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57)
환태평양 조산대. 태평양판(Pacific plate)의 동, 서 및 북부에 분포하는 섭입대, 충돌대 및 섭입대를 잇는 판 경계를 묶어 이르는 표현이다. 태평양판 남쪽 부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면이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했고,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한 화산이나 지진 등의 활동이 잦아 ‘불의 고리(Ring of fire)’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라 일컬어지는 기록적인 지진이 발생하기 전 불의 고리라 불리는 곳에 위치한 국가들에서는 다달이 크고 작은 지진이 자주 발생했다. 일본,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필리핀, 칠레, 멕시코, 미국 서부, 캐나다 서부, 뉴질랜드가 이 불의 고리 위에 위치한 나라들이었다.
1월부터 칠레 Araucanía지역 Carahue에서 북서쪽으로 42km 벗어난 곳에서 7.2의 강진이 발생했고, 2011년 2월에는 Maule지역 Tomé에서 북쪽으로 21km 떨어진 지역과 Chiguayante에서 남동쪽으로 13km에서 떨어진 지역에서 각각 6.9와 6.1 강도의 지진이 발생했다. 2011년 연초에 발생한 이 지진들은 2010년 칠레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여진으로 보는 경향이 짙었는데, 동일본대지진을 떠올리면 이 또한 불의 고리가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는 증명 사례였으리라.
불의 고리에서 일어나는 지진은 달리 칠레에서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남부 수마트라 근해, 파가르 알람에서 남서쪽으로 129km 떨어진 곳과 아체 근해 시나방에서 동남동쪽으로 58km 떨어진 곳, 남술라웨시 포소에서 남동쪽으로 146km 떨어진 곳에서 각각 6.0, 6.1, 6.1의 지진이 발생했다.
칠레나 인도네시아처럼 2달 사이에 3번이나 지진이 일어나진 않았어도 필리핀과 뉴질랜드에서도 6.0 이상의 강진이 발생하긴 했다. 필리핀 셀레베스해 앞바다 타비아우안에서 남동쪽으로 250km 떨어진 지역에서 6.6의 강진이 발생했었고, 뉴질랜드 캔터베리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남동쪽으로 6km 벗어난 지역에도 6.1의 강진이 발생했다.
참고로 이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185명이 죽고 2,000명이 다쳤었다.
‘불의 고리에서 발생한 지진 사례들을 증거물로 모아 베팅하면 그나마 근거가 되겠지?’
불의 고리에 위치한 나라들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일본도 일어날 거라 베팅한다는 건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이렇게라도 이유를 대는 게 그냥 지진이 일어날 거라고 예견하며 막무가내로 베팅하는 것보단 나았다.
‘운에 맡기는 거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분석한 티는 나잖아.’
최소한 정호준은 그렇게 생각했고, 자료를 모으며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대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교통 기술의 발달로 반나절 만에 반대편에 있는 나라로 오가는 것이 가능해지고, 통신 기술의 발달로 언제든 세계 반대편에 있는 이와 원하는 때에 연락이 가능해지면서 기자들의 업무 반경은 세계 단위로 늘어났다.
해외로 파견되는 기자를 지칭하는 ‘특파원’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특파원은 한국과 시차가 큰 지역으로 파견을 나가면 다른 시간대에 일하는 바람에 밤에도 일해야 하는 일이 종종 있고, 음식이나 문화 차이, 경제 여건 등 고생거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고생하는 만큼 득도 있었다. 현지에서 취재하여 본사로 보낸 원고가 지면을 장식하거나 방송에 나오는 일이 많기에 특파원은 기자들에게 꼭 한번 해 보고 싶은 일이었다.
일본이나 중국처럼 가까운 나라에 특파원으로 나가는 건 기자로 활동하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자리였다.
‘그래서 문제지.’
정호준은 박기태가 취업 시장에 나오기 전부터 서로 이야기를 맞춘 한국의 상황을 정보원들로부터 이미 전달받은 지 오래다. 박기태가 취업한 메이저 언론사 ‘중심일보’에서 ‘박기태를 신경 써 준다고 주재 일본 특파원으로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란 의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알아서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다고 움직인 게 오히려 최악의 상황을 초래한 꼴이 되는 거지.’
신경 써 준 것이 아이러니하게 사지로 모는 꼴이 되는 거다.
이제 막 입사 반년을 채운 기자를 해외로 보낸다는 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확률이 제로는 아니니까.’
‘설마 그럴까?’란 생각으로 가벼이 넘겼다가 후회할 바엔 직접 나서서 확률은 제로로 만드는 게 나았다. 그게 힘 있고 가진 게 많은 이들의 방식이었다.
“이렇게 연락드리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JHJ Capital의 정호준입니다. 이렇게 늦은 밤에 연락을 들여 죄송합니다. 중심일보 형석훈 회장님.”
인맥을 통해 알아낸 직통 연락처로 사전에 동의를 구한 후 중심일보 측에 연락을 넣었다.
“이렇게나마 통화로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영광입니다. 정호준 대표님. 정호준 대표님의 승승장구는 여기저기서 전해 들어서 처음 같지 않긴 하지만 말이죠. 그리고 늦게 전화를 주신 것도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된 거잖습니까? 전혀 실례가 아니니 개의치 마세요. 나이가 들면 밤잠이 없어지는 법이거든요.”
사과가 담긴 인사말을 들은 형석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정호준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무리한 부탁을 하나 드리고자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말씀하시죠.”
