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21화 (21/104)

21화.

“사지가 부러졌다고 들었는데 벌써 움직여도 되나?”

“음……. 안 되면 부축해 주게?”

“말대답은. 차라리 그 혀를 좀 다치지 그랬나.”

“그러게. 그럼 도와주는 방법이 좀 더 화끈했을 텐데. 그건 좀 아쉽군.”

“너 진짜 죽는다.”

“언제는 살라며?”

이레이가 뻔뻔하게 투덜거렸다.

“됐다. 아직 성년식도 안 치른 황태자 전하께 내가 과한 걸 바랐군.”

그는 해시트가 치러야 할 성년식이 일반적인 성년의 의미와는 다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듯했다. 황태자로서의 성년식이야 응당 황제가 될 수 있는 나이를 뜻하는 바, 성인 남녀의 보편적인 사랑놀음을 영위할 수 있는 나이는 벌써 옛날에 지났다는 거다. 다행히 그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게 왜 다행이지?

지레 놀란 해시트가 황급히 아무 말이나 떠들어 댔다.

“내가 유신론자였다면 네가 지옥에 떨어지길 매일 기도했을 거야. 이 망할 자식아.”

“그래? 참고로 그 망할 자식 이제 옷 다 갈아입어서 얼굴 구경해도 되는데.”

“…….”

그렇다니 또 빙글 반 바퀴를 도는 수밖에 없다. 애초에 그러려고 온 거니까 딱히 자존심이 상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이 또한 그녀가 그에게 베푼 아량이었다고 해 두자.

*

이레이의 부러진 뼈가 완전히 제자리를 찾아갈 무렵이었다.

“해스. 네가 준 칼은 내가 계속 지녀도 되나?”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해시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줬던 걸 도로 뺏으리? 그런 치사한 주군이 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이레이는 그녀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빙긋 미소로 화답했다.

“고마워.”

그가 감사를 표하다니 신기한 일이다.

“기념할 게 필요했거든.”

“기념?”

“응.”

그러나 무엇에 대한 기념인지는 생략하고 만다. 해시트도 굳이 추궁하진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그렇게 말하던 이레이의 얼굴을 빤히 구경했다. 흔한 수염 자국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가 오늘따라 도무지 또래의 사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슬쩍 눈가를 휘어 짓는 미소는 지나치게 어른스러웠다. 곧 그에게서 눈길을 떼어 내고 말했다.

“그만 떠들고 재활치료에나 전념해. 겨우 백인 소대이긴 하지만 대장 임명식 땐 멀쩡한 꼴로 등장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이레이의 백인 소대 대장 임명식이 벌써 다음 주다.

마침 좋은 핑곗거리였다. 해시트는 냉큼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 얼굴을 이 이상 들여다보고 있다간 이상한 질문을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너는 어디에서 왔어? 그런, 정말이지 안 묻느니만 못한 질문을.

*

어쨌든 그와 함께 가기로 한 이상 감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했다. 매번 신원 불명의 용병이라고 소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도 저도 다 싫다고 박박 우겨 대는 어느 개놈 자식 덕분에 설득의 길이 매우 험난하였고, 결국 해시트와 라피난과 이레이 세 사람이 합의를 본 지점은 작은 백인 소대의 대장이었다. 겸사겸사 거의 읍소한 끝에 소박한 기사 작위를 함께 내릴 수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가장 고생한 이는 당연하게도 라피난이었다. 그럴싸한 직책을 찾아 물려주면 씹는 척도 안 하고 퉤 뱉어 버리는 이레이를 보면서 얼마나 눈으로 욕을 하던지. 이레이가 환자만 아니었으면 진작 함께 대련실에 들어가서 치고받고 싸우고도 남았을 터다.

그래서인지 라피난은 이레이의 대장직 임명 직후에 그를 찾아가 사소한 복수를 실행하기도 했다.

와르르, 서른일곱 권에 달하는 두꺼운 서책을 수레째 끌고 와 이레이의 처소에 쏟아 내고는.

“이 나라 역사책이다. 꼼꼼히 공부하도록. 전하를 곁에서 모시려면 이 정도는 알아 둬야지.”

통보했는데, 당연히 이레이는 입술을 까뒤집고 반항했다.

“뭐래. 네가 내 주군이냐?”

“주군은 아니고 상사. 그것도 다섯 계급은 거뜬히 상회하지. 공부하도록. 시험은 삼 주 뒤다.”

“오, 그런 높으신 분께서 특정 부하를 골라 학대하는 건 군법에 어긋나지 않나?”

군인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군법을 운운하고 있다. 라피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안 어긋나. 그래서 너를 포함한 모든 소대 대장들을 모아 놓고 시험 칠 거니까.”

“뭐?”

“오늘 관련 보고서 통과됐고, 넌 앞으로 일 년에 두 번씩 꼬박꼬박 시험을 치르게 될 거다.”

“싫어. 차라리 사표를 쓰고 말지.”

“좋을 대로. 불명예 전역은 곧 추방이라는 것만 알아 두도록.”

“내가 사표를 쓴다는데 무슨 불명예 전역이야?”

“입대 후 일 년이 지나기 전에 전역하면 이유를 막론하고 불명예 전역이다. 몰랐나? 그것도 군법에 나와 있는데 모르는 걸 보니,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군.”

요컨대 그는 이레이가 정식 군인이 되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는 것이다. 순간 깊어진 라피난의 미소에 이레이는 대놓고 황당해했다.

