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17)
오리하 다음으로 백악관의 주인이 된 트럼프는 저조한 본인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오리하를 깎아내렸고, 오리하 정부 시절 내놓은 정책들 역시 모두 갈아엎었다.
하지만, 손으로 가린다고 진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리하 정부는 미국 경제의 핵심축이자 지탱선이 된 IT 산업의 발전시키고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미국 경제를 모기지론 디폴트 사태 이전으로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훗날 양적완화라고 불리는 부양책과 금융 규제 강화를 통해 대침체의 문제점으로 부각된 금융사를 구제하고, 미래에 있을 또 다른 거품을 막기 위해 제재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오리하는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에게도 손을 벌리며 양보할 것은 양보해 가며 제대로 된 협치를 이룩했다.
조금만 삐끗했어도 대공황급 경제 위기로 커질 수 있었던 건데, 잘 풀어낸 셈이다. 양적완화에 대한 부작용은 정호준의 사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정호준은 그저 슬기롭게 헤쳐나갔다고만 판단할 뿐이었다.
그 외에도 미국 연방 정부의 적자를 줄이기 위한 개혁을 시작했다. 쓸데없는 데 사용되는 예산을 정리하고, 전임인 뉴먼 정권 때 입법된 감세 법률 중 고소득 가정에게 적용된 부분이 추가 입법 없이 자동 만료되도록 방치하여 조항의 자연소멸을 유도했다. 그리고 공약에 내걸었던 것처럼 부자 증세를 진행해 고소득 가정의 세금을 적당히(?) 늘려 건강 보험을 개혁했다.
건강 보험 개혁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고, 소득 불균형을 줄이는 정책 중 하나였다.
‘중국처럼 꽌시가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건 아니지만, 미국도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한다는 점은 같으니까.’
오리하 정부는 예산 자동 조정제를 돌입해 연방 정부의 적자를 금융위기 전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오리하의 두 번째 임기(2013~2017) 동안 첫 임기의 정책의 결실로 경제가 정상 궤도로 돌아오고 실업률도 떨어졌다. 물론 평범한 서민들이 체감하기에는 그 정도가 크게 와닿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오리하 정부의 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뉴먼 정부가 망쳐 놓은 미국의 이미지를 회복시킨 공 또한 막대했다. 뉴먼 정부는 모두가 반대하는 이라크 전쟁을 강행해 이라크를 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탓에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이미지가 나빠지게 되었고, 오리하는 나빠진 미국의 이미지를 회복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했다.
뉴먼이나 트럼프 대통령 때와 달리 오리하 대통령 시절 미국은 유럽 연합 회원국 사이에서 지지도가 상당히 높았었다.
미국 정보기관이 세계를 도청하고 있다는 프리즘 폭로 사건이 일어나고, 독일의 메르텔 수상의 휴대폰마저 해킹했다는 것이 밝혀져 회복시켰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떨어진 이미지조차도 트럼프에 비하면 훨씬 낫다는 평가가 다수를 이뤘다.
오리하는 중국 견제에 실패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름 성공적인 8년을 보낸 대통령이었다. 정호준은 ‘나름 잘했다’라고 평가를 받는 오리하의 임기를 ‘정말 잘했다’로 바꾸며 그 와중에 자신의 이득을 찾아 먹을 계획을 꾸몄다.
종종 백악관을 찾아가 행하는 컨설팅 또한 그 일환이었다.
정호준이 코인 채굴 작업장을 마련하고 채굴을 시작할 무렵, 정호준의 협조 덕에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토대를 마련한 오리하는 정호준이 건네주고 간 컨설팅을 전문가까지 불러다가 몇 번이고 검토하며 읽고 또 읽었다.
‘핵 포기를 사유로 이란의 제재를 풀어주지 말아야 하고, 사우디를 섭섭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 참 무섭군.’
