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36)
김건희는 박몽구 앞에서 감정을 숨기려는 노력 없이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단 생각이 담긴 표정에, 박몽구는 동감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년간 GDP 세계 16위 밖으로 나가 본 적 없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최고의 자리를 확고히 한 오성의 수장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단 표정을 짓는 걸 누군가 봤다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속사정을 조금만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하다고 여길 사안이었다.
IMF를 극복한 후로 몇 년간 대한민국의 GDP가 16위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 반면 정호준이 활동하는 미국은 수십 년간 1위를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 온 패권국이었다. 2009년만 놓고 비교해도 GDP 총액 차이가 약 15배 정도 날 정도로.
그런 나라에서 금융 쪽 거물로 불리며 정치권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접점이 많은 정호준을 어려워하는 건 사실 이상할 게 없는 당연한 거였다.
‘정 회장이 JHJ를 키운 시간이 너무 짧아. 그것도 문제야.’
김건희 회장은 정호준이 단기간에 너무 큰 성공을 거둔 것도 문제가 될 요소라고 판단했다. 긴 시간 피와 땀을 쏟아붓고 애지중지하며 성장시킨 게 아니었기에, 언제든 다시 일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덤벼들지도 몰랐다.
‘월가에서 큰 성공을 거둔 투자자가 감정에 휩쓸려 무리를 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젊음의 혈기는 정호준으로 하여금 손해를 보는 것을 개의치 않게 여기고 전투 욕구를 만연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감정이 상한 정호준이 언제든 다시 일굴 수 있는 성공이라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피를 보는 건 오성이었다.
‘누울 자리도 봐 가면서 뻗는 법.’
갑질을 하다 매스컴을 탄 이들조차 갑질을 해도 될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명확하게 구분하거늘, 오성이라는 거대한 범선, 대한민국 최고기업을 경영하는 김건희가 그런 견적을 못 낼 리 없었다.
김건희가 판단하기에 정호준은 본인의 자존심을 다 챙겨 가며 상대할 만큼 만만한 이가 아니었다. 나이에 속아선 곤란했다.
김건희의 표정을 통해 생각까지 유추를 마친 박몽구 회장은 공매도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켰다.
“당장 공매도를 시작하는 건 아니지만, 정 대표가 공매도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조만간 악재가 터진다는 거지. 되도록 언론에서 키요타를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언론 쪽에 엠바고를 요청하려 하는데, 건희 자네가 한 손 보태 주게. 재수씨에게도 도와달라고 말 좀 전해 주고.”
박몽구는 다른 증권사가 그랬던 것처럼 고객들이 쥐고 있는 주식을 동의 없이 무단으로 이용할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되도록 그 이익을 회사와 본인이 독식하길 희망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매도가 진행될 동안 개미들이 주식을 매각하겠다고 난리를 치지 못하게 정보를 제한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이익은 회사와 본인이, 손해는 고객(개미)이 떠안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재벌다운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소. 일단 우리가 광고주는 곳에 먼저 이야기하고 남은 곳은 나눠서 분담합시다.”
오성 또한 대한민국의 재벌이었다.
두 사람은 언론사들이 협조에 응하지 않을 거란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범 오성가와 범 미래가로부터 광고를 받지 않고 언론사를 운영한다는 건, 매출에 막대한 지장이 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의선이 녀석은 잘 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부럽수다.”
김건희 회장은 지아 자동차에서 뚜렷한 성과를 낸 박몽구의 아들 박의선 사장을 칭찬했다.
“하하, 내가 잘 키웠지.”
재벌이어도 부모란 입장에서 자식 칭찬은 기꺼운 법이다. 김건희의 칭찬에 박몽구는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한국 재계의 두 거물은 공매도에 관한 이야기 외에도 세계 경제의 흐름이나 자식과 손주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 갔다.
* * *
12월 말 크리스마스가 지났을 무렵 정호준은 선물을 받게 되었다.
“파!!”
“파파, 파파!!”
이제 슬슬 말문이 트이고 중얼거리기 시작한 줄리우와 헤리나가 처음으로 정호준을 아빠라고 불러 주었다.
“그래, 파파가 바로 파파야.”
일이 바빠 똑같이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이 적었음에도, 아니 사실상 재단 일에 적응하느라 바빴던 아리아보다 그가 더 많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음에도 아이들은 마마라는 말을 먼저 뱉었다. 그 때문에 조금 속이 상했었는데, 파파라는 한마디에 속상함의 응어리가 풀어졌다.
“꺄아!!”
정호준은 양손으로 줄리우와 헤리나의 어깨 밑 겨드랑이를 잡고 들어 올려, 한 바퀴 빙글 돌려주었다. 좋다고 즐거워하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돌봐주는 정호준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던 아리아는 정호준을 보며 입을 열었다.
“1월 1일에 재단에서 자선 파티를 개최할 예정이에요. 당신도 참석해야 하니까 잊으면 안 돼요!”
정호준이 파티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리아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으음, 누구 말씀인데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아리아가 나름대로 배려도 해 줬는데.”
보통 파티는 뉴욕이나 할리우드가 붙어 있는 캘리포니아, 따듯한 플로리다 등에서 파티를 여는 게 보편적이다. 아리아는 정호준의 스케줄을 고려해 자선 파티를 시카고에서 개최했다.
