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천하 태평하기가 참으로 일관적이었다. 일관적으로 한 대 치고 싶게 만들었다.
고개 숙인 해시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겨우 평정을 되찾을락 말락, 그러다 울컥 화가 북받쳐서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문다.
“네놈이 사형당하는 걸 막으려고 내가 지난 엿새 동안 어떤 수치를 겪었는지 아나? 부패한 신관에게 뒷돈을 쥐여 주고 가짜 예언을 하게 만들었다. 단두대에 이방인을 올리면 백성들에게 역병이 돌 것이라고.”
그녀가 숨죽여 목소리를 짓씹었다.
“어떠냐. 속이 시원해? 너 따위 거 때문에 내가 이 몸의 백성들을 담보로 거짓말을 했어. 수치스러운 일이지. 그런데 나는 지금 부끄럽기보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구나. 결국 실패했거든. 폐하께서 네 목을 자르지 않는 대신에 너를 때려죽이기로 결정하셨다.”
분노로 위장한 절망에 찬 해시트의 뒤에서 라피난이 망을 보고 있었다. 황태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구경하고자 기웃대는 간수들을 가차 없이 쫓아내길 반복한다. 그야 이 구석진 탑 꼭대기까지 황태자 전하께서 다시 납신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그들 딴에는 나름 간절했을 터다.
이레이는 해시트의 등 뒤를 한 차례 흘끔거린 뒤 해시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창살 하나를 슬며시 움켜쥐고 입을 연다.
“너는 참 이상해. 항상 말과 행동이 다르단 말이지.”
“닥쳐. 그 입, 한 번만 더 나불거리면 지금 당장 죽여 버릴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틈만 나면 죽이네 마네, 목을 자르겠다느니 사지를 찢겠다느니, 사람 목숨을 개미보다 못하게 취급하면서. 막상 내가 죽게 생겼다니까 절망하고 있어.”
“…….”
“아니면 그러는 척하는 건가?”
한순간 냉정해진 눈빛이 단숨에 해시트를 훑어 내렸다. 계속 그가 말했다.
“정적을 제거하는 일에 혹시 무고한 전쟁포로가 휘말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출신도 불분명한 천것이 고귀하신 황제 폐하에게 죽임을 당하게 생겼기로서니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못하잖아. 심지어 네 신념마저 꺾어 가면서 신관에게 뇌물까지 주었군. 왜지? 해스.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잖아. 나는 네 백성도 아닌데.”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단조로운 말투였다. 당장 죽게 생긴 게 그 자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해시트는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그래서 불만이냐?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단지 궁금할 뿐이다. 그날 내가 사냥한 사슴이 과연 날 죽게 만들 가치가 있었는지.”
“네놈이 사냥한 건 사슴이 아니라 말이었잖아.”
“상관없어, 어차피 똑같은걸. 내가 말이 아니라 진짜 사슴을 잡아갔대도 난 여기 갇혀 있었을 거다. 감히 황제를 제치고 대회에서 승리한 죄로.”
“달라. 결과는 같았을지 몰라도 엄연히.”
“뭐가 다른데?”
“뭐가 다르긴!”
버럭, 냉소하는 방법조차 잊은 채 그녀가 소리쳤다. 애저녁에 바닥난 인내심을 한 번 더 긁어모으려 했지만 실패였다.
“네가 잡아 온 게 진짜 사슴이었다면 나는 적어도 너를 살릴 수 있었겠지. 고작 사냥대회에서 승리한 죄가, 아바마마께서 끔찍이 아끼시는 말을 훔쳐 달아난 죄와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나?”
평소보다 까랑까랑해진 목소리가 탑 꼭대기에 날카롭게 메아리쳤다. 라피난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속삭였다.
“전하. 듣는 귀가 많습니다.”
“넌 저리 가 있어. 아직 이자에게 할 얘기가 남았다.”
질끈 눈을 감은 해시트가 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라피난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지못해 걸음을 떼어 내며 이레이를 노려보는 시선에는 경멸과 살기가 형형했다. 차라리 사냥터에서 즉결 처형해 버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가득이었다. 이레이는 씨익 뭉뚱그린 미소로 그를 약 올렸다.
해시트가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낸 것은 라피난의 그림자가 완전히 복도 밖으로 사라진 직후였다. 그 단검은 무엇이냐 이레이가 질문할 틈을 주지 않고, 그녀는 그것을 빠르게 창살 틈으로 밀어 넣은 뒤 말했다.
“내일이야.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사지가 부러져 죽는 게 싫다면 그걸로 자결하든지, 아니면 탈옥하든지.”
“…….”
“웬만하면 탈옥해라. 알겠나?”
단검을 받아 드는 이레이의 표정은 뭐랄까,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었다.
놀랐다거나 성가시다거나, 감동과도 딱히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쩌면 황당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기야 겨우 단검 하나로 탑 꼭대기에 있는 감옥을 탈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아니. 불가능할 테니까.
그런데도 이 남자라면 왠지 가능할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이 해시트로 하여금 이런 비이성적인 행동을 저지르게끔 만들었다. 그에 비해 결론은 다소 이성적이었다.
“제국을 떠나. 그리고 다시는 얼씬거리지 마.”
