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01)
일본으로부터 세계 선박 제조 시장 1위를 빼앗고 그 타이틀을 지켜온 대한민국에는 3개의 거대한 조선사가 존재했다. 3대 조선사의 정체는 오성중공업, 미래중공업, 그리고 중우조선해양이었다.
분식회계로 괘씸죄가 추가되어 대마불사(大馬不死)가 깨진 사례로 언급되는 중우그룹의 자회사였던 중우조선해양은 정부와 산업은행의 관리하에 있어 정호준의 이야기를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계산을 시작할 책임자가 만찬장에 없었지만, 오성과 미래는 달랐다.
왕자의 난 이후 미래그룹에서 나와 자신만의 성체를 쌓은 미래중공업 회장 박몽준과 오성중공업을 경영 중인 오성그룹 회장 김건희는 정호준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마다 계산을 시작했다.
불황이 가득할 미래를 알려 준 정호준은 이후 김명호 대통령에게 한국에 투자해 줬으면 한다는 부탁 아닌 부탁을 받는 걸 끝으로 화제가 바뀐 것을 인지한 김건희는 잠깐 만찬장에서 나와 조용한 곳으로 이동해 생각에 잠겼다.
김건희 회장이 정호준으로부터 전해 들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얼마나 정확할지, 만약 그렇다면 오성중공업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등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 미래중공업 회장 박몽준이 다가와 물었다.
“건희 형님, 정호준 대표가 이야기한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건희와 박몽준은 공적으로는 경쟁 상대지만 사적으로는 수십 년간 친분을 쌓은 관계였다. 지금처럼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느끼는 경우에는 종종 힘을 합치거나 생각을 공유하곤 했다.
“정 대표의 말대로라면 참 암울한 상황이지. 부정하고 싶은데, 정 대표가 말한 거라 차마 부정을 못 하겠다. 정 대표는 오성과 미래가 부친 세대부터 수십 년간 쌓아 올린 것의 몇 배를 겨우 6년 만에 쌓아 올렸잖나.”
로슬러라는 거대 세력의 사위가 돼서 로슬러의 힘을 이용하고,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되는 릭 오리하가 상원의원일 시절부터 밀어줘 민주당까지 등에 업었다.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선택함으로써 미국 정부까지 등에 업었다.
정호준을 깎아내리려고 안달이 난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 호가호위한다며 정호준을 비난했지만, 김건희는 정호준을 인정했다.
처가 덕을 보기 위해 자식에게 강요하는 정략결혼이야 대한민국 재계에서도 줄곧 이어져 온 문화다. 맨손(?)으로 시작한 정호준이 자신들보다 더한 명문가의 사위로 들어간 것 자체가 정호준의 능력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텃밭이자 최후의 보루가 되어 줄 수 있는 한국 국적을 과감하게 버리고 미국 국적을 선택한 것도, 미국인이 되어 거물을 판별하고 밀어주어 미국이란 나라를 등에 업은 것도 다 정호준의 능력이었다.
“경영자로서의 내 감도 정 대표의 말을 들은 후부터 계속 경종을 울리고 있다. 몽준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렇게 찾아온 것 아니냐?”
“귀신이오?”
대화가 이어짐에 따라 박몽준의 말은 더 편하게 바뀌었다.
“귀신이라니, 그런 말은 나보다 정 대표에게 더 어울리겠지. 그나저나 정 대표와 따로 자리를 갖고 이야기를 더 나눠 보고 싶은데, 시간을 내줄지 모르겠구나.”
“가능하겠습니까? 사내놈이 계집애들보다도 더 비싸게도 굴잖소?”
지금처럼 모두가 알법한 거대한 성공을 거두기 전에도 정호준은 시간을 내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김명호 대통령이 사전에 이야기된 것 없이 정호준을 찾아갔다가 면박을 당한 건 정·재계에선 유명한 일화였다.
“에릭 버펫이 자신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갖는 데 십수 억을 받는다지? 십수 억을 지불해서라도 자리를 한번 마련하고 싶구먼.”
