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95)
막대한 재산을 갖고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정권과도 친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세상일이라는 건 꼭 세워 놓은 계획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그 사실을 종종 체감하곤 했는데, 정호준은 또 한 번 계획이 어그러지는 경험을 맞이하게 되었다.
포보스가 정호준을 세계 최고의 부자로 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중순, 정호준은 새로운 투자를 위해 전용기에 몸을 맡겼다. 2010년대 후반, 세상의 이목을 끈 전기차 생산 기업 테슬러를 방문해 투자를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저희의 잠재력을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투자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기껏 비행기에 몸을 싣고 직접 날아왔더니 들려오는 건 거절이다. 성과도 없이 그냥 가기 싫었던 정호준은 CEO이자 최대 주주인 엘튼 머스크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JHJ Capital의 투자금을 받으면 규모를 키우고 시설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 입으로 이야기하는 게 좀 부끄럽긴 하지만, JHJ Capital은 월가와 대중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JHJ Capital이 지분을 소유한다면 일종의 홍보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부동산 디폴트 사태 이전에는 월가 트레이더들처럼 해당 분야 사람들만 알았다면 디폴트 사태 이후에는 대중으로부터 성공의 아이콘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건강을 빌미로 CEO를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JHJ가 작정하고 경영권을 빼앗으려 들면 저희 같이 작은 기업이 어떻게 버틸까요?”
물론 처음 스타트를 끊은 게 정호준이 아니란 것쯤은 머스크도 잘 알고 있었다. 월가에 그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사람이 한둘이던가? 하지만 경위가 어떻든 간에 창업자이자 CEO인 잡스를 내쫓은 지금의 상황이 머스크에겐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고자 보복을 감행한 건데, 스티븐 잡스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게 꼭 행복한 결론만 도출하는 게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강력한 반대에 할 말이 없어졌지만 정호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테슬러가 미래에 어느 수준까지 성장하는지 알고 있기에, 이대로 포기하자니 너무 아까웠다.
“월가나 실리콘밸리에 머스크 씨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친구들에게 여쭤보셔도 좋습니다. 스티븐 잡스와의 분쟁은 제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닙니다. 제가 한 건 어디까지나 반격에 불과합니다.”
“굳이 제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 않으셔도, 잡스가 먼저 시작했다는 건 파악하고 있습니다. 두 분의 분쟁은 세간의 이목을 주목시킨 대사건이었잖습니까? 당연히 사건의 경위와 전후 사정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잡스가 먼저 시작했다고 대표님이 창업자이자 CEO인 잡스를 쫓아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경영을 하다 보면 뜻과 생각이 다를 수 있는 상황이 올 텐데, 그때 제가 대표님과 반목했다가 쫓겨날 것 같아 두렵군요.”
머스크의 말에 정호준은 별다른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역지사지 꼴이 나긴 싫다는 건가?’
다만 정호준은 너도 CEO를 쫓아냈으면서 나한테만 뭐라 하냐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테슬러의 역사는 마린 에버하버트와 존 타페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배터리로 굴러가는 전기차를 만들기 위해 2003년 테슬러를 창립하고 전기차를 만들 계획으로 투자받으러 다녔는데, 2004년 이들의 비전을 인상 깊게 본 엘튼 머스크가 650만 달러를 투자한 뒤부터 테슬러의 사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스타트업 기업에게 650만 달러는 작지 않은 거금이다. 그렇다 보니 650만 달러를 투자한 엘튼 머스크는 창업자들이 가진 지분을 제외하면 최대 주주로 떠오르게 되었다.
최대 주주 겸 이사회 의장으로 훗날 모터 개발을 주도한 KIM 스트라우스를 엔지니어를 영입했고, 법률과 회계 담당자를 주선해 주기도 하며 테슬러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게다가 2005년과 2006년에 이르러선 연마다 1,000만 달러를 추가로 쏟아부으며 총 2천만 달러를 투자하고, 테슬러 마스터 플랜을 발표하였다.
