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89)
미국 상류층 인사들은 종종 사교 파티나 자선 행사를 통해 만남을 갖고 친분을 쌓는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비슷한 지역에 거주할 때나 성립되는 이야기였다. 미국이란 나라의 영토가 워낙 넓은 터라 반대편에 기반을 지닌 이들과는 자리를 마련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다들 저마다의 스케줄을 갖고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아쉬운 게 있거나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수고를 들이기도 하지만, 한계는 존재했다.
넓디넓은 미국에서 살아가는 미국 상류층들은 대통령 취임식 같은 미국 전역의 이목의 집중되는 행사가 벌어질 때마다 교류의 장을 가졌다.
그런 이유로 취임식이 개최될 DC에 일찍 도착한 건 정호준 일행만이 아니었다.
아니,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정호준은 사실 많이 늦게 도착한 편이었다.
“대표님, 호텔 측으로부터 온 연락입니다.”
경호상의 이유로 정호준은 호텔 한 층 전체를 대관했는데, 정호준이 경호팀의 경호를 받으며 호텔에 당도하자마자 호텔 관계자들은 경호 및 일정을 담당하는 팀에게 연락해 정호준을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전달했다.
공화당, 민주당 의원들을 시작으로 만남 요청이 줄줄이 나열되었다.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나?’
수년 동안 준비했던 이벤트를 잘 마무리한 탓에 너무 긴장을 풀어 버린 모양이다. 박기태가 놀러 왔다지만 그냥 역사에 한 장면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게 후회가 되었다.
정호준의 속마음이라도 읽었는지 정호준과 함께 보고를 듣던 아리아는 입을 열어 정호준의 속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취임식에 참석할 거였으면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네요. 역시 호준에게 이야기해 줄 걸 그랬나 봐요.”
아리아는 취임식 전후로 교류의 장이 열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호준에게 충고를 하지 않는 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긴장을 풀고 편한 모습을 보여 주는 호준의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빠듯하긴 하겠지만, 사람이야 취임식 이후에 만날 수 있으니까.’
아리아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아리아가 실수한 게 있다면 그건 2008년 서브프라임 디폴트 사태 때문에 정호준이 너무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만나 봐야 하는 말은 뻔하지 않겠어요?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요.”
역시 말해 줄 걸 그랬다며 자책하는 아리아의 말에, 정호준은 고개를 저으며 아리아를 위로했다.
“기껏해야 돈 관련된 이야기나 했겠죠.”
정호준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할 말이야 듣지 않아도 뻔했다. JHJ Capital에 돈을 맡기고 싶다는 부류와 유니버셜 뱅크로부터 좀 더 좋은 조건에 대출을 받고자 하는 부류, 대출이 안 돼서 직접 만나 자비를 구하는 부류, 이렇게 셋으로 나뉠 뿐이다.
“그래도 미국 정‧재계에서 다들 한가락 하는 사람들인데, 거절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격식은 갖춰야 해요. 호준에게 만남을 요청한 사람 중에는 카갈 가문 관계자도 끼어 있잖아요? 카갈 가문과 윌마트를 경영 중인 윌 가문은 우리 로슬러나 로건 가문에서도 쉽게 보지 못하는 이들이에요.”
접대 문화가 비즈니스에 포함된 동양의 비즈니스 문화와 달리 서구권은 일에 감정을 싣는 것을 꺼려 했고, 개인의 시간을 중시한다. 그래서 접대를 받기보단 일을 처리하고 본인의 시간을 즐기는 방향으로 비즈니스 문화가 발전했다. 누군가가 떠받들어 주는 접대도 본인이 진정으로 바라는 게 아닌 이상 홀로 갖는 개인 시간만 못하게 여겼다.
하지만 비즈니스 문화가 다른 것과 별개로,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이 이룩한 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갖는다는 건 동양이든 서양이든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취임식을 마치고 DC에 좀 더 머물러야겠네요.”
아리아의 충고를 들은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곤 경호팀을 불러 호텔에 머무는 기간을 연장했다.
* * *
2009년 1월 20일.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인 릭 오리하의 취임식이 시작되었다.
‘역대 취임식 중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린 게 아닐까?’
취임식이 개최되는 DC 연방 의회 사당 인근은 취임식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인파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훗날 추산하기로는 최소 180만, 많게는 2백만이 모였다고 역사에 기록될 행사였다.