“이런 치사한 놈이 근위대장이라니…….”

“그것도 뭐, 좋을 대로 생각해라. 그럼 이만.”

“뭐? 이봐! 라피난!”

끝내 이레이가 억울함에 미치고 팔짝 뛰거나 말거나, 라피난은 서른일곱 권의 서책이 담긴 수레를 이레이의 집 앞에 버려두고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삼 주 뒤 시험 결과는 어땠냐면…… 낙제점이었다.

추가 시험을 두 번이나 더 봤지만 또 낙제였다. 그러다가 세 번째 추가 시험에서는 황당하게도 만점으로 통과했다.

바뀐 군법상 세 번째 추가 시험에서도 낙제였다면 영락없이 불명예 전역이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이레이는 일부러 라피난의 속을 시커멓게 썩이려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틴 게 틀림없었다.

더불어 이레이가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해시트로부터 ‘그러게 왜 그런 쓸데없는 시험을 만들어서 상황을 곤란하게 만드느냐’고 타박을 듣게 한 건 덤이었다.

물론 해시트는 이레이에게도 똑같이 성질을 부렸다. 이 새끼가 눈깔이 해태라서 말과 사슴을 구분 못 하는 줄 알았더니 그냥 태생이 무식해 빠진 놈이었다는 둥, 고상한 말투로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듯 아주 약간의 신분 변화가 있었을 뿐, 세 사람의 관계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와중에 딱 한 가지 도드라지는 변화를 꼽자면 전장에 임할 때의 이레이의 각오였다.

“첫째, 적당히 날뛴다. 둘째, 사람 목을 잘라서 무기로 써먹지 않는다. 셋째, 혼자서 너무 많이 죽였을 땐 소대원들에게 공을 돌린다. 넷째, 영웅 같은 소리는 절대로 들어선 안 된다. 다섯째…….”

“좋아. 그만하면 됐다.”

해시트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압수해 두었던 이레이의 투구를 돌려주었다.

그가 전쟁에서 계속 큰 공을 세워 버린다면 그 핑계로 계속 황실 행사에 끌려다닐 게 뻔했다. 그리고 분명 다음번엔 뼈도 못 추릴 것이다.

물론, 그 대책이랍시고 전쟁터에서 살살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자니 해시트 또한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태생이 흉포한 놈이 좀 덜 포악하게 굴어 봤자 어차피 튼튼하기로는 따라갈 자가 없었고, 미케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레이의 명성이 나날이 부풀려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마음껏 날뛰라고 풀어 두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전쟁이라도 빨리 끝날 것을…….

매번 피 칠갑을 하고도 불만족스러워하는 이레이를 볼 때마다 해시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찜찜함은 해시트의 몫이요, 답답함은 이레이의 것이었으며, 오직 라피난만이 그 사이에서 희생과 결실의 무게를 저울질하기 바빴다.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출정길에 오른 차였다. 돌려받은 투구를 옆구리에 낀 이레이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확장할 영토도 없겠다 싶던 차에 내란이라니 황당하군. 어디 쉴 틈이 있어야지.”

“투덜거리지 마라. 안 따라와도 된다고 했는데 굳이 따라온 건 네놈이잖아.”

“그야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그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돌연 말을 돌렸다.

“어, 이제 반년만 있으면 네 생일이네?”

“그건 왜?”

“왜긴.”

모르는 척했지만 사실 해시트도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래, 이번 생일은 특별하다. 황태자 해시트의 성년식을 치러야 하니까. 이미 제국에선 그녀의 성년식 준비로 수많은 사람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뭐 갖고 싶은 선물은 없나?”

“아서라. 또 어느 짐승을 유괴해 오려고.”

해시트는 가차 없이 그의 호의를 잘라 냈다. 이레이가 짐작하기엔 일 년 전 해시트의 생일에 그가 선물로 주었던 새끼 사막여우의 원한이 아직까지 건재한 듯하였다. 정답이었다.

당연하고말고. 매일 밤 엄마를 찾아 구슬피 우는 어린 짐승을 보다 못한 나머지 드넓은 사막을 싹싹 뒤져 그 애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었던 생고생은 겪어 본 이만 알았다.

다시 말해 이레이에겐 설명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테니, 그녀는 아예 라피난에게 시선을 돌려 화제를 전환했다.

“그건 그렇고 라피난. 몰스페로네 둘째 딸이 네 앞으로 선물을 보냈다면서? 성 안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떻게 된 거냐?”

“헛소문입니다.”

“아니던데. 그 콧대 높기로 유명한 레이디가 친히 네 이름을 적어 문지기에게 주고 갔다고, 대신들까지 신이 나서 회의실에서 쑥덕거리던데 설마 헛소문일 리가 있나.”

“귀환하면 문지기의 목을 치겠습니다,”

“안 돼.”

“네.”

“자, 이제 부끄러워하지 말고 얘기해 봐. 명령이다.”

라피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시트는 명백하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부하의 사생활을 캐묻는 주군이라니, 누구라도 당황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설마 천하의 라피난 카일이 그럴 리는 없었다. 오히려 라피난의 옆에 있던 이레이가 왜인지 헛기침을 연달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라피난은 손톱만큼도 민망해하거나 겸연쩍은 기색 없이 곧바로 사실관계를 정정해 주었다.

“몰스페로 양이 보낸 선물의 수취인은 제가 아니라 이레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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