“형님. 정 대표를 에릭 버펫과 같은 반열에 두는 거요? 나도 정 대표를 높이 평가하기는 하는데, 그건 나가도 너무 나가지 않았소?”
근 7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호준이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승승장구를 이어 왔지만 에릭 버펫은 수십 년간 꾸준하게 성과를 보인 사람이다.
“꾸준함은 분명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정 대표 정도로 성공한 이에게 세월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 당장 정 대표가 우리 재계를 상대로 펀드를 개설하겠다고 하면 돈 투자할 거잖냐?”
김건희의 가정 섞인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김건희와 박몽준이 조선업의 미래와 정호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김명호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만찬장에서 잠깐 나온 정호준도 독대하는 자리를 가졌다.
“약속한 대로 돈을 불려 줘서 고맙습니다.”
“계약이잖습니까? 지키는 게 당연한 거죠.”
김명호는 정호준에게 사과해야 할 일을 벌이고 감사를 표해야 할 이유도 있는 상태였다. 감사를 먼저 표현하는 게 대화를 이어 나가기 수월하겠다는 생각에 사과보다는 감사를 입에 담았다.
다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본인도 모르는 새 마음에 있던 아쉬움을 꺼내고 말았다.
“근데, 펀드를 청산할 때 세금을 조금만 더 신경 써 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한국 법인이 아닌 외국 법인이 만든 펀드에 가입해서 돈을 버는 경우 국내와 달리 수익에 대한 세금을 높게 부여했다. 대한민국은 가진 게 많을수록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나라다.
똑같은 1%여도 누군가에는 천만 원이 누군가에게는 십억이 될 수 있다.
김명호가 본인 명의로 된 건물까지 담보로 대출을 받아 마련한 320억은 펀드 청산 후 640억이 되어 그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내야 할 세금 계산서도 함께 날아왔다.
김명호가 내야 할 세금은 수십억 원. 말이 수십억이지, 수십억 원은 강북의 규모 좀 있는 6~8층짜리 건물을 매입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정호준은 김명호가 정당한 세금을 지불하도록 세법과 회계법을 전부 검토해 상황을 만들어 냈고, 그 때문에 김명호는 꼼짝없이 건물 한 채를 살 돈을 세금으로 납부해야만 했다.
“돈을 벌면 세금을 낸다. 당연한 거잖습니까? 우리의 계약은 돈을 벌어다 주는 것까지였습니다. 제가 대통령님의 절세까지 신경 써 드려야 할 이유는 없죠.”
계약대로 했다며 뭐가 잘못됐냐고 되묻는 정호준의 말에 김명호는 작게나마 분노를 느꼈다.
“그나저나 대통령님이 제게 아쉬운 소리를 하실 입장은 아닐 텐데요? 전 하이스트 반도체를 제게 넘기려고 했던 대통령님의 수작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앞에 두고 언어 순화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뱉어 내는 정호준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찔리는 게 많은 김명호는 차마 그 점을 지적하지 못했다.
“그건 한국 경제를 생각한 강병원 경제수석비서관이 마음이 급해 내린 독단이었습니다. 따끔하게 징계도 했고요.”
오히려 둘러대느라 바빴다.
“그렇습니까?”
“예, 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반문이지만 다 알고 있다는 뉘앙스에도 김명호는 철판을 깔았다.
“글쎄요. 백번 천번 양보해서 그때 그 제안이 대통령님의 의중이 섞이지 않은 아랫사람의 독단이었다 해도, 아랫사람의 실수에 책임지는 게 윗사람입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고, 미국에서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정호준은 아무리 꼬리를 잘라도 김명호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있으니 보상하라는 말을 돌려서 이야기했다. 정호준의 요구에 김명호는 잠깐 침묵하며 생각을 정리한 후 나지막이 물었다.
“무엇을 원하나?”
지금까지 존대하던 입장을 버리며 본성을 내보이는 김명호의 물음에도 정호준은 정중함을 잃지 않으며 대답했다.
“JHJ Capital은 론스O가 가진 외환은행을 인수하기 위해 협상 중에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된 상황이라 금융당국의 허가만 남았죠. 유니버셜 뱅크의 외환은행 인수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대가는 그것뿐입니다.”
