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50화 (49/104)

50화.

“윽, 뭐야!”

“네, 네놈이야말로 뭐야! 갑자기 놀랐잖아!”

해시트가 삿대질을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적반하장이다. 이레이는 진심으로 어이없어했다.

“내가 이러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뭘 새삼.”

“그러니까 작작 좀 하라고! 사람 짜증 나게 진짜!”

“너 오늘따라 말이 심하다?”

“네 행동이 심한 건 생각 안 하나?”

“행동이 심한 건 너지. 그 빨래를 몽땅 나한테 떠넘기고 갔잖아.”

얻어맞은 코를 쥐고 눈을 끔뻑거리는 이레이나 흡사 벌레를 내쫓듯 파드득 손을 휘저어 대는 해시트나 서로의 사정을 안 봐주긴 마찬가지였다.

이레이는 황당했겠지만, 해시트는 무서웠다. 조금 전 그의 눈을 통해 본 자신의 표정을 평생 잊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러나 볼썽사납게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밖엔 마땅히 방법이 없었다. 그랬으니 이제부터 꼬리에 꼬리는 무는 말다툼은 속마음을 숨기려는 해시트의 위악에 불과하다.

“빨래 좀 한 게 분하냐? 어차피 네 것도 섞여 있었을 거 아니야!”

“솔직히 나 몰래 내 대원에게 근위대장 면접 보라고 권유한 게 더 분하긴 해.”

“가당치도 않다. 엄밀히 따지면 쥰은 네 대원이기 전에 내 백성이야.”

“오, 그럼 나는 네 백성이 아니라서 탑 꼭대기 골방에 가둬 놓고 모른 체했냐?”

“이 미친놈이……. 거기 왜 갇혀 있었는지는 기억에서 지워 버렸냐?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제대로 갇혀 있지도 않았잖아! 밤마다 나돌아 다니면서 셋이나 더 죽인 주제에!”

“그래, 말 잘 꺼냈다. 내가 왜 나돌아 다니면서 셋이나 더 죽였을까? 거기서 들락거리는 게 나라고 밥 먹듯 쉬웠을 것 같아? 그런데 네가 내 경고 무시하고 결혼,”

“가, 감히 누구한테 협박이야? 죽을래?”

“왜 말을 돌려. 설마 아직도 국혼에 미련이 남았나?”

열띤 실랑이 중에 이레이의 입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그러고는 바로 피어오르는 엷은 조소에 해시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너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

분명 지금이 라피난과의 혼인 계획을 밝힐 절호의 기회였다. 이 순간에도 라피난의 지휘 아래 은밀하게 혼례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목구멍으로 진실이 쥐어짜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이레이를 기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시트는 그에게 질문으로 공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레이가 흔쾌히 대답한다.

“가위바위보.”

“……뭐?”

자칫 절망하던 해시트의 입술이 망연히 벌어졌다. 이레이는 언제 정색했었냐는 양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고 싶다며. 해서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로 하지.”

“누가 하고 싶댔는데? 이 몸이?”

“간단해. 이렇게 주먹으로 가위, 바위, 보자기 모양을 만들어서 내밀면 된다.”

“싫어. 안 해. 꺼져.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내가 모를 것 같나?”

“안 내면 지는 거야.”

“안 한다니까?”

“셋 하면 내는 거다.”

“야!”

급기야 이레이가 주먹을 머리 위로 올리고 하나, 둘, 셋,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셋 하면 내야 해. 안 내면 지는 게 규칙이야. 막무가내로 당부하며 그의 주먹이 허공을 내지르자 마음이 급해진 해시트도 반박을 접어 두고 아무렇게나 주먹을 휘둘렀다.

휙!

가위인지 바위인지, 생전 그런 비슷한 모양을 잡아 본 경험이 없으니 제일 만만한 보자기를 낼 수밖에. 그런데 보자기가 뭐지? 여전히 어리둥절한 그녀에게 대뜸 이레이가 통보했다.

“네가 졌다.”

“왜?”

그에게 완벽하게 휘말린 해시트가 냅다 되물었다.

손바닥을 활짝 편 해시트와 달리 이레이는 주먹을 둥그렇게 말아 쥔 상태였다. 승부 방식에 대해 쥰에게 대충 설명을 듣긴 했지만, 승패가 갈리는 원리까지는 미처 듣지 못한 게 이제 와서 아쉽다. 이럴 줄 알았으면 쥰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어 둘걸.

“이거 봐. 내 주먹이 네 손바닥을 깔아뭉갤 수 있잖아.”

이레이가 해시트의 손바닥에 제 주먹을 콩콩 들이받으며 말했다. 아주 천연덕스럽다. 해시트는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그, 그런가?”

“그럼.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당연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긴 한데…….”

솔직히 안 그러는 게 더 이상한 놈인데……. 이레이는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일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소원은 나중에 빌러 오마.”

그러고는 해시트가 진실을 추궁하기 전에 그대로 왔던 길을 돌아 나가 버린다. 나갈 때도 멀쩡한 출입문 대신 창문으로 훌쩍 뛰어내렸다는 뜻이다.

“허.”

짧은 헛숨을 찬 해시트가 여태 보자기를 내밀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뺨을 감싸 쥐었다. 이레이가 건드리고 간 볼이 통증 없이 화끈거렸다.

