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308)
정호준이건 아리아건 아이들이 태어난 뒤로 3개월 이상 아이들의 곁에서 떨어져 있는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신을 낯설게 여길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데디!! 왜 이렇게 늦었어!!”
“야구장에 같이 가기로 해 놓고 혼자 갔어. 거짓말쟁이!”
낯설어하기는커녕 아이들은 반가워하며 달려와 안겼다.
‘정말 많이 크긴 했네.’
아이들이 점프해서 날아드는 걸 다치지 않게 붙잡고 버티는 것도 일이었다. 품 안에서 불평하는 아이들을 보며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과,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정호준을 어려워하는 일은 없었다. 헤리나는 세상 모든 아빠들이 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애교를 부리며 안겨 왔고, 새벽에 도착해 시차 적응 때문에 수면을 취하고 나서 시카고 컵스에 다녀온 일로 줄리우가 화를 냈다.
“미안 미안. 다음에, 다음에는 꼭 같이 갈게.”
“치~, 저번에도 그렇게 이야기했잖아!”
애교를 부리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붙어 있는 헤리나와 달리 줄리우는 투정을 이어 갔다.
“아빠가 헤리나랑 줄리우 주려고 선물 사 왔는데, 줄리우는 선물 받기 싫은가 봐?”
한국에 있을 때 아리아에게 미리 받은 사이즈로 아이들의 한복을 하나씩 맞췄었다.
“선물? 나도! 나도! 나도 선물 줘!!”
“무슨 선물?!”
선물을 준비했다는 말에 투정을 부리던 줄리우는 물론이고 마냥 정호준이 좋아 달라붙어 있던 헤리나도 다시금 애교를 부렸다.
쌍둥이의 애정 공세에 캐리어를 열어 한복을 꺼낸 정호준은 한복을 손수 입혀 주었다.
헤리나의 한복은 옅은 핑크빛에 자수로 문양을 만들어 놓은 한복이었고, 줄리우의 것은 옅은 하늘빛의 색이 감도는 한복이었다. 피부색이나 이목구비는 제 엄마를 닮았지만 정호준의 흑발 흑안을 물려받아서 그런지 한복이 어색하진 않았다.
옷걸이가 좋으면 뭐든 예쁘고 멋지잖은가?
“잘 어울리네. 누구 닮아서 이렇게 멋지고 이쁜 거야?”
탄성을 내지르며 호들갑을 떨며 아이들을 칭찬했는데, 들려오는 대답은 냉정했다.
“엄마!”
“엄마!”
아직 천진난만할 때였기에 대답은 솔직담백했다.
아이들을 껴안으며 한 번 더 물어보긴 했지만 거기서도 아리아의 이름만 나왔다.
예의상으로나마 아빠라고 해 줄 법했건만 여하튼 그랬다.
* * *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혀본 다음 날 정호준은 아이들과 경호원, 가정교사 등을 모두 대동한 채 시카고 미시간호 연안에 위치한 네이비 피어라는 작은 놀이동산에 방문했다.
아이들을 좋다고 뛰어다녔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따라다니기 바빴다. 그리고 경호원의 경우 안전거리를 확보를 이유로 어른들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반가워해 줘서 다행이네. 줄리우와 헤리나도 바쁘게 살아서 그런가?’
이제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됐기에 2~3시까지는 유치원에 가 있었고, 아리아가 준비한 개인 교사가 따라다니며 조기 교육에 힘쓰는 중이라 아이들의 일과는 상당히 바빴다. 공부만을 밀어붙이는 한국과 달리 미국의 엘리트 교육은 공부 외에도 예절 공부나 악기는 물론이고, 승마나 테니스 같은 스포츠를 배우는 데도 시간을 분배했다.
특히 아리아가 승마 선수로 활동할 만큼 말을 타는 것을 즐기는 여자라, 아이들을 위해 좋은 혈통의 아크할 테케(Akhal-Teke) 망아지를 사들이기도 했다.