‘이만한 인파가 몰리는 걸 눈과 귀로 체감하는 건 처음이네.’
2016년 말 정순자 국정농단이 드러난 뒤 매주 열린 촛불시위가 6차에 접어들 때쯤 최대 인파가 몰렸었다. 시위 집회 측은 230만이란 막대한 인파가 몰렸다고 주장했고, 경찰은 ‘순간 최대 인원’은 50만을 조금 못 미쳤다고 추정했다.
어느 쪽의 주장이 정답이든 간에 정호준이 이런 인파가 이렇게 막대한 인파가 몰린 행사에 직접 참석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게.
‘공무원 신분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건 무리가 있었지.’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다. 행정부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행정부의 수장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외치는 시위에 나간다? 잘리고 싶어 환장한, 공무원이라 잘리진 않더라도 최소한 윗선에 찍혀 일하는 데 이런저런 애로사항을 겪게 만들었을 일이리라.
‘뭐 잘리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지만.’
오롯이 본인 명의는 아니지만 조물주 위에 건물주란 말이 나도는 세상에서 건물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정호준은 잘려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저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를 믿고 놀고먹기엔 본인의 나이가 너무 젊었기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례에 따라 민주당 출신으로 훗날 대통령까지 되는 지미 바이든 부통령이 먼저 취임선서를 시작했고, 바이든의 취임선서가 끝난 뒤 릭 오리하의 취임선서가 시작되었다.
12시 5분, 릭 오리하는 에이브러햄 링컨 제16대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했던 대로 성경에 손을 얹으며 존 로버츠 연방 대법원장의 주재 아래 취임선서를 시작했다.
“나, 릭 오리하는 최선을 다해 미합중국의 헌법을 준수하고, 보전하며, 수호하여,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기독교 국가답게 취임선서에 하나님을 찾았고 취임식에 순서에 성경책이 등장했다. 취임선서를 마치며 정식으로 임기를 시작하게 된 릭 오리하는 준비해둔 취임식 연설을 시작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우리 선조들의 희생을 기리는 마음으로, 여러분들이 제게 보내 주신 신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책무를 겸허히 생각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뉴먼 대통령께서 정권 인수 과정에서 보여 주신 아낌없는 배려와 협력, 그리고 그동안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과 미국에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기를 빕니다.”
전 대통령인 뉴먼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당면해 있는 어려움 등을 나열했고, 그러면서도 잘 헤쳐나가겠다는 비전을 이야기하며 연설을 마쳤다.
백만 명 이상의 군중이 보는 앞에서 릭 오리하 행정부가 출범했다.
* * *
취임식이 끝난 뒤 미뤄 두었던 일들을 진행하기에 앞서 정호준과 아리아는 공항에 나와 있었다. DC에 머물며 미국 상류층 인사들과 만남을 갖는 동안 할 게 마땅치 않았던 박기태의 한국 귀국행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미안하긴 뭘 미안해. 이런 기념비적인 행사를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는 내가 고마워해야지.”
정호준이 미국인으로서 살아가기로 한 시점부터 따로 시간을 내 영어 공부에 힘쓴 터라, 박기태는 정호준이 신경 써 주지 않아도 혼자 관광을 다녀도 괜찮을 정도의 영어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어 실력과 별개로 현재 DC는 관광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취임식을 구경하기 위해 200만 이상의 인구가 외부에서 건너와 치안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 혼자 가게 했잖아.”
“전용기까지 태워서 집에 보내 주는데,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라라고? 자꾸 날 염치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마라.”
괜찮다는 박기태의 말에 정호준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다행이고. 그나저나 지금 가면 언제 또 보려나.”
“올해 3학년으로 올라가니 슬슬 취업 준비를 시작해야 하니, 언제 오겠다고 딱 잘라 말하기가 그렇긴 하네.”
“방학마다 미국으로 와. 시카고 트리븐에서 인턴십 시켜 줄게. 미국 거대 신문사에서 인턴십한 경력은 네가 뭘 하든 경력으로 삼기 좋을 거야.”
“글쎄다. 일단 생각 한국 가서 고민은 해 볼게. 몸조심하고 잘 지내. 아리아도 잘 지내요. 호준이 잘 돌봐줄 거라 믿어요.”