이래서 사람은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살아 돌아오면 뭘 해 줄 건데?”
“아량을 베풀어 죽이지는 않으마.”
봐라. 자신만만하게 약속해 버린 바람에 결국 이렇게 된 것을.
그러나 겨우 이만큼이 해시트가 그에게 베풀 수 있는 아량의 전부라는 게 조금 서글플 따름이었다.
*
아침이 밝았다.
이레이가 아흔아홉 대의 매질을 받아야 하는 날이 오고 만 것이다. 쇠몽둥이로 열 대쯤 맞으면 열에 아홉은 등뼈가 부러져 즉사하거나 불구가 됐다. 아흔아홉 대라는 숫자는 기어코 시체를 매질하리라는 엄포나 다름없었다.
“라피난.”
“예.”
“어제 보니 감옥 탑의 간수들 대우가 형편없던데, 감옥 담당자더러 삼 년 치 재정 보고서 작성해서 가져오라고 해라. 기한은 내일까지.”
“지금 내일까지라고 하셨습니까?”
“으응. 혹시 시간이 촉박하다고 항의한다면 거기 간수들에게 할당된 식사 시간이 십오 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주도록. 그 아흔여섯 배나 시간을 줬는데 못하면 말이 안 되지 않을까?”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해시트는 일부러 이레이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성실하게 업무를 봤다.
그러나 내심 걱정되는 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그녀에게 충성스러운 라피난이라고는 하지만, 해시트가 이레이의 탈옥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미리 대비해 두지 못했다.
만약 라피난이, 언젠가 그녀가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라 오해한다면 어떡하지? 그럼 정말 큰일이다. 그런 야트막한 틈새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이 결국엔 성벽을 무너뜨리고 만다는 것을 해시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면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아니,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런데 꼭 설명해야 할 일인가. 어차피 이제 제국을 떠났을 놈인데. 다시는 볼 일 없는데.
볼 수도 없는데.
언제부터인가 해시트는 그런 생각만을 곱씹으며 기계적으로 펜대를 놀리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에서 한낮까지 무르익었다. 라피난은 아침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넌지시 그녀를 불렀다.
“전하, 이레이 린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
펜대를 쥔 해시트의 손이 흠칫 멈췄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지금쯤 그의 탈옥 소식으로 온 성이 시끄러울 터였다. 해시트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느라 나절 내내 집무실에 처박혀 한 발자국도 떼지 않았었다.
혹시 라피난이 ‘소식 들으셨습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지금처럼 라피난의 입으로 소식을 전해 듣는 게 낫다.
“그가 매질을 당하고도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뭐?”
휙, 해시트가 고개를 쳐들었다.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라피난은 그녀의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이어 대수롭지 않게 부연했다.
“사지의 뼈가 부러지고 피를 한 바가지 토하긴 했지만 어떻게 목숨은 붙어 있다고 합니다. 대개 도중에 몸부림을 쳐서 두개골이 으스러지기도 하던데, 그것도 어찌 잘 피해 간 모양입니다. 머리를 맞지 않았으니 정신이 이상해질 염려도 없고, 대기하고 있던 장의사는 빈 관짝과 함께 돌아갔고, 다행히 추가 형벌은 없다는군요. 앞서 신전이 내린 예언이 예언인지라 황제 폐하께서도 더는 뭘…….”
“그 자식 지금 어디 있나.”
해시트는 다 듣지도 않고 불쑥 그를 다그쳤다. 체통 없는 행동이었다.
미처 내려놓지 못한 펜촉에서 새어 나온 검은 잉크가 종이 위에 동그란 얼룩을 퍼뜨리고 있었다. 라피난은 점점 커다래지는 검은 얼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잠시 후 한숨처럼 대답했다.
“처소로 옮겨져 요양 중입니다. 펜은 두고 가시지요.”
스윽, 조용히 다가온 그의 손이 해시트의 손에서 펜대를 끄집어내 빈자리에 누여 주었다. 해시트가 옷에 잉크 얼룩을 묻히지 않고 이레이와 만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 덕분이었다. 라피난이 아니었다면 여태 펜을 쥐고 있는 줄도 모르고 우당탕 일어나서 달렸을 테니까.
하지만 천하의 라피난 카일도 미리 귀띔해 주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노크다.
벌컥!
“이레……!”
“그래. 뒤돌아라.”
냅다 현관문을 열어젖히자마자 해시트는 자신이 보름 전의 라피난과 똑같은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하필 옷을 갈아입던 이레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그러지.”
뒤를 돌라니 얼른 빙글 뒤를 돌고 기다렸다.
평소 이레이가 하던 짓을 생각하면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보란 듯이 바지까지 벗어 버리지 않은 게 차라리 감사할 지경이었다. 한데 뒤돌아서 가만 생각해 보니, 그가 고작 상반신을 탈의한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끼진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뭔가를 숨기고 싶었다는 거다. 이를테면 피에 함빡 절은 옷가지라든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상처들, 피부를 온통 뒤덮고 있는 시퍼런 피멍과 거무튀튀한 핏자국을.
“…….”
뒤늦게 공기를 메운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 순간,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그때 이레이가 말했다.
“탈옥에 실패해서.”
그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해시트도 낮은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