‘태어난 지 6개월 조금 넘은 말이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카보다도 비쌌지.’
아크할 테케는 한국말로는 한혈마라 부르는 품종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품종으로 유명했고, 확실히 명성 값을 했다. 한혈마 중에서도 귀한 혈통을 가진 말들을 사들이느라 마리당 거의 8억이 넘는 돈을 잡아먹었다.
‘아깝다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과 아리아가 탈 말이다. 돈이 뭐가 아깝겠는가? 그저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깜짝 놀랐을 뿐이다.
정호준이 아이들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건 아닌가란 생각을 하면서도 아리아의 교육 방침에 별다른 태클을 걸지 않은 건 위와 같이 아이들이 숨 쉴 구멍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었다.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정호준은 속으로 기도했다.
‘삐뚤어지지만 말고 건강하게 자라 주길!’
돈은 이미 정호준이 벌 만큼 벌어 뒀다. 정호준과 아리아 세대는 물론이고 아이들, 어쩌면 손자의 손자 대에도 먹고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다.
그런 이유로 정호준은 아이들의 교육에 매달리는 아리아와 달리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뭐 막상 바닥을 치는 성적표를 받아 오면 그때 가서는 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당장에는 큰 욕심이 없었다.
‘경영이야 전문경영인에게 맡겨도 되는 거니까.’
아이들이 경영자가 될 자격이 없다면 전문경영인에게 계속 맡기면 그만인 일이다.
2020년 초반까지의 역사만 기억하고 있던 정호준은 2020년대 중반에 접어들 무렵부터는 본인도 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었다. 전문경영인이 큰 모험수를 두지 않도록 보수적인 방침을 미리 설정하고 나름의 안정장치는 세워 두겠지만 말이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기를.’
중요한 건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거나 꿈을 향해 달려가다 고꾸라질지라도 다른 꿈을 찾아 다시 뛸 수 있게 해 줄 능력을 정호준이 가지고 있다는 거였고, 아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인데, 관심도나 시장 규모가 작아 걱정이라면 해당 분야의 체급 자체를 키워 줄 수도 있었다.
사람을 죽여 달라는 부탁이나 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치는 일만 아니면 뭐든 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정호준은 마음속으로 하나 기도하는 게 있었다.
바로 아이들이 군인이나, 정보 요원, NFL 선수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겠냐만 군인이나 요원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직종이었고,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NFL은 인기와 비례해 몸이 망가질 확률이 높은 스포츠다. 뇌진탕으로 종종 사망자가 나오기도 할 정도다.
아비 된 자로서 자식이 위험한 일을 하길 원치 않는 건 당연한 거잖은가?
물론 아리아가 저렇게 돈을 쏟아붓고, 아리아나 정호준의 학력을 고려하고 한국말도 곧잘 하는 아이들의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공부를 못할 것 같지는 않있지만 말이다.
“데디!! 데디도 얼른 와~!!”
줄리우와 함께 놀던 헤리나가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정호준에게 다가와 손을 잡아당겼다.
* * *
일주일을 휴가 냈으면 푹 쉬었을 법도 했건만, 미운 일곱 살이 얼마 남지 않은 쌍둥이들을 데리고 놀아주는 건 생각보다 힘겨운 일이었다.
‘대체, 평범한 가정의 부모들은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하는 거야?’
경호원이나 아리아가 붙여 놓은 가정교사들을 동반한 채로 놀아 줬음에도 이렇게 힘든데, 도움의 손길 없이 아이를 돌봐야 하는 평범한 가정의 부모는 오죽 힘들까? 전 세계에 존재하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새삼 존경심이 생겼다.
휴가를 마치고 회사로 복귀한 정호준은 JHJ Capital의 계좌에 남아 있는 자금을 알리는 보고서를 읽었다.