페이X, 그리고 페이X 이전의 ZAP2. 두 차례 거대한 성공을 거둔 머스크에게도 초기 투자부터 2006년까지 테슬러에게 쏟아부은 돈 3천만 달러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기에 여러모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효율적으로 운영 중인지 확인 좀 해 줘.”
자동차 사업이 본래 큰돈이 들어가는 사업이라지만 늘어지는 출시 일정과 불어나는 개발 비용이 점점 부담스러워졌기에, 머스크는 좀 더 효율화하고자 회계사 출신으로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친구에게 감사를 부탁했다.
“생산 비용이 더 들어. 이대로 차를 생산하는 건 돈을 주고 차를 파는 꼴이야.”
공급망 비효율로 테슬러 로드스터의 생산 비용이 판매 가격 이상으로 불어난 것이 밝혀지자, 머스크는 테슬러 CEO 마린 에버하드를 해고하고 전문 CEO를 앉혔다가 아예 자신이 CEO가 되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테슬러 로드스터의 개발을 완료하고 출시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났는데 쉽사리 받아들인다는 게 쉬울 리 없다. 당연히 법적인 분쟁이 이어졌고, 2009년은 그 분쟁이 막 정리됐을 시점이었다.
정호준이 스티븐 잡스를 쫓아낸 것과 머스크가 마린 에버하버트를 쫓아낸 건 이유가 다르긴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과 결과는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머스크는 정호준은 필요 이상으로 경계했다.
“훗날 테슬러가 나스닥에 상장해 지분을 갖게 되시는 것까지는 제가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만, 지금 투자금을 받고 지분을 넘기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테슬러가 나스닥에 상장할 거라 확신하시나 봅니다?”
파고들 틈이 없어 괜한 심술을 부려 봤지만.
“예. 확신합니다. JHJ Capital이 우리 테슬러에 투자하려는 것도, 대표님께서 직접 저를 만나러 오신 것도, 우리 테슬러가 성공하리라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잖습니까?”
정호준의 작은 심술마저 머스크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함으로 차단했다.
“나 이후 천재로 불리는 분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오랜만에 겪은 실패였다.
* * *
호텔로 돌아온 정호준은 따듯한 물이 담긴 거대한 욕조에 몸을 담그며 생각에 잠겼다.
감정에 휩쓸려 머스크에 의해 CEO 자리에서 쫓겨난 마린 에버하버트를 만나 그의 지분이라도 사들일까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머스크의 상장 의지를 마린 에버하버트라고 모를 리 없지.’
자신을 쫓아낸 머스크에게 복수하기 위해 정호준에게 지분을 매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머스크가 성공하기만을 바랄 수도 있다. 창업자에서 지분을 가진 직원이 되어 버린 마린 에버하버트가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선 아이러니하게도 머스크와 테슬러의 성공이 필수 불가결했다.
냉정하게 생각할 줄 안다면 정호준에게 자신의 지분을 매각해도 정호준이 머스크에게 복수해 줄 수 없다는 것쯤을 금방 꿰뚫을 테고, 머스크가 그랬던 것처럼 정호준이 지분을 사들인다는 이유만으로 성공을 확신하고 지분을 안 팔 확률이 높았다.
“하아~ 큰 성공을 거둔 건 좋은데, 자꾸만 명성이 투자를 방해하네.”
실패를, 실패에서 비롯되는 좌절감을 오랜만에 겪은 정호준은 차분하게 멘탈을 수습하고 다음 일정을 위해 LAX 공항으로 향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저씨.”
공항 톨게이트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일련의 무리 중에 박남정을 찾은 정호준은 웃으며 박남정을 맞이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래, 오랜만이다. 이게 얼마만이야!!”
정호준의 인사에 박남정 또한 웃으면서 친척을 만났을 때나 보일 법한 친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나저나 다시 한번 아빠가 된 걸 축하한다. 기태 녀석도 너처럼 빨리 결혼을 하고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쪽 관련해서는 영 말이 없어. 혹시 만나는 사람 없다든?”
“글쎄요, 군대 갈 때쯤 좋아하는 사람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시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보는 눈이 바뀌는 거.”