“작년에 공채로 귀사에 입사한 박기태 기자를 주재 미국 특파원으로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모르는 사람과 길게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기에 정호준은 늦은 시간, 비밀리에 연락한 용건을 꺼내 들었다.
“작년에 입사한 이를 특파원으로 보낸다는 건 우리 회사 내의 관행이나 절차를 짓밟는 일입니다. 아무래도 좀 꺼려지는군요.”
‘역시 괜한 걱정이었나.’
형석훈 회장의 뒤로 빼는 듯한 말을 듣고 속으로 역시나 괜히 사서 걱정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다. 됐다고 돌아서기보다는 통 크게 지르기로 결정했다. 개인적으로 박기태와 하고 싶은 것도 있었으니 말이다.
“작년에 종합편성 방송채널사업자로 선정되셨었죠? 법인을 준비 중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09년 7월 22일, 수많은 잡음을 만들어 낸 종합편성채널에 법적 근거를 부여하는 방송법 개정안이 보수당의 강행으로 국회에서 통과됐다. 2010년 11월 30일에 종합편성채널 사업자 신청을 받았고, 중심일보는 2010년 12월 31일 종합편성 방송채널사업자로 선정되었다.
“광고를 드리겠습니다. 중심일보에 1년, 그리고 개국할 케이블 채널에 2년. 총 3년간 광고를 드리죠. 종편사 광고 값은 중심일보 광고 값과 같은 가격으로 지불하겠습니다.”
“…….”
중심일보가 범오성가의 울타리에 묶여 자금 나올 곳이 많은 기업이라지만, 자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다. 이제 막 시작하는 종편사 광고를 중심일보 광고 가격으로 사주겠다는 제안은 준비 중인 종편사가 자리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계산을 마친 형석훈 회장은 마케팅 직원처럼 호의가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이렇게 성의를 보여 주시는데, 저희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박기태 기자가 반발하지 않는다면 미국 주재 특파원으로 보내겠습니다.”
“박기태 기자에게는 오늘 우리 대화가 알려지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하하, 정보와 소문 밥 먹고 사는 늙은이가 그 정도 눈치도 없겠습니까?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너스레 떠는 형석훈 회장의 말을 끝으로 밖으로 알려지지 않을 비밀 대화가 끝이 났다. 형석훈 회장은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이어 가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겼지만 정호준은 칼같이 끊어 냈다.
* * *
정호준이 중심일보와 딜을 마친 후 이틀이 흘렀을 무렵, 일본의 정부 관계자가 정호준을 만나고 싶다고 미팅을 청해 왔다.
“일본 정부 관계자가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고요? 이유는요?”
“급하게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만 이야기할 뿐 이유는 딱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JHJ가 주식을 정리하고 있는 걸 일본 정부에서 인지했기 때문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예, 대표님께서 항상 이야기하셨듯 공포는 연쇄되는 거잖습니까? 다른 외국 자본들이 JHJ의 행보에 자극을 받아 움직이기 전에 어떻게든 진화에 나서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럴듯한 분석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나단이 보고서로 올린 내용을 참조하면 일본 주식 시장에 투입된 JHJ Capital 일본 법인 자금은 1조 7천억 엔에 달한다. 이 1조 7천억 엔은 한화로 환산하면 약 17조 원에 이르는 거금이다. 외국인들이 손잡고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JHJ Capital 단일로 17조 원을 움직이니, 정부 차원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한국과 비교해 경제 규모가 큰 일본이라지만 세계 GDP 2위를 기록 중인 일본에게도 17조 원은 가볍게 여길 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대충 예상 가는 이유를 전해 듣고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른 정호준은 비서팀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미팅 요청은 거절해 주세요. 내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그런 한가한 인간은 아니잖아요?”
정호준은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은행을 소유하고 단일로는 최대 규모에 이르는 투자회사를 운용하는, 그야말로 거대 금융 그룹의 수장이라 불려도 무방할 남자였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같은 시간이어도 거물의 1시간과 일반인의 1시간은 가치가 달랐다.
“정말 나와 만나고 싶다면 ‘간토전력’의 사장단을 대동한 채 찾아오라고 전해 주세요.”
간토전력은 일본의 수도가 있는 도쿄도를 포함한 간토 지방(가나가와, 지바, 사이타마, 이바라키, 군마, 도치기) 전역과 야마나시, 시즈오카현 일부에 대한 전력 공급을 담당하고 있는 일본에서 최대의 매출을 기록 중인 전력회사였다. 간토전력은 아시아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했고, 세계를 놓고 봐도 4위에 랭크인될 만큼 큰 기업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미팅을 성사시키고 싶으면 거대 기업의 사장단을 대동한 채 찾아오라는 조건을 달았음에도 비서들은 정호준의 요구에 별다른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선택은 보스와 일본 정부 관계자의 몫이니까.’
다만 정호준의 업무 지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 정보기관과 트리오플에 협조 요청해서 간토전력 사장단의 개인 정보를 구해다 주십시오.”
“개인 정보라면 어느 정도나…….”
비서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호준이 끼어들었다.
“전부 다입니다. 성향은 어떤지, 뒷돈은 얼마나 받아먹었는지, 재산은 얼마나 형성했는지, 권한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사내 영향력은 얼마나 되는지, 평판은 좋은지 등. 사장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모두 다 한 명 한 명 샅샅이 파악해서 가져다주세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는 비서들을 보며 정호준은 속으로 계산을 이어 갔다.
‘일본 정부 관계자가 사장단을 데려와 줘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