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08)
본인이 나서서 하지 않아도 해 줄 사람이 가득한 인생을 살아온 터라 아리아는 요리를 할 줄 몰랐다. 80~90년대 한국처럼 시집가는 딸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신부수업 문화가 미국 사회에 퍼져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아리아의 요리 실력은 정호준과 결혼한 뒤에도 변화가 없었다.
뭐 사실 정호준이 비싼 월급 주고 영양사 자격증까지 보유한 셰프를 넷이나 고용했는데, 요리 못하는 아리아가 직접 요리를 하겠다고 설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정호준이 고용한 셰프들은 한국행에 동행했고, 박기태를 초대한 날에도 당연히 음식은 셰프들이 해 주었다. 친구를 초대했기에 더더욱 신경 써서 나왔다.
“미국 놀러 갔을 때도 느꼈던 건데, 진짜 요리 잘하신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이동한 박기태의 입에서 찬사가 나왔다.
“돈값 하는 거지. 셰프들한테 지급하는 연봉 말해 주면 너 진짜 기겁할걸?! 궁금하면 알려 줄게.”
“됐어. 그럼 안 들을래.”
1회차 때였다면 안 놀랄 테니까 말해 보라고 덤벼들었을 박기태는 정호준이 한국 재벌들조차 비교가 불허한 위치에 올랐음을 알고 있어서인지 손사래를 치며 듣기를 거부했다.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호기심을 부려 정보를 캐 봐야 늘어나는 건 거리감뿐이란 걸.
“호준. 차랑 다과 좀 챙겨올게요.”
정호준과 박기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리아는 후식을 챙겨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도와줄게요.”
“됐어요. 기태는 호준의 손님이잖아요. 손님 찾아왔는데, 손님맞이나 잘해요.”
정호준은 아리아를 따라 일어났지만 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난 정호준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박기태의 시선에 염려가 스며든 것을 확인한 정호준은 웃으며 말했다.
“아리아가 요리는 못해도 차나 커피는 잘 내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임신으로 몸이 무거워지는 시기부터 육아휴직을 내고 집에 머무르던 아리아는 심심풀이 삼아 커피나 차 내리는 것에 취미를 들였다. 아리아가 다도와 커피를 배우는 초창기 정호준은 실패작들을 시음하는 고문을 겪어야 했지만, 선생이 훌륭하고 워낙 재료가 좋다 보니 일련의 시행착오를 겪은 지금은 정말 수준급에 이르렀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은주 누나랑 만난 거야?”
“군대 가서 연락했지.”
“남들은 있던 고무신도 벗겨지는데, 군대에 있으면서 은주 누나를 만났다고?”
“제대로 만나기 시작한 건 전역하고도 시간이 좀 더 지난 뒤고. 상병 꺾이고 처음 연락해서 밑밥을 깔았지.”
잘나고 예쁜 이들은 모두 얼굴값을 하고 산다. 정호준의 절친 박기태 또한 그 잘난 얼굴값을 하며 사는 녀석이었다.
‘내가 수능 공부한다고 바쁘고 7급 공채 준비한다고 바쁠 때, 녀석은 할 거 다 하면서 살았지.’
정호준의 1회차 삶에서 박기태는 여자친구가 없는 때보다는 있는 세월이 더 길었다. 중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방송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박기태는 꾸준하게 연애를 했다.
동성 친구와 노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학생 때는 이성 친구를 사귀어도 오래 만나지는 못했지만, 박기태가 방송인으로 자리를 잡은 뒤부터는 그래도 최소 1년 이상은 만남을 이어 가게 되었다.
‘착각해선 안 되는 게, 기태 녀석은 변하지 않고 한결같았다는 거지.’
연애 기간이 길어진 이유는 친구 좋아하는 박기태가 변해서가 아니라 여자들이 변했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소중한 게 많아 자존심이 상해도 순수한 감정 외에 조건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성인의 연애에서 여자들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감수하며 박기태를 만남을 이어 갔다.
‘성격 빼고 조건만 보면 기태 놈은 거의 완벽했으니까.’
박기태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성격과 잘난 외모는 기본으로 탑재된 남자였고, 그에 더해 성공한 방송인으로서 중소기업의 사장들만큼이나 큰 자산을 가졌다. 높은 인지도를 가진 유명인과 연애한다는 사실은 뭔가 특별하기를 원하는 여자들의 허영심도 충족시켜 주었다.
