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260화 (260/335)

260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60)

컨퍼런스룸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온 요시다 겐이치로는 정호준이 손짓한 자리로 조심스럽게 이동했고, 자리에 착석한 뒤 조심스럽게 정호준을 바라봤다.

요시다 겐이치로는 자신을 이 야밤에 따로 부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정호준이 이야기해 주기만을 조심스럽게 기다릴 뿐.

간토전력의 회장인 시마즈 쓰네히토를 만날 때나 보이는 태도였다.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모두 조심하는 겐이치로의 태도는 막내아들과 동년배처럼 보이는 정호준과 만나면서 보이는 태도로는 조금 과하다 여겨질 수도 있으나, 당사자인 겐이치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회장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회사를 위해서라면(자신의 정년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윈 몇 번이고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을 부른 이유가 뭐냐며 먼저 물어볼 줄 알았는데, 의외네.’

극도로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겐이치로의 행태에 정호준은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늦은 밤에 조용히 따로 불러냈는데, 별다른 의문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정호준 대표님께서 이야기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니 저를 이렇게 따로 부르신 거잖습니까?”

극도로 공손하면서 수동적인 행동 양식은 확실히 일본인다웠다.

처음에는 선물을 쥐여 주거나 미리 확보해 둔 떡값을 받아먹은 증거들을 가지고 그를 협박할까 생각했지만, 당사자를 만나고 나니 담백하게 이야기하는 게 제일이란 생각이 든 정호준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요시다 겐이치로 씨, 우리 JHJ Capital의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월가를 포함한 미국 금융권에서 일하거나 일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바라마지 않을 스카웃 제의를 받았음에도 요시다 겐이치로는 극도로 차분했다.

“이제 정년까지 겨우 2년 남은 늙은이를 데려다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저를 통해서 회사의 극비 정보를 캐내실 생각이시라면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육십을 넘은, 이제 정년이 얼마 안 남은 노인임에도 겐이치로의 눈동자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굳건한 의지를 드러냈다. 일본과 한국의 중년, 노년 세대는 중세시대 영주나 왕에게 충성하듯 회사에 충성하곤 했는데, 요시다 겐이치로가 딱 그 꼴이었다.

“극비 정보라면 뭐가 있을까요? 원전을 포함 귀사의 전력 시설 모두가 노후화됐다는 것? 아니면 귀사가 운용 중인 원전이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고 그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네요. 저희를 음해하는 세력이 뿌린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요시다 겐이치로는 ‘그걸 어떻게’ 같은 멍청한 대사를 읊지는 않았다. 노년의 연륜을 발휘해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뻔뻔한 변명을 이어 갔다.

‘역시 경험이 어디 가진 않는다는 건가?’

만약 정호준이 1회차의 삶을 통해 겪은 사고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정보기관을 통해 미리 알아낸 정보가 없었다면 그의 연기에 속아 넘어갔을 정도로 요시다 겐이치로의 연기는 뛰어났다.

“그렇게 힘들게 연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요. CIA의 눈은 어디든 있다는 말 들어 보셨죠? 제가 정보기관과 좀 친합니다.”

CIA를 움직여서 전달받은 정보란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밝히자, 그제야 포커페이스가 조금 깨지는 듯 보였다.

“아직 제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스카우트해서 어디에다 써먹으려 하시는 겁니까?”

다만 포커페이스는 깨졌어도 끝까지 인정하지는 않았다. 화제를 돌리면서까지 회사의 약점을 노출하지 않으려는 그 의도가 갸륵해 겐이치로의 수작에 넘어가 주었다.

“일본과 간토전력에 닥칠 재앙을 막으려 합니다.”

“재앙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사를 넘어 조국인 일본까지 언급하자 조금 전까지 유지하던 포커페이스가 완전히 사라졌다. 포커페이스는커녕 흥분한 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간토전력이 운용 중인 원전에 문제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시다 이사님께서는 제게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시지만, 만약 일본에 강력한 지진이 강타한다면 원전이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멀쩡한 시설이어도 지진이 발생하면 위험하다. 노후화된 시설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본에 지진이 일어난다니? 신도 아니고 세상 어느 누가 지진이 일어날 것을 정확하게 예측합니까?”

“작년 말부터 불의 고리에 위치한 국가들에서 크고 작은 지진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따지는 요시다 겐이치로를 보며 정호준은 지금껏 정리해 둔 자료와 그 자료를 토대로 환태평양조산대에 위치한 나라들에 발생한 지진을 표시한 지도를 보여 주었다.

“누가 봐도 불의 고리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죠. 하지만 불의 고리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별다른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다행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걱정스럽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태평양조산대는 지각이 불안정하며 지각이 소멸되는 판상 경계를 지칭하는 용어인데, 일본은 불의 고리에 위치한 국가 중에서도 특별한 축에 속했다.

“불의 고리에 위치한 나라들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해서 일본에도 지진이 날 거라니. 제가 아닌 누구라도 허황된다고 여길 겁니다.”

다만 정호준이 그 특별함을 언급하기 전에 요시다 겐이치로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일본은 불의 고리에 속해 있으면서 유라시아판, 북미판, 태평양판, 필리핀판. 네 개의 판이 모두 만나는 국가입니다.”

