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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49화 (48/104)

49화.

해시트에게 줄 사탕을 꺼내기 위해 옷자락을 뒤적거리던 라피난의 움직임이 멈췄다.

과연 천하의 라피난 카일에게도 놀랄 만한 사건이었나 보다. 해시트가 못내 뿌듯함을 감추는데, 라피난이 그녀와 눈을 맞추더니 조심스레 질문했다.

“송구하지만 폐하, 혹시 과도하게 집착하는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시는 편입니까?”

“……그 밑도 끝도 없는 개소리는 뭐지?”

“조금 전 제가 취한 태도의 어떤 점에서 청혼을 받아들이실 만큼의 매력을 느끼셨는지 짐작이 안 가서요. 짚어 주시면 앞으로 참고하겠습니다.”

요컨대 지금부터라도 이레이 린의 언행―과도한 집착을 비롯한 각종 폭력적 성향―을 분석해서 그대로 시늉하는 게 좋을지 해시트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누가 친구 사이 아니랄까 봐, 그놈이나 이놈이나 제정신인 놈이 하나 없다. 해시트는 빈 찻잔을 라피난에게 집어 던져 버렸다.

“흰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사탕이나 내놔.”

“죄송합니다. 사탕은 여기 있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도를 고친 라피난이 즉각 사탕을 내밀었다. 해시트가 집어 던진 찻잔은 진작 안전하게 낚아채 쟁반으로 돌려 둔 뒤였다.

정말이지 열한 살에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차가운 남자였다.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심지어 포장이 잘 뜯어지지 않는 사탕 취향까지 여전했으니, 이 정도면 해시트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껍질을 까 주는 게 귀찮아서 그냥 주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반면 해시트는 어릴 때와는 달리 능숙하게 사탕 포장지를 까서 한입에 던져 넣는다.

“그냥 깨달았을 뿐이야. 네게 매력 따위를 느껴서가 아니고.”

“무엇을요.”

라피난이 뚜렷한 감흥 없이 되물었다. 해시트는 입 안에 퍼지는 단맛을 핥으며 생각한다. 굳이 라피난의 매력을 꼽자면, 바로 이런 점이라고. 이런 일관됨. 한결같은 냉정함. 이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어 일러 줄 날은 아마 평생 오지 않을 테지만…….

그녀가 말했다.

“네게 속셈이 다 까발려진 마당에 괜한 시간 낭비를 해 봤자, 밟고 지나가야 하는 시체의 숫자만 많아지겠지.”

“…….”

“그렇겠지.”

그리고 헛된 기대를 품게 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이대로 어영부영 이레이를 계속 곁에 두겠다는 쓸모없는 욕심 같은 것.

갑자기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해시트의 입 안에서 사탕이 이리저리 굴러가는 소리만 울렸다.

달그락, 치아에 살짝 부딪힐 때마다 사탕 표면이 빠르게 녹아내린다. 해시트는 포장을 뜯기 전부터 이 사탕이 무슨 맛을 낼지 알고 있었다. 단맛. 다 아는데도 굳이 포장을 까서 입 안에 던져 넣었다. 혀가 녹아내릴 정도로 단맛. 역시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혀에 놓고 굴리는 족족 퍼져 가는 달콤함, 그건 일시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 그게 진짜 행복인지 가짜 행복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다만 지금은 그다지 기분이 좋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사탕을 살살 녹여 먹다 못해 아예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그렇게 드시면 치아가 상합니다, 라피난이 잔소리를 할 낌새를 보이자 더럭 인상을 찌푸렸다.

“앞으로는 아침에 네가 깨우러 들어와라. 시종들한테 자는 모습 보이기 싫어.”

“……알겠습니다.”

“내가 아무리 곤히 자고 있어도 그냥 깨워. 봐주지 말고.”

연달아 짜증을 부리는 해시트 앞에서 라피난은 묵묵히 쟁반을 챙겨 들었다. 그대로 예를 갖춘 뒤 집무실을 빠져나갈 것 같더니 별안간 그녀를 돌아봤다.

“저도 잠시 거짓말의 유혹에 휩싸였습니다. 하필 이런 상황이라.”

“응? 뭐가?”

해시트가 무심코 그의 얼굴을 좇았다. 그러나 라피난은 그녀와 다시 눈을 맞추지 않았다. 천천히 좁아지는 집무실 문틈으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책상 위의 꽃, 제가 가져다 둔 거 아닙니다.”

“…….”

“일찍 주무십시오.”

달칵. 문이 닫혔다.

“…….”

혼자가 된 해시트는 고작 책상을 바라보는 고갯짓이 천 근의 짐을 옮기는 것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아침부터 쟤 집무실까지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거든?”

빈손이 아니게 왔다가 빈손이 되어 돌아갔을 누군가를 생각하면 천 근이 아니고 만 근도 부족했다. 그 마음이 언젠가 제 어깨에 올려 둔 신념의 무게와 비슷해질까 봐 일찍이 두려워지던 날이 많았다. 그런 날마다 실망했다. 끔찍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기로 결심해 놓고 자꾸만 인간처럼 욕망하는 스스로가 환멸스러웠다.

“……이건 처음 보는 꽃인데.”