현재 JHJ Capital의 계좌에 남은 자금은 151억 달러, 생각보다 많이 허전해진 숫자에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주머니가 너무 가벼워진 느낌이네.”
151억 달러가 결코 작은 돈은 아니었지만 돈이란 건 언제나 상대적인 법이다. 2008년 이후 항상 계좌에 큰돈이 잠자고 있는 상황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텅텅 빈 계좌가 낯설었다.
게다가 수중에 남았다는 151억 달러도 사실 중국에서 2012년 6월에 건네주기로 계약서를 작성한 수호이로그 금광 매각금 100억 달러가 입금되고 5월, 6월, 7월에 배당을 실시하는 회사에서 배당금을 지급받고 JHJ Capital이 소유한 부동산에서 월세가 들어오는 등, 가진 자산이 새끼를 쳐서 채워진 거지, JHJ Capital의 계좌에서 세금이 빠져나갔을 땐 정말 계좌가 텅텅 빈 상태였다.
“주머니가 비었으면 채워 넣어야지.”
정호준에게는 아직 씨앗을 뿌려 놓고 정리하지 않은 투자처가 남아 있었다. 그를 위해 곡물 선물 투자를 담당했던 지미 딕슨과 테일러 팀장, 그리고 JHJ Capital의 투자 전반을 총괄하는 CEO 조나단을 사무실로 불렀다.
* * *
정호준은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급 있는 이들에게 베풀었던 핸드 메이드 커피를 한 잔씩 대접했다. 조나단, 지미 딕슨, 테일러 팀장까지 모두 아메리카노 대신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커피를 달라고 요구해서 커피를 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커피를 건네줄 때마다 감사 인사가 뒤따랐다. 유일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정호준은 텀블러를 기울이며 한 모금 크게 들이마셨다.
“바쁘신 분들을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한 건, 이제 그만 곡물 선물을 정리할까 해서입니다.”
곡물 선물계약으로 체결한 것들을 정리하겠다는 정호준의 말에 테일러 팀장은 감정이 북받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드……드디어 정리하는 겁니까?!”
곡물가가 얼마나 치솟는지 정확한 단위는 모르지만 이상기후에서 비롯된 가뭄으로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이자 다른 종류의 작물도 다량 수출하는 러시아가 큰 피해를 입은 걸 기억하고 있던 터라 JHJ Capital은 정호준의 주도하에 곡물 선물을 사들였다.
선물계약을 체결하고 현물을 사들일 당시부터 설탕은 2011년에 그리고 남은 밀, 옥수수, 대두, 대두유, 대두박, 귀리와 같은 곡물 선물들은 2012년 8월 전까지 정리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두었기에 정호준은 마음 편하게 하루하루를 지냈지만, 선물지수를 매일같이 확인하는 테일러 팀장이나 지미 딕슨은 입장이 달랐다.
2011년 2분기쯤 설탕을 정리하는 게 설탕 선물을 정리하는 게 가장 최적의 타이밍이었던 것처럼 JHJ Capital이 체결한 선물계약 중에는 2011년에 정리하는 게 나았을 종목이 둘 있었다.
바로 ‘대두유’와 ‘귀리’였다. 귀리는 작년 대비 0.18포인트 정도 떨어진 상태였고, 대두유의 경우 무려 5포인트 이상의 지수가 하락했다.
선물을 매입했을 때와 비교하면 이미 회사는 큰돈을 번 상태였지만 지수를 관찰하며 하루를 보내는 팀장들은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시기를 놓치고 하루하루 오르내리는 현실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뭔가 본인들이 무능한 것 같고, 회사에 손실을 끼친 기분이랄까? 하여튼 그랬다.
간절함이 담긴 테일러 팀장의 질문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7월 말부터 선물 정리 시작해 주십시오.”
JHJ Capital이 체결했던 선물계약을 모두 정리하라는 정호준의 대답에 질문을 한 테일러 팀장은 물론이고 지미 딕슨 또한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예, 지시하신 대로 이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