이번 은행 인수에는 금융당국의 승인이 필요했다. 대한민국에는 은행과 산업자본을 분리하는 금산분리법이 존재했는데, 이런저런 긴 내용을 가진 법이지만 간결하게 이야기하면, 산업자본은 은행 주식 4%를 초과하여 보유할 수 없고(지방은행은 15%),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조건으로 금융감독위원회의 승인을 얻으면 10%까지 보유할 수 있게끔 제약한 법이었다.
정부의 뜻에 벗어나지 않고 금산분리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금융당국의 승인이 떨어지는 건 어려운 게 아니지만, 정부, 더 정확히는 대통령인 김명호의 뜻이 산업자본에 투자해 주길 바란다는 데 있어서 문제였다.
“으으음.”
JHJ Capital의 투자를 받아 경기를 살릴 계획을 준비 중이었던 김명호는 자신의 계획을 무산된 상황에 침음성을 내뱉었다.
“한국 대통령님들은 자꾸만 제 주머니에 있는 자금을 쓰거나 저를 움직이려 하네요. 노민현 대통령님께도 말씀드렸었는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JHJ Capital이 한국에 투자하길 바란다면 그만한 대가를 가져오십시오. 괜한 말이 나오지 않게 나름의 특혜를 준비해 주시고요. 잠재력이 뛰어다고 판단한 기업이 아닌 이상, 만족스러운 조건이 붙지 않으면 한국에 돈을 풀 일은 없습니다.”
남이 받는 특혜는 고깝고 받아들이기 불편하지만 본인이 받는 특혜는 달콤한 게 사람이라는 동물의 본성이었다. 정호준은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 * *
대통령과 독대 자리를 마친 정호준은 자신을 에릭 버펫과 비교하는 김건희 회장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저를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시니 몸들 바를 모르겠네요. JHJ 재단에 기부해 주시는 조건으로 식사 시간을 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신청하시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정호준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자 박몽구의 안색이 굳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마따나 계집애들보다 더 비싸게 군다는 등의 언급을 내뱉은 게 찔렸기 때문이다.
“JHJ 재단은 처음 듣는군요.”
“미국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중요시하는 편이라서요. 큰돈을 벌었으니 사회에 베풀 필요가 있어 설립했습니다.”
사실 한국의 금산분리법과 비슷한 ‘은산분리법’이라 불리는 법안이 미국에도 존재하긴 했다. 그렇기에 은행 인수를 계획한 정호준은 JHJ Capital의 회계팀, 세무팀, 법무팀을 한자리에 모아 페이퍼 컴퍼니와 펀드를 다수 설립해 JHJ Capital이 무더기로 가지고 있던 지분들을 옮기는 수술 작업을 단행했다.
뉴욕의 거대 로펌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진행했고, 다른 로펌 몇 곳이나 찾아가 크게 문제될 소지가 없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안심했는데, 정리를 하면서 정호준은 JHJ 재단에도 유니버셜 뱅크 지분을 포함해 배당금이 들어오는 주식 일부를 분산시켰다.
아리아에게 경영을 맡길 재단이 꾸준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최소한 현금이 들어오는 화수분은 마련해 줘야지.’
자기 아내를 깎아내리는 것 같아 이런 말을 하긴 뭐했지만, 로슬러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아리아의 경영 능력은 좋지 못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1회차 때 정호준은 패션기업을 창업했다가 종국에는 문을 닫았다는 기사를 본 적 있었다.
버펫이 그런 것처럼 자신과의 식사 자리를 돈을 메기고 팔면서 화수분을 또 하나 마련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 같았다.
‘이런 게 바로 내조 아닐까?’
“재단 계좌를 주시면 그쪽으로 기부하도록 진행하겠습니다. 얼마나 기부하면 자리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150만 달러 어떻습니까? 재단으로 150만 달러 입금 후 연락 주십시오. 회장님 편한 시간으로 약속을 잡겠습니다.”
현재 에릭 버펫이 식사 자리를 갖는 데 약 200만 달러는 기부받는 걸 알고 있기에 정호준은 버펫보다 조금 못한 액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