그런데도 손을 뻗어 책상 위에 놓인 새하얀 꽃다발을 집어 들면서 그녀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산산이 부서진 사탕의 단맛이 아직도 입 안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단맛은 일시적으로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고, 덕분에 그녀는 오늘도 핑계를 찾는 데 성공했다.

달콤하다.

해시트는 얼마 남지 않은 사탕이 다 녹아 사라질 때까지 오도카니 그 자리에 서서 꽃다발의 향기를 맡았다.

*

이틀이면 시들 줄 알았던 꽃은 사흘 뒤에도 줄기가 생생했다. 닷새면 수명을 다하겠지 했으나 엿새까지도 요란한 향기를 자랑했다.

눈치 없는 시종들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그런가 보다. 화병에 꽂아 두고 매일매일 물을 갈아 주니 이틀 갈 수명이 일주일을 사는 것도 썩 대단한 기적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부지런한 시종을 둔 덕분에 이레이만 날을 잡고 생색을 부렸다.

“마음에 들어?”

정확히 일주일 만에 다시 집무실로 쳐들어온 그는 뿌듯한 얼굴로 해시트의 책상 근처를 얼쩡거렸다.

출입문은 대체 뭘로 보는 건지 굳이 창을 타고 넘어왔다. 짐작건대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알현했다간 시종들 보는 앞에서 해시트에게 예를 갖춰야 하는 게 싫어서 그랬을 터다. 과연 유치한 심보로는 제국에서 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저기, 방금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만.”

지치지도 않고 칭찬을 조른다. 해시트는 마지못해 입술을 뗐다.

“처음 보는 꽃인데 어디서 꺾어 왔나?”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협곡에서. 이름은 치자꽃이야.”

“이름 이상해.”

오늘따라 검토할 보고서가 엄청나게 많았다. 겸사겸사 인상을 찌푸렸더니 이레이가 책상에 걸터앉아 그녀의 미간을 살짝 문질러 주었다.

“그럼 그냥 가드니아라고 불러. 그게 그거니까.”

“부를 것까지야.”

홱, 해시트의 고개가 뒤로 빠졌다. 눈에 띄게 그의 손길을 피하는 행동에 이레이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오자마자 쫓겨나긴 싫은지 꾹 참아 넘기는 얼굴이 야속함에 젖어 있었다.

“이봐. 얼굴이라도 보고 박대해 줄래?”

그러나 해시트도 일부러 그를 박대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받쳐 주지 않으니 자연히 매가리가 없어졌을 뿐. 라피난과 혼인하기로 했다고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초조하게 눈치를 쟀지만, 이대로라면 영원히 말하지 못할 게 확실했다. 결국 그녀는 서류에 코를 박아 넣어 표정을 숨겼다.

“심심하면 소대 애들이랑 가위바위보인지 뭔지 승부하고 놀아라. 난 바빠.”

“오, 그거 걔네들만 알려 줘서 질투 나? 너도 알려 줄게.”

“무엄하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 일할 거다, 꺼져.”

“그런데 여기서 불장난이라도 했나? 양탄자가 탔군.”

책상에서 훌쩍 뛰어내린 이레이가 그을린 양탄자 끄트머리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나가라는 소리를 들은 체도 안 하는 걸 보니 사람을 불러 끌어내 봤자 유혈 사태만 벌어질 징조다. 해시트는 짜증을 삼키며 둘러댔다.

“라피난이 램프를 엎질러서.”

얼마 전 서책이 불탄 자리다. 흔치 않은 라피난의 실책에 즐거워할 줄로만 알았던 이레이는 의외로 해시트의 정곡을 찔렀다.

“웬일로 새 걸로 안 갈았지?”

“그냥. 별로 안 거슬리길래.”

완전히 거짓말이다.

매일 아침 집무실에 들어올 때마다 제일 먼저 그을린 자리를 눈에 담는걸. 거슬리지 않아서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그날 보고 들은 일을 잊지 않으려고 여태 내버려 둔 바였다.

드래곤이니 용이니 환상 속의 잔악한 짐승이 실제로 그녀 곁에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심지어 머잖아 그 짐승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면…….

그때 불쑥, 들고 있던 서류가 젖혀지며 이레이의 얼굴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거의 코끝이 부딪힐 거리에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는 남자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했다.

“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설마 라피난과 결혼하려는 속셈을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긴장해서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쥔 순간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시무룩한 중얼거림에 주먹 안이 순식간에 축축해졌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

“…….”

“얼굴 보고 예뻐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박대해 달랬는데, 그것도 못 해 주겠다니 서운하군.”

나라고 뭐 너한테 못된 소리 들으면서 흥분하는 변태인 줄 알아? 이레이가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움푹 파이는 한쪽 뺨의 볼우물과 부드러운 입술 호선이 해시트의 눈에 천천히 아로새겨졌다. 너무 가깝다, 너무.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 입술을 피해 급히 시선을 올리려다 새파란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만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푸른빛이 꼭 바다 같았다. 정말로 깊은 바다에 빠진 기분이었다.

서책이 일러 주길 드래곤이 사는 섬은 인간의 마지막 땅에서 70일을 항해해야 다다를 수 있다던데, 그 여정에 이토록 아름다운 푸른 물길을 헤칠까 싶었다.

그토록 황홀한 여정이라…… 속수무책으로 상상하다가 문득, 해시트는 이레이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표정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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