아직 머릿속에서 정리도 끝나지 않은, 본인이 추구하는 방향을 정확히 꿰고 만류하는 정호준의 보고서를 읽는 오리하는 처음 읽는 게 아님에도 또다시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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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하의 정치 공약이나 지금껏 오리하가 걸어온 행보는 약자들의 편에 선 것 같은 이미지, 가슴 따듯한 정치인이란 느낌이 들지만, 오리하의 심장이 따듯해지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표를 던져 줄 미국 시민에 한했다.
외교에 있어 릭 오리하는 어디까지나 실리를 기반에 둔 정치인이었다.
OPEC의 수장이자 중동에서 가장 많은 석유가 매장된 나라로 평가받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우디 왕가가 통치하는 나라다. 사우디 왕가는 아라비아반도 토호 가문 출신으로 오스만제국이 패망해 정신이 없는 사이 아라비아반도를 꿀꺽하며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웠다.
석유 산업이 부상하고 아라비아반도에 막대한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아라비아반도는 중동에서도 가장 척박하고 쓸모없는 땅이라 평가받았다. 행정력을 투사하는 것조차 아까워 아라비아반도를 집어삼킨 역대 모든 이슬람 국가들은 사우디 가문을 포함한 몇몇 토호 가문들에게 아라비아반도의 통치를 위임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역대 전신 국가들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은 토호 가문들 중 하나로 1차 세계 대전이라는 기회를 틈타 무력으로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쓸데없는 땅이란 인식이 강했던 과거와 달리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주변국들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왕가에서 출산과 관련한 복지를 가득 챙겨 준 덕분에 인구가 가파르게 늘어나 2010년대에는 인구가 3천만을 돌파하게 됐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아라비아반도는 거주하는 인구조차 얼마 안 되는 척박한 지역이었다.
석유만 많으면 뭐 하겠는가? 국가 체급 자체가 비교가 안 되는 것을.
무력으로 아라비아반도를 집어삼켰음에도 다른 외부 승냥이들을 상대로 버틸 자신이 없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끌어들였다.
기름을 달러로 결제하도록 하는 페트로 달러 시스템을 구축해 미국의 달러가 국제 통화로 자리잡도록 만들어 주었고, 석유의 중요성이 증대될수록 미국의 패권은 견고해졌다. 페트로 달러에 대한 보답으로 미국은 신식 무기를 팔아 주고 군대를 파견해 사우디 왕가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안보를 책임져 주었다.
세월이 지나며 사우디가 체급을 키운 뒤에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안보 위협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팔레비 왕조가 쫓겨나며 신정국가가 된 이란은 다른 나라들도 이슬람의 율법(시아파)에 의해, 신앙인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신정체제를 수출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사우디 왕가에게 있어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 또한 막대한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 아라비아반도를 줄곧 탐냈다.
그런 이해관계 탓에 공화당 민주당 가릴 것 없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부터 21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미국은 근 50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와 절대적인 동맹관계를 이어 왔다.
하지만 종종 한 번씩 사우디아라비아가 병크를 터트리며 미국의 대전략을 엎어 버리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 터라, 계속 편들기만 했던 것에 지친 오리하는 지금의 상황을 조금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상하는 중국과 러시아와 이란이 붙어먹지 않고 서방세계의 편에 서게끔 할 필요가 있겠다고 계산을 마쳤다.
2010년 중반부터는 셰일오일 혁명으로 셰일오일 채굴이 가능해지면서 미국 내 석유 수요를 모두 채우고도 수출할 정도로 석유의 생산량이 막대해졌고,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관심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라, 이러한 두 흐름에 맞물려 사우디아라비아에 끌려가는 상황을 정리해 보자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이란에게 핵 포기를 약속하면 제재를 풀고 지원해 줄 것을 약속했고, 타이밍 좋게 당시 이란에 친미 정치 세력이 자리를 잡고 있던 터라 협상은 원만하게 타결되었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이란 핵 협상을 파투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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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때처럼 이란과 관계 개선을 준비하고 있던 오리하는 정호준의 컨설팅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정호준이 초능력이란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본인의 복심이 만들어 낼 부정적인 파장과 리스크가 컨설팅에는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1. 이란은 신정일체 국가로 정치인의 권한보다는 종교지도자의 권한이 더 큼. 수십 년째 종교지도자로 활동 중인 히메나이는 반미 정서가 강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미국 정부가 이란 정부와 협상을 성공리에 끝내도 히메나이는 언제든 뒤엎을 힘과 권한을 갖고 있음. 현재 친미 인사가 포진된 정부는 그저 국민들의 불만과 관심을 돌리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고 판단.