게다가 뒤늦게나마 부친인 박남정이 영화감독으로 성공해 집안까지 업그레이드되었다. 여자들이 흔히 말하는 시월드도 없다 보니, 자기 여자에게 소홀하게 대하는 나쁜 남자 유형이라는 것만 빼면 걸릴 게 없었다.
나머지 조건들이 워낙 좋다 보니 한 가지 단점은 큰 단점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이 바꿔 보자,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는 생각으로 연애를 지속했다가 변하지 않은 박기태에게 지쳐 떨어져 나갔다.
김은주가 정호준에게 거절당했을 때 박기태는 김은주를 위로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야.’
1회차 때만큼 연애 경험이 풍부하지는 않아도, 중고등학생 때 겪은 연애 경험과 인싸 경력으로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남녀 구분 없이 실연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게 옆에서 도와주다 눈이 맞는 경우는 드물다. 케어받을 거 다 받고 실연의 상처를 극복한 이들은 대개 옆에서 도와준 이와 감정이 깊어지는 게 아닌 다른 누군가를 찾아 떠난다.
A라는 남(여)자에게 실연을 당하고 B라는 남(여)자에게 위로를 받고 C나 D와 같은 새로운 남(여)자를 만난다.
사람마다 성격과 성향이 다 다르다 보니 항상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위로해 준 사람과 눈이 맞는 경우보다는 새로운 사람을 찾아 떠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박기태는 자신의 군 생활이 끝을 향해 접어들 무렵, 정호준이 김은주에게 가한 실연의 상처가 아물었을 무렵부터 김은주에게 연락해 만남을 가졌다.
“누나 제가 많이 힘들어서 그런데, 혹시 술 좀 사 줄 수 있어요?”
첫 만남은 군 생활이 힘들어서 그런데 혹시 술 좀 사 줄 수 있냐는 부탁에서 시작되었다. 군대란 곳에 대해 지식이 없는 김은주는 상병이 꺾여 끝을 향해 달려가는 박기태가 군 생활로 스트레스를 받을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정호준 때문이지만 어쨌든 박기태와도 친분을 가진 상태였고, 박기태의 부친인 박남정과도 친분을 있었다. 그런 이유로 김은주는 박기태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고, 그게 그들의 시작이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는 말마따나 만남은 이어졌고, 만날 때마다 박기태는 조금씩 조금씩 김은주의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좀 걱정스럽긴 한데.’
김은주가 정신적으로 조금 미약하다는 것과 박기태에게 나쁜 남자 기질이 있다는 게 여러모로 걱정스러웠지만, 그러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자. 이건 두 사람의 문제잖아.’
남녀 간의 관계에 끼어드는 건 선을 넘어도 세게 넘은 행동이었다.
‘자기가 먼저 좋아해서 따라다니면서 사귀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니까, 이전과는 좀 다를 수도 있지.’
속으로 제발 그러기를 기도하며 정호준은 박기태, 김은주와 대화를 나눴다. 일단 당장은 둘 다 행복해 보였다.
긴장을 풀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만남을 즐겼고, 방송 출연을 코앞에 두게 됐을 무렵, 중국 또한 리만 브라더스발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 * *
중국 속담에 ‘마상득지 마상치지(馬上得之 馬上治之)’라는 말이 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라는 뜻을 가진 고사성어인데, 이 격언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의 1대 주석 마오쩌둥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이었다.
열세 속에서도 결국에는 국민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중국을 붉은색으로 물들인 마오쩌둥은 중국을 다스리면서 이런저런 대참사를 일으켰다.
마오쩌둥이 아예 치국에 재능이 없던 건 아니다. 대약진운동이라 일컬어진 참화의 정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 대약진운동은 공산당과 협의해 수립했던 첫 5개년 계획이 매년 최소 9% 이상 중국을 성장시킨 탓에 새롭게 세운 계획이었다.
‘큰 성공 덕에 갖게 된 자신감이 화가 됐을지도.’
농촌에서 산업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뭐 같은 논리로 시작된 제2차 5개년 계획은 대실패로 끝났다. 마오쩌둥이 실패의 책임을 지고 류사오치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권좌에서 내려와야 할 정도로 대약진운동의 실패가 일으킨 파장은 막대했다.
하지만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고,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아 권세를 누렸던 마오쩌둥은 내려놨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문화대혁명이라는 두 번째 삽질을 일으키며 권력을 되찾았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 중국을 20년 이상 뒤로 돌렸다고 하니 한국에게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배움을 얻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동물이다. 일당독재를 진행 중인 공산당이라고 이러한 큰 틀에서 벗어나진 않았고, 마오쩌둥 사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독재로 인해 발생한 폐해들이 다시 발발하지 않도록 권력을 나누고 최소한의 규제 장치를 만들었다.