정호준의 말에 박남정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박남정으로부터 공항 캐리어를 하나 빼앗아 끌면서 정호준은 다시 질문했다.
“그나저나 영어 공부는 많이 하셨어요?”
“적당한 회화가 가능할 정도? 강남 영어학원 고급 회화반에서 계속 공부 중이다. 네가 영어 공부에 힘쓰라고 3년 전부터 강조했잖냐?”
천만 감독 반열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지만, 영화 감독으로 두 차례 흥행에 성공하며 나름대로 영화 제작사나 투자자들 사이에서 이름값이 알려진 상태였다.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할리우드에서 영화 찍어보시려면 영어는 잘해야죠.”
“할리우드는 무슨. 내 주제에 영화를 두 번 성공시킨 것만으로도 나는 하루하루가 꿈 같은걸?”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고 그래요? 기태 녀석에게도 이야기한 건데, 야망을 가지세요.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니잖아요?”
박남정은 박기태와 마찬가지로 정호준이 전생의 은인으로 여기는 이다. 영화를 몇 개 말아먹어도 도와줄 용의가 있었다.
박남정은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정호준의 달콤한 말에 듣기 싫지는 않았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었으나 손짓을 하며 잘라냈다.
“그나저나 이 먼 캘리포니아까지 왜 날 오라고 한 거니?”
“만나게 해 드리고 싶은 분이 있으셔서요. 앞으로 한 6~7개월은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뭣! 그렇게 길게? 아니 대체 뭘 시키려고 그래? 그리고 그 이전에, 짐을 그렇게 많이 안 챙겨 왔다고! 미리 이야기라도 해 줬어야지!”
“그러면 서프라이즈 느낌이 없잖아요. 짐이야 사서 쓰면 되죠. 많이 챙겨와 봐야 짐만 되잖아요?”
박남정은 정호준에게 끌려다니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호준이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할 리 없다는 믿음 때문에 화를 내지는 않았다.
“통역사 겸 일을 도와줄 사람 하나랑 경호원을 따로 붙여 드리긴 할 건데, 아무래도 커뮤니케이션은 직접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알았으니까, 대체 뭣 때문에 부른 건지 말이라도 해 줘.”
“존 카메론 감독 아시죠?”
“타이타닉호의 비극이랑 터미네이X 찍은 양반?”
박남정의 되물음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작년에 1분기쯤 카메론 감독의 신작 시놉시스가 돌아서, 저희 JHJ Capital에서 영화에 돈을 투자했거든요.”
“얼마나?”
“제작비 전부 투자하기로 했으니까 아마 4억 달러 정도 됐던 거로 기억해요.”
“그렇게나?”
“시놉시스로만 봐도 대작의 향기가 느껴졌거든요. 남들이 파이를 나눠 가기 전에 독식해야죠.”
한화로 5,500억이 넘는 돈을 투자해 놓고 아무 일도 아닌 양 말하는 정호준 태도 때문에 박남정은 박기태가 느꼈던 거리감을 느꼈지만,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2월까지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따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슬슬 바쁜 일들은 정리돼서 아저씨 생각이 났어요. 할리우드에서는 영화를 어떻게 찍는지, 그리고 명감독은 어떻게 영화를 촬영하고 편집하는지 경험시켜 드리고 싶어서 따로 부탁 좀 했죠.”
조금 더 욕심내면 할리우드의 분위기와 기술을 배우는 것을 넘어 리벤저스 이전까지 세계 매출 1위를 기록했던 그 영화에 박남정이 이름 한 줄이라도 올리길 바랐다.
“설마 내가 갈 곳이 카메론 감독의 촬영장이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함을 내지르며 감정을 드러낸 박기내의 외침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독님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셨어요. 지금 감독님 뵈러 갈 거니까 일단 양복부터 맞추죠.”
제작비 전액을 지원할 뿐 시나리오나 배우 캐스팅에 어떤 의견도 내지 않고 카메론에게 전권을 쥐여 준 JHJ Capital의 부탁이다. 아무리 카메론 감독이 명감독이라지만 정호준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