다.”

“아. 그랬지…….”

해시트가 매가리 없이 대꾸했다. 머쓱한 시늉조차 안 했다. 라피난의 출정을 막은 이는 다름 아닌 해시트였다. 야만족의 침략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군대로 달려가려는 그를 밀쳐 내며 거칠게 윽박질렀었다. 안 돼! 넌 성에 남아서 만일을 대비해야지! 그때 라피난이 뭐라고 했더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되묻는 라피난의 눈빛은 사뭇 혼란에 차 있었다. 배신감이었다. 그는 책망하듯 목소리를 뚝뚝 끊었다.

“성에 남아 계셔야 할 사람은 당연히 이 성의 주인이 아닙니까?”

“…….”

“제가 폐하의 안위 외에 대체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데요.”

단단히 경직된 두 눈가가 한순간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이 꼭 상처받은 사람처럼 보여서 해시트는 마땅히 반박하지 못했다. 이윽고 라피난이 입술을 꾹 가로 닫으며 그녀에게서 멀어질 때까지.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 당부는 해시트는 퍽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를 외면한 채 출정길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한들 그의 이해를 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에 와서 자꾸만 라피난을 찾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라피난.”

변명하고 싶었다.

“나는 그놈이 그리워서 찾아가는 게 아니야.”

질끈 내뱉은 혼잣말은 아무도 없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끝내 자신을 향한 핑계로 곤두박질쳤다.

“그를 막기 위해 찾아가는 거다.”

혹시 그 남자가 미케나의 백성을 학살할까 봐. 나아가 우리가 지난 세월 기를 쓰고 이룩해 놓은 모든 희망을 무너뜨려 버릴까 봐. 그렇게 된다면 해시트 홀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뜻을 함께해 온 이들까지 휘말리고 말 테니까. 단연코 가장 가까운 곁을 내어준 라피난이 위험해질까 봐.

모두 진심이다. 맹세하라면 하겠다.

하지만.

“…….”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허망한 눈빛이었다.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라피난은 화내지 않았다. 마지못해 물러서는 그의 얼굴은 언젠가 이레이의 눈에 비친 자신의 표정과 꼭 닮아 있었다. 감추지 못할 것을 억지로 감추려다가 처참히 실패한 사람의 말로였다. 해시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너까지 쓸쓸하게 만들었구나.”

어느새 그녀가 다시 쓸쓸한 사람이 되어 버렸음을 속절없이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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