“알면 준비 잘해요. 멋지게 하고 나와요. 메이크업팀 따로 불러 뒀으니까 그쪽이 하라는 대로 하고요. 알았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가만 앉아서 수 시간 동안 메이크업을 받는 데 얼마나 고역인지 경험한 터라 정호준은 거절하려 했으나.
“쉿!!”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아리아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줄리우와 헤리나는 손가락을 피며 아리아의 행동을 따라 했다.
“봐요. 우리 애들도 당신보고 조용히 하라고 하잖아요.”
정호준의 성격이 그런 건지, 원래 남자의 유전자 구조가 가족에게 약한 건지, 정호준은 가족이란 생태계에서 자신이 가장 밑의 서열이란 것을 느꼈다. 물론 그 사실을 인지해도 그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 진짜 메이크업 안 해도 되는데.”
정호준은 구시렁대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띠었고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 *
2009년이 가고 2010년 새해가 밝았다. 정호준은 재단에서 준비한 새해맞이 자선 파티에 참석한 뒤 아리아와 데이트를 즐기고 아이들을 돌보며 계획을 가다듬었고, 오성과 미래는 손을 잡고 키요타와 관련된 기사를 보도 금지하는 이른바 엠바고가 걸었다.
그리고 키요타 내부에서는 매일같이 논의가 오갔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어물쩍 넘어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키요타 모터스 임직원들의 마음속에는 위기의식이 싹텄고, 키요타 모터스 경영진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여기저기 손을 쓰며 사태를 수습하고자 노력을 기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번 나빠진 인식을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비난은 계속 쏟아졌고, 본인의 과실임에도 차량이 문제라는 식의 발언들도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한 번 불붙은 화마는 빠르게 다른 곳으로까지 영역을 넓혀 갔다. 유럽에서도 불안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보고에 이사진들 또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미국 시장에서 시작된 논란이 유럽까지 옮겨붙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우리 키요타의 이미지가 끝장납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방법을 말하세요. 방법을!”
“문제를 일으킨 7개 차량에 한해 리콜을 실시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1월이 돼서야 처음으로 사장단이 포함된 컨퍼런스에서 전격 리콜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리콜이 야기할 손해가 얼마일지 계산은 제대로 하고 하는 말입니까?!”
리콜 이야기를 듣자마자 회사가 입게 될 피해를 걱정한 다른 이사는 목소리를 높이며 분노했다.
“최소로 잡아도 30억 달러는 넘겠죠.”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답하자 말을 꺼냈던 이사는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걸 아는 사람이 리콜을 입에 담습니까!!”
“지금 같은 분위기는 이윽고 불매 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불매 운동이 시작되면 과연 손해가 30억 달러에서 그칠 거라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물질적 손해보다도 소비자의 분노를 가라앉힐 충격 요법이 필요합니다. 키요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 키요타의 브랜드 가치가 남아 있을 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사는 키요타 모터스가 49년 겪은 위기 이래 최대의 위기라며 가벼이 봐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주주나 이사들의 시선이 자리에 참석한 몇 명에게로 모였다. 시선을 받은 이들의 정체는 바로 오너 일가였다.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주주보다 재벌가의 입김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나라로 이사들이 암만 의견을 내도 큰 결정은 결국 창업주 일가의 몫이었다.
‘…….’
사장으로 취임 중인 키요타 케이고는 물론이고 그의 친척들까지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사색에 잠겼다. 이 자리에서 가볍게 결정을 내릴 정도로 사안이 가볍지는 않았기에 회의가 끝나고도 결론이 나질 않았다.
* * *
1월 초에 처음으로 리콜 이야기가 나왔다는 소식을 미리 준비해 두었던 정보원을 통해 전해 들은 정호준은 1월 14일 모하메드 알 압둘라를 불렀다.
“언제라고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다음 주쯤 결판이 날 것 같습니다.”
“그 결판은 당연히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이겠죠?”
“물론입니다. 모하메드를 부른 것도 그래서인걸요.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거 같습니다.”
오랜 기다림이 끝이 났다는 말에 모하메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만, 우리가 주식을 푸는 걸 키요타 쪽에서 눈치채면 안 됩니다. 키요타가 우리의 공격을 인지하는 시점은, 아무리 빨라도 리콜 발표 후여야 합니다.”
오성이 그랬던 것처럼 이익 극대화를 위해 정호준은 주가가 높을 때 주식 털기를 시작하고자 했다.
“조금씩 천천히 기술적으로 털겠습니다.”
모하메드는 왕자가 데리고 다니는 심복답게 정호준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를 캐치했고, 정호준이 걱정하지 않도록 확신을 주었다.
2010년 1월 14일 현재 86.98불에서 89불 사이를 오갔다. 모하메드를 포함한 공매도 팀은 주가가 88불을 넘었을 때만 주식을 조금씩 내놓으면서 천천히 주식을 흘렸다.
* * *
회사 내부에 한해서지만 어쨌든 비상경영사태를 선포한 키요타에서는 매일같이 회의가 이어졌고, 전격 리콜 의견을 제외하면 별다른 뚜렷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키요타 모터스, 가속페달의 잠김 현상을 막기 위해 8개 차종 리콜 발표!!]
키요타 모터스는 문제가 제기된 8개 차종, 약 230만 대를 리콜하겠다고 발표했다. 키요타의 대담한 결정에 미국과 유럽의 언론들은 이 사실을 앞다퉈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