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84)
1850년대에 일라노이주에서 창업한 시카고 트리븐은 케이블 산업에 진출하며 20세기에도 승승장구를 이어 나갔었다.
트리븐 컴퍼니는 엔터테이먼트 기업인 ‘산토스 브라더스’와 손을 잡고 ‘The SCB’라는 자회사를 만들었다. ‘산토스 브라더스’는 드라마 제작, 영화 제작, 유통 등을 주업으로 삼고 있다. 영화 역사상 최초로 색을 입힌 영화를 공개한 회사였고, 영국의 대박 소설 ‘해스포터’를 실사화한 제작사로도 유명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종종 시작 전에 푸른 바탕 황금색 글씨로 ‘SB’라고 적힌 것을 본 적 있으리라.
시카고 트리븐은 그 산토스 브라더스와 합작해 ‘The SCB’를 설립했고, ‘The SCB’는 ‘뉴욕 WTIX’, ‘로스엔젤로스 CKTLA’, ‘시카고 WCN’이라는 케이블 채널을 소유 및 운영했다.
트리븐이 보유한 SCB 지분은 약 25%쯤에 불과해 트리븐이 주가 되지는 못했지만, 트리븐이 보유한 SCB의 지분은 돈을 만들어 내는 화수분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산토스 브라더스가 트리븐에게 위협이 되거나 이익을 빼앗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독단적으로 회사를 경영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덕분에 트리븐 컴퍼니는 케이블 산업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사세를 확장했다. 자금을 쏟아부어, 근거지인 일라노이주나 한창 신문사들끼리 경쟁이 심할 때 인수했던 동부 메릴랜드주에서 최대 발행 부수를 기록하고 있는 ‘볼티모어 트리븐 썬’의 자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고, 2000년대 들어서는 미국 서부 전 지역에서 팔리며 두 번째로 많은 판매하는 신문사 캘리포니아 타임즈를 발간하는 회사를 인수해 영향력을 확장했다.
신문사 외에도 일라노이주, 캘리포니아주, 메릴랜드주 등에서 명성 높은 잡지사들을 인수해 자회사로 만들었다.
‘신문왕’이라 불리기도 했던 히스트 가문만큼 거대하진 않지만, 히스트 가문을 제외하면 신문사 업계에서 거의 최고를 다퉜다. 케이블, 신문, 잡지. 그야말로 언론이라 불릴 수 있는 곳 모두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트리븐 컴퍼니였다.
‘규모를 키워서 영향력을 확대시킨 방향이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데, 경제의 흐름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게 패착이지.’
인터넷의 보급으로 종이 신문의 매출과 영향력이 하락한 21세기에 무리해서 신문사를 사들이며 확장을 거듭한 결과물이 바로 2008년 12월 델라웨어주에 낸 파산보호 신청이었다.
트리븐 컴퍼니의 파산은 금융업계를 제외하면 가장 큰 파산에 해당했고, 파산한 은행들을 모두 합쳐도 일곱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파산이었다.
* * *
부채를 전부 감당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뻔뻔하게 내뱉는 정호준의 발언에 퀸 부주지사는 부주지사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JHJ Capital이 바라는 정확한 인수 조건을 알고 싶습니다.”
“간단합니다. 트리븐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그대로 둔 채 부채 반절을 탕감해 준다는 조건으로 45억 달러에 인수하겠습니다.”
“분위기를 띄우는 조크로 듣겠습니다. 제대로 된 조건을 제시해 주십시오.”
퀸 부주지사는 정호준의 제안을 듣자마자 재고할 가치가 전혀 없다는 듯 다시 제안해 주기를 요청했다.
‘제법 강단은 있네.’
“제 조건이 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실망인데요?”
퀸 부주지사는 정호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정호준을 바라봤고, 정호준은 그 시선을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미국의 3대 신문사로 불리는 시카고 트리븐입니다. 아예 무로 돌리는 건 연방정부나 일라노이 주정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선택일 테죠. 그럼 결국 정부가 부채를 감당하고 공기업으로 변모할 거라 생각합니다.”
“트리븐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과 부동산만 합쳐도 대표님께서 제시하신 것보다는 더 나올 겁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시대가 바뀌기 전이었다면 부주지사님의 말씀이 맞을 겁니다. 시대가 바뀐 지금은 계산이 조금 많이 달라졌습니다.”
정호준은 물을 들이켜 목과 입을 적신 뒤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일단 트리븐의 화수분이 되어 주었던 ‘The SCB’는 경영 악화로 예전만큼 수익을 올려주지 못합니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점점 경영 실적이 악화하는 게 보였는데, 디폴트 사태가 결정타가 됐죠. 지주회사인 산토스 브라더스도 이번 사태에서 큰 타격을 입었잖습니까?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쁠 텐데, SCB 경영 정상화에 힘을 쏟을 정신이 있을 리 없죠.”
정호준이 말한 내용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퀸 부주지사는 달리 이견을 내뱉을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안 되는데.’
겉으로는 냉정한 척해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정호준은 냉정하게 단점을 나열하는 것을 이어 갔다.
“경기가 안 좋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중단하는 것도 신문 구독 아닙니까?”
소비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이 가장 쉽게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신문 구독, 우유배달 취소였다.