오리하의 취임식이 끝난 다음 날 박기태는 정호준의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떠났고, 22일부터 정호준은 만남을 요청했던 미국 상류층들을 하나둘 만났다.
정호준이 예상한 대로 대부분은 돈을 투자하거나 대출을 받고 싶다는 이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간혹 예상 밖의 제안을 던지는 무리가 있긴 했다.
“작년 9월에 에릭 버펫과 함께 움직이셨던데, 다음에는 우리와도 함께 움직여 줄 수 있나요?”
카갈 가문처럼 미국을 주름잡는 가문의 관계자들은 JHJ Capital과 합착하길 바랐다. 합작 제안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투자 계획이 합리적이고 매력적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 * *
정호준이 하루하루 상류층들과의 만남을 이어 가고 있을 무렵, 백악관에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이제는 백악관의 주인이 된 릭 오리하는 비서실장 필립 이매뉴얼을 보내 초대에 격식을 차렸다.
‘대체 뭘 부탁하려고 이렇게까지 격식을 차리지?’
이매뉴얼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백악관으로 향하는 내내 불안감이 엄습했다. 실제로 정호준의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스티븐 잡스가 주주총회의 안건으로 올린 주식 분할에 동의해, 분할을 마친 뒤 자네가 보유하고 있는 엔플 주식 중 8%만 시장에 풀었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호준이 보유 중인 엔플 주식은 42.28%니 8%면 거의 20%에 달하는 양이다. 시가 총액이 3,000조 언저리까지 가는 것을 확인한 만큼 오리하의 요구는 240조를 포기하란 말과 같았다.
‘일단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일단 배경을 알아겠다는 생각에 정호준은 오리하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왜죠? 제게 그런 제안을 건넨 이유가 뭡니까?”
“자네의 컨설팅대로 SM과 벨라스키스에게 구제금융을 실시하지 않을 생각이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미시간주의 민주당 지지율이 바닥을 찍게 되겠지. 지지율 하락이 미시간주를 넘어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뭔가 소재가 필요하네.”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들이 망하면 자연스레 그 연관 산업인 자동차 부품 회사들도 망한다. 그럼 오하이오주나 펜실베니아주까지 타격을 받게 되리라.
“그게 엔플이란 말입니까?”
“자네의 인터뷰 덕분에 엔플 주식을 향한 관심은 극에 달했는데, 시장에 풀린 엔플 주식은 없네. 이 또한 국민들의 반감을 자아내고 있지.”
“주식 분할을 실시한 지 이제 4년 차에 불과한 엔플의 주식을 분할해 시장에 주식을 풀고 이목을 분산시키겠다는 거군요.”
“역시 정 대표는 명석합니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돼서 참 좋아요.”
서두만 이야기했을 뿐인데 모든 것을 파악하는 정호준의 스마트함에 오리하는 칭찬하는 뉘앙스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물론 오리하의 칭찬이 정호준에게 와닿지는 않았다.
“일단 의도는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제게 그 일에 협조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트리븐에서 발간한 신문을 읽으셨다면 잘 아실 텐데요? 제가 얼마나 엔플을 고평가하고 있는지.”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부가 강압적으로 무언가를 강요하는 건 사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독재자가 십수 년 이상 군림하는 정부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다. 평소였다면 그냥 반발하고 각을 내세우며 빠지면 그만이었다.
그러지 못하는 건 정호준이 정치를 이용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기 때문이다. 세상은 ‘Give&Take’의 논리로 돌아간다. 받아먹을 건 다 먹어 놓고 이제 와서 배 째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면 이를 정부가 이쁘게 볼 리 없었다.
임기 말 레임덕이 올 시기도 아니고 임기 초기부터 백악관과 각을 세운다? 그것도 재선에 성공하며 8년이나 백악관에서 머무를 이와? 가정만으로도 해도 소름 끼치는 상황이었다.
“정 대표는 나와 민주당에 빚이 있잖습니까? 조건을 달긴 했지만 빅3 중 하나를 인수하겠다는 제안도 했었죠. 그 대안입니다. 좋게 좋게 갔으면 좋겠습니다.”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정호준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당장 정호준이 할 수 있는 건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시간을 많이 주진 못해요. 2월 중순에 주식 분할을 안건을 주총에서 다룬다죠? 다음 주까지는 결정해 줬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