이런 덩샤오핑의 노력은 3연임을 노리는 사진원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있지만 말이다. 다만 알아둬야 할 것은 사진원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 남자라는 거다.
뎡샤오핑은 권력을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을 신봉하는지 군부의 주석 자리는 죽기 전까지 계속 쥐고 있었지만 막후의 2인자로 머무를 뿐 국가주석 자리는 탐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중국 서열 1위였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덩샤오핑은 훗날 권좌에 오른 뒤 상하이방이라는 계파를 만들어 낸 장쉐민이 아닌 후민타오를 후계로 삼고 싶었으나 후민타오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리의 국가수반 자리에 앉기엔 너무 어렸다.
그 때문에 장쉐민에게 다음 후계자는 후민타오로 한다는 약속을 받고 주석 자리를 넘겨주었다. 훗날 덩샤오핑의 이 선택은 본인이 구축한 체제를 무너트리는 선택이 되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가짐이 다르거늘, 권좌에 앉으면 생각이 틀려질 수밖에 없다. 장쉐민은 마오쩌둥이 그랬던 것처럼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아 했다.
다만 그런 장쉐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덩샤오핑은 유서에 장쉐민과 약속한 것을 모두 적었다. 마오쩌둥이 일으킨 두 대참사를 수습하고 중국을 발전의 길로 이끈 덩샤오핑은 중국인들에게 위대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덩샤오핑의 유서에 떡 하니 후민타오가 차기 주석이 될 것임을 장쉐민이 약속했다고 적혀 있다 보니, 제도로 정해진 기간 이상 주석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권력의 단맛을 맛본 장쉐민은 순순히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마오쩌둥과는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바로 ‘상왕정치’였다.
장쉐민은 법으로 약속된 임기를 마치고 후민타오에게 자리를 넘겼지만 7명이던 상무위원 자리를 9명으로 늘리고, 그중 6명을 자신의 사람으로 채웠다. 군사위 주석 자리도 주석인 후민타오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부하인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에게 넘겼고, 경찰과 무장경찰, 정보기관 재판소까지 담당하는 정법위원회 총서기로 저우융캉이라는 자신의 사람을 심었다.
후민타오는 국가주석이라는 허울만 물려받을 뿐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당의 중요사항은 장쉐민에게 보고한다’라는 원칙이 암암리에 존재했다고 한다.
주요 권한을 모두 자신의 사람으로 채운 장쉐민은 뒤로 물러난 뒤에도 상왕으로서 정치에 계속 간섭했다.
후민타오는 자신을 방해하는 장쉐민과 임기 내내 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비리 등을 이유로 반격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정법위원회와 군사위원회 쪽 자리를 빼앗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권력이라 봐도 무방할 자리에 장쉐민이 박아 놓은 인사들이 물러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게 바로 2013년에 중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보시위안 사건이었다.
밑에 있는 사람은 윗사람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노력한다. 쉬차이허우와 궈보슝, 저우융캉 등은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장쉐민의 뜻이 보시위안에게 있다고 예측하고 보시위안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행보는 보시위안의 비리가 밝혀지면서 이들 또한 연루되어 있음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보시위안과 함께 사진원의 경쟁자로 일컬어지는 리커칭의 사람도 보시위안에게 줄을 섰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상황이 좋지 않을 경우 힘을 모아 쿠데타를 벌이려는 계획까지 드러나게 된다.
덕분에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모두 잘라내는 데 합의했고 재빠르게 움직여 이들을 잘라냈다. 그 때문에 사진원은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장쉐민처럼 되지는 말아야지.’
후민타오는 막후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장쉐민과 달리 사진원을 밀어주며 깨끗하게 자리에서 밀려났고 이 덕분에 사진원은 자신의 사람들을 모두 채워 넣으며 독재할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2회차는 1회차와 조금 다른 게 흘러갔다. 방법은 다르지만 보시위안이 나가리가 된 건 1회차 때와 똑같았으나, 아직 세월이 많이 남아 있어서인지 궈보슝을 제외한 정법위원회의 저우융캉과 군사위원회의 쉬차이허우는 보시위안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고, 이게 사진원에게 어떻게 작용하게 될지는 시간만이 알려 줄 답이었다.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을 유지한 채, 중국은 지방은행 붕괴라는 성적표로 사태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