2.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수십 년에 걸쳐 이어 온 유대관계가 깨질 우려가 큼.
이란과 관계를 개선하는 미국의 행보를 사우디아라비아가 불편하게 볼 게 당연함. 정권에 따라 정치 성향이 바뀌는 구도가 뚜렷한 민주주의의 특성상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에서 다음 백악관의 주인이 나온다면, 전통적인 관계로 회귀할 확률이 높고, 그럴 경우 민주당은 사우디와의 관계만 악화한 꼴이 됨.
3. 2의 연장선으로 만약 공화당에서 대통령이 나오고,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이란과의 협상을 파기하고 전통적인 관계로 회귀할 경우, 정치 역학상 민주당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멀어지는 관계로 굳어질 가능성이 큼.
정호준은 예시로 한국을 들었다.
권좌의 주인은 바뀌었으나 6·25 전쟁 이후 보통 사람의 보통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독재가 계속되었던 대한민국은 독재자의 곁에서 정책을 도우며 정치를 이어 간 보수당과 독재를 끝낸 학생 운동가들이 주축으로 시작된 진보당으로 나뉘었는데, 보수당은 친일반북 정치 성향을 보였다. 그렇기에 본인들이 보수당을 견제하는 세력이란 것을 분명히 한 진보당은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고 일본에 사과를 받아 내는 것을 목표로 하며 친북반일 성향을 띄게 되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대통령이 된 동교동의 주인이 첫 삽을 뜬 이후 진보당과 보수당의 정치 색깔은 그렇게 굳었다.
한국의 정치 상황까지 예시로 들며 이해를 돕는 정호준의 컨설팅에 오리하는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내가 재선에 성공한다고 가정하면 8년이다. 8년 후 공화당에서 힐링턴을 이길 후보가 나올 수 있을까?’
그보다는 힐링턴이 대선에서 패배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 또한 머릿속의 일부를 차지했다. 그도 그럴 게, 클라라 힐링턴의 남편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윌리엄 제스퍼 힐링턴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남자이지 않은가? 힐링턴이 대통령이던 시절에는 그가 바람피운 것 외에는 공화당이 크게 흠집을 잡을 게 없을 정도로 미국에게 있어 완벽했던 시절이었다.
모기지론 디폴트 사태로 시작된 경기 침체 때문에 삶이 각박해지자 미국인들은 힐링턴 대통령 시절을 그리워하곤 했다.
오리하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대비하고 사우디의 석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셰일 기술에 투자하는 방향은 바람직하지만, 언제든 뒤집힐 가능성이 큼. 관계 개선을 위해 전통적인 석유 패권국 사우디와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
정호준이 적어 놓은 보고서에는 미국에 셰일오일 혁명이 터지면 남아도는 기름을 수출하는 수출국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크고, 미국이 수출을 허가하게 되면 사우디와 치킨경쟁을 벌이게 될 거란 추측마저 적혀 있었다.
게다가 정호준의 달아 놓은 의견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치킨게임을 벌이게 되면 그 과정에서 에너지 수출국인 러시아는 큰 타격을 받고, 값싼 유가는 중국의 성장을 가속화 할 거란 의견까지 적혀 있었다.
“정 대표의 안목과 판단력은 정말 무서울 정도입니다. 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건지.”
“호준 정이 이렇게 단기간에 거대한 성채를 이룩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보고서입니다.”
빅3 파산을 권고했던 컨설팅 때와 마찬가지로 오리하의 참모진들은 정호준 건네준 보고서를 보며 감탄사만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