2개의 판만 만나도 지진대 국가로 인식되는 판국에 일본은 무려 4개의 판이 모두 만나는 국가다. 지리적으로는 정말 괴랄한 위치에 속해 있는 거다. 정호준이 이를 언급하자 겐이치로의 입이 다물어졌다.

결코 가능성이 전무하지는 않다고 여긴 요시다 겐이치로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말을 전할 대상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이 말은 제게 전하는 게 아니라 정부 관계자에게 전했어야 합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알린다고 과연 일본 정부에서 받아들이겠습니까?”

정호준의 반문에 요시다 겐이치로는 또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정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을 거다’라는 동심 가득한 발언을 내뱉을 만큼 현실을 모르진 않았다.

입을 다문 요시다 겐이치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정호준은 일본 정부가 취할 행보를 이야기했다.

“일본 정부는 저를 비난하고 제 생각을 부정할 겁니다. 욕하고 비난할 게 뻔한데 나설 이유가 있을까요?”

일본 정부가 정호준의 생각에 동의해 뒤에서 나름대로 준비를 할 수는 있어도, 결코 정호준의 경고를 용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도 그럴 게 일본 정부가 정호준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 달리 말하면 일본이 위험하다는 것을 정부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투자자들이 움직이겠지.’

세상에 자연재해가 올 거라는 위험한 나라에 돈을 투자하는 이는 없다. 일본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은 돈을 빼기 위해 움직일 거고 이는 일본 주식시장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되리라.

그런데, 몰락하는 건 주식시장만이 아니다. 관광산업 또한 주식시장만큼이나 큰 타격을 입게 되리라.

왜 그러냐고? 간단한 논리다.

자연재해가 예고된 곳에 놀러 갈 정신 나간 인간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투자자가 돈을 빼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이치였다.

2010년 153억 5,600만 달러(한화 20조 원)를 관광 수익으로 기록했고, 매년 관광산업이 성장세를 띄고 있는데 정부에서 직접 위험을 공인해 산업을 망칠 필요는 없다.

“일본 중부나 동부를 중심으로 강진이 발생하면 과연 귀사가 운용 중인 원자력 발전소가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내게 베팅하라고 권한다면 나는 문제가 생긴다는 쪽에 베팅할 것 같네요.”

“제게 무엇을 바라시는 겁니까?”

“간토전력이 원자력 발전소 운영을 해이하게 하고 있다는 증거를 수집해 주세요. 그리고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시 재빨리 나서서 수습해 주십시오. 물론 당시 상황이 얼마나 위급했는지에 대한 증거도 수집을 해 두셔야 합니다.”

정호준의 요구에 요시다 겐이치로는 정호준을 빤히 바라봤다.

“지진이 안 일어날 수도 있지만, 만약 지진이 발생한다면 최악의 상황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질문하시죠.”

“간토전력을 신경 써 주시는, 아니 일본을 신경 써 주시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우리 일본에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나는 일본을 돕는 게 아니니까요. 내가 돕는 건 조국이었던 한국과 지금의 조국인 미국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겐이치로를 보며 정호준은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죠. 체르노빌 사태처럼 큰 사고가 터진다면, 과연 일본은 그 방사성 물질을 어디에 버리겠습니까?”

“그건?”

“저는 귀국이 바다에 투하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럼 인접국인 한국과 미국이 그 피해를 함께 입게 되겠죠. 저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해서 이렇게 움직이는 겁니다.”

요시다 겐이치로는 정호준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 인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저는 요시다 겐이치로 씨의 가족들 모두가 미국으로 넘어오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언제 지진이 발생할지 모르는 일본에 있는 것보다는 미국으로 넘어와서 사시는 게 가족들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고위층이나 돈이 많은 이들은 일본 밖에서도 잘 살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를 해 두는 편이다.

“요시다 겐이치로 씨를 스카우트하고, 겐이치로 씨의 처남의 가게를 사들이고, 아드님과 조카, 따님의 MBA 과정을 돕고, 자리를 약속하는 건 요시다 겐이치로 씨가 용기를 낸 대가라고 생각하시죠.”

오랫동안 이야기를 이어 가다 보니 갈증이 난 정호준은 물을 마셔 혀와 목을 적신 뒤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자료를 모아 두라는 건, 어쩌면 1년 넘게 소송에 휘말릴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변호사야 당연히 지원해 드릴 거지만, 법정에서 승리하려면 확실한 물증이 있어야 하잖습니까?”

혹시 모른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정호준은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80%를 넘긴다고 봤다.

“평생을 산업체에서 일했습니다. 금융회사에서 제가 할 일이 있을까요?”

젊은이들이 바라마지 않을 월급루팡의 기회를 요시다 겐이치로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한 기색을 확인한 정호준은 속으로 다 넘어왔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이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말에는 반도체 회사를 인수할 계획입니다. 요시다 겐이치로 씨는 그곳에서 이사로 활동하시면 됩니다. 5년의 임기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정호준은 소송에 휘말렸을 시 변호사를 구해 주겠다는 것부터 취직, 지원, 임기를 보장해 주는 조건이 적힌 계약서를 요시다 겐이치로에게 넘겨주었다. 정호준이 넘겨준 계약서에는 당연히 JHJ Capital 법인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제 제안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이 자리에서 선택해 주십시오.”

삶의 환경이 변하는 만큼 요시다 겐이치로는 1시간을 넘게 고민하며 신중에 신중을 기했지만 결론은 났다. 요시다 겐이치로는 정호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