“요즘 신문사와 출판사의 파산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는 게 소비자의 소비심리를 증명하는 것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미국 3대 신문사’라 불리는 트리븐 컴퍼니란 공룡의 파산이 충격적이긴 하지만, 사실 크게 놀라운 건 아니었다. 출판업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정호준은 준비해 두었던 파일 중 하나를 꺼내 퀸 부주지사에게 건넸다.
정호준이 건넨 파일에는 출판사 파산을 다룬 기사를 스크랩해 둔 문서가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신문 수익도 예전만 못하죠. 개인적으로 저는 ‘손 안의 컴퓨터’라 불리는 애플폰을 신문 출판업계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보고 있습니다. 애플폰의 보급률이 높아질수록 신문사의 수익은 점점 떨어지게 될 겁니다.”
2000년대 대한민국 지하철은 스포츠 신문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신문들이 존재했다. 역에 자리를 잡은 편의점(?)은 신문도 상품 중 하나로 내놨고, 무료로 배포하는 신문 가판대도 존재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신문을 봤던 90년대, 2000년대 풍경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어느 순간 한국 사회에서 사라졌다.
1회차 때 미국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100%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정호준은 미국이라고 다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건비는 계속 올라갈 텐데, 매출은 점점 내려가겠죠. 트리븐이 소유한 건물들에서 임대료를 받아 적자를 메꾸겠지만, 경영 상태는 꾸준하게 악화되겠죠. 적자 운영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 갖고 있던 자산들까지 다 까먹겠네요? 트리븐의 경영 악화는 부주지사님의 정치 경력에도 흠으로 작용하게 될 거고요.”
계속해서 아프게 찔러 대는 정호준의 말에 내포된 논리는 빈틈이 없었다.
‘이대로면 말린다.’
증거까지 눈에 들이밀며 펙트로 공격하는 바람에 논리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그런 적자투성이 기업을 JHJ에서는 대체 왜 인수하려 하십니까?”
상황이나 사업 방향을 놓고 계속 이야기해 봐야 반박할 거리도 없었기에, 퀸 부주지사는 논제를 바꿨다.
“빚투성이에 적자 볼 게 유력한, 비전도 없는 기업을 인수하려는 투자자가 세상에 존재할까요?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시작한 대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40년을 살아왔지만, 자선으로 기업을 구제하는 투자회사는 단 한 번도 그런 투자자를 본 적은 없습니다.”
‘네가 트리븐을 왜 인수하려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게 필요하기 때문에 트리븐을 인수하려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 퀸 부주지사의 말에 정호준은 속으로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가졌다.
물론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는 않았다.
“예, 이 기회에 언론사를 하나 갖고 싶긴 합니다.”
“그것 보십시오. 필요하니까 인수하는 겁니다.”
순순히 인정하는 정호준의 말에 퀸 부주지사가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이어진 정호준의 말이 미소 짓는 것을 멈추게 만들었다.
“하지만 꼭 트리븐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파산하는 곳은 많으니까요.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저는 트리븐의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하지만 일라노이 정부나 연방정부는 당장에 급급할 뿐,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죠.”
회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 방향 제시는 정말 중요한 사안이다. 정호준은 그 사실을 나날이 체감 중이었다.
“적자를 보다 파산시키거나 매각할 거라면, 비전을 가진 제게 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Do not cast your pearls before swine)’고들 이야기하잖습니까? 일라노이 주정부나 연방정부가 트리븐을 경영하는 건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진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물론 공기업으로 전환하면서 전문경영인을 따로 붙여 두겠지만, 전문가가 반드시 성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당장은 그 어떤 말로도 정호준을 이길 수 없었기에 퀸은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러시죠, 다음 미팅은 언제가 좋겠습니까?”
“크리스마스 지나고 1월 초쯤 봤으면 합니다.”
정호준의 물음에 퀸 부주지사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그렇게 하시죠,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정호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악수를 청했다. 퀸 부주지사는 정호준의 악수 요청에 손을 맞잡았고, 악수를 마친 뒤 정호준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나저나 시카고의 기후가 어린아이들을 키우기에 좋은 편이 아니더군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가 그렇게 사람 살기 좋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 나라가 들어서도 될 법한 규모의 영토가 하나의 주로 존재하는 만큼 미국은 주지사의 권한이 강한 편이다. 인도만큼 막장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큰 기업을 주에 유치하거나 주를 떠나려는 기업을 앉혀 세우는 것 또한 정치적인 업적이 되었다.
“기후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은 도시에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릴수록 특히요.”
협조해 주지 않으면 회사를 이전할 수도 있다는 정호준의 협박에 퀸 부주지사는 시카고가 미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란 사실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뉘앙스로 너스레를 떨었다.
“하긴 그렇죠. 사람이 도시에 살아야죠. 교육도 중요하고 친구도 만들어줘야 하니까요.”
“현명하십니다.”
“캘리포니아의 ‘라구나 우즈’도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처럼 살기 좋다는 말을 들어 봤는데, 답사나 한번 갔다 와야겠습니다. 아! 다시 한번 만나 뵙게 돼서 반가웠습니다.”
능청스럽게 미국에서 가장 잘 사는 주인 캘리포니아를 언급하는 정호준을 보며 퀸 부주지사는 ‘대답을 부드럽게 하면 노여움을 물리친다(A soft answer turns away wrath)’라는 속담이 틀렸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당장이라도 정호준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꾹 참았다.
“최대한 JHJ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더 바랄 게 없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