소원은 무슨.

“누가 들어줄까 봐?”

나중이 아니라 나중의 나중에도 안 될 말이다.

따끈따끈, 볼을 달군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잠시 후 라피난이 해독제를 들고 찾아왔을 때야 그녀는 부랴부랴 시치미를 떼고 자리에 앉았다.

*

으레 ‘나중’이라고 한다면 최소 하루 정도는 지난 다음을 상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결코 사건 당일, 그것도 모두가 잠든 깊은 야심한 밤, 심지어 당사자조차 모르게 진행된다는 것은 범주에서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경우다.

그 범주 바깥의 일이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으, 으음…….”

해시트는 비몽사몽으로 눈을 떴다. 잠결에 몸이 흔들리는 느낌이 났다. 그러나 불편함보다는 제법 안온한 것이, 꼭 누군가에게 안긴 것처럼 포근했다.

“아, 이제 깼나.”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레이의 얼굴이었다. 달빛을 받아 파르라니 빛나는 고운 피부, 다정하고 침착한 눈빛이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잘 어울렸다. 그의 뒤로 스치는 무성한 나무숲까지.

“…….”

이게 무슨 상황이지? 가늠해 보던 해시트가 멍하니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는 이레이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서늘한 체온이 실감나는 것과는 별개로 역시 현실감이 없었다. 이거 꿈인가. 그래, 꿈인가 보다. 해시트가 꿈속에서 중얼거렸다.

“매 악몽만 꾸더니 웬일로.”

“음? 악몽?”

“아니, 이게 악몽이란 소리는 아니야.”

서둘러 해명한다. 그런 건 절대로 아니라고.

“이건……, 좋은 꿈이야.”

“…….”

“드물게 좋은 꿈.”

꿈에서만큼은 이레이를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작은 이기심이었다. 기왕 이기적으로 군 김에 아예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해스?”

이레이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이 자식은 꿈에서도 어영부영 넘어가 주질 않는다. 해시트는 눈을 감고서 조용히 속삭였다.

“내 꿈이니까 네놈은 닥치고 있어라.”

“어……, 그래. 그러지 뭐.”

잠깐 머뭇대던 이레이도 결국엔 그녀의 명령을 따라 주었다.

말이 달리는 속력이 조금씩 느려졌다. 덕분에 팔뚝을 스치는 밤바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레이의 품에 안긴 채 슬쩍 하늘로 눈동자를 굴리면, 무수한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아름답게 빛났다.

이 꿈의 종착지가 어디일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온몸에 힘을 빼고 기대어 본 이레이의 품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정말이지 한여름 밤의 꿈이 따로 없었다.

자박자박 전해지는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불현듯 입가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 미소가 우뚝 굳어 버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레이의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자박자박 뛰던 것이 두근두근 울리더니 급기야 쿵쿵 두방망이질 친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우친 해시트가 갓 물 밖으로 건져진 생선처럼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망할! 이거 꿈 아니잖아!”

“이제 알았어?”

가벼운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재미있어 죽겠단다. 해시트는 혀 깨물고 까무러치고 싶었다. 이레이가 한 마디만 더 이죽거렸으면 응당 그러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금방 평소 말투로 돌아가서 대충이나마 어떻게 된 영문인지 흘렸다.

“웬일로 푹 자고 있더군. 여기까지 데리고 나오는데도 한 번도 안 깨던데.”

그거야 요즘 라피난이 달여다 바치는 해독제 때문이다. 라피난은 불면증 치료까지 되니 일석이조라면서 좋아했지만, 이 꼴을 본다면 그렇게 말했던 제 입을 찢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봐야 지금 해시트만큼은 아닐 거다.

“이, 너 이 새끼……!”

해시트가 욕설을 짓씹으며 그를 삿대질했다. 황당함과 분노가 한데 뒤엉킨 행동이었다. 아까 한 말 취소. 이건 악몽이다. 절대로 좋은 꿈이 될 수 없었다.

그래도 꿈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죽을 만치 창피하기 때문이다. 이레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굳이 그 즐거움의 원인을 밝힌다면 손수 죽이고 말 거다―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내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너랑 일출이 보고 싶어졌어.”

소원? 일출? 당최 이 미친 자가 뭐라는 것인지 이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망한 해시트의 표정을 다 보아 놓고도 이레이는 아무런 부연을 안 했다. 캐묻지 않으면 이대로 쭉 목적지까지 달릴 게 분명했으므로,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질문을 연달았다.

“어디로 간다는 거냐. 갑자기 웬 일출! 아, 아니. 그래서 지금 여긴 어딘데?”

“어디긴.”

스윽, 이레이의 손가락이 둘러싼 수풀 끝을 가리켰다.

“일출은 당연히 바다에서 봐야지.”

그 마침표가 어찌나 칼같이 떨어지던지, 해시트는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지끈.

“악! 이 또라이가!”

우악스레 이레이의 멱살을 낚아챈 그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당장 말 돌려! 돌려! 돌리지 못해?!”

비록 말본새가 좀 거칠었을지언정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확신해 본다. 아니, 여러 사정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면 아주 우아한 대처였다.

미케나의 수도는 대륙의 최중심에 터를 잡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바다라고 해 봐야 말을 타고 최소한 한 달은 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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