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77)
새 생명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울음소리가 분만실 안을 가득 채웠고, 분만실에서 울려 퍼진 울음소리가 멎어 갈 때쯤 혹시라도 자연분만 중에 일이 생길까 실시간으로 대기했던 의사와 간호사 둘이 품에 아이를 안고 나타났다.
의사와 간호사가 나타나자마자 복도 의자에 앉아서 발만 동동거리던 정호준과 주니어는 빠른 걸음으로 맞이했다.
“아리아는, 아리아는 괜찮습니까?”
간호사들이 아이를 안고 나온 시점에서 아이들에게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생각한 정호준은 의사를 보며 산모인 아리아의 안부를 물었다.
“예, 산모와 아이들 모두 건강합니다. 다만 산모의 산통이 오래 지속된 탓에 휴식이 필요합니다. 출산 직후라 면역 쪽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병실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산통에 시달리다 지쳐 잠들었을 뿐, 당장은 건강상 문제 될 게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고 난 뒤에야 정호준과 찰스 주니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호준과 주니어의 반응을 지켜보던 의사는 간호사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한번 안아 보시겠습니까?”
주니어와 정호준의 사회적인 위치가 있다 보니, 출산을 마치자마자 새하얀 보자기에 감싼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간호사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주니어와 정호준에게 아이를 안겨 주었다.
아리아가 출산한 쌍둥이는 이란성 쌍둥이로 성별이 달랐다. 손자는 장인인 주니어의 품에 안겼고, 딸은 아빠인 정호준의 품에 안겼다.
엄마 배에서 나온 지 얼마 안 지난 터라 조심스럽게 안은 그의 딸은 붉은 핏덩이 같은 외견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진짜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구나.’
정호준이 조심스럽게 품에 안은 그의 딸은 그가 근육 운동할 때 추가하는 5kg짜리 무게 추보다도 가벼웠지만,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리디여린 신생아인 만큼 조심하느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아빠가 되었다는 것에, 내 아이가 태어나 정말 한 가정을 책임지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에 무한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하나도 아닌 둘이라 특히 그랬다.
정호준과 주니어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번갈아 안아 봤을 때쯤 의사가 주니어와 정호준을 보며 말했다.
“산모님과 아이들은 회복 경과를 지켜본 뒤 VVIP실로 이동하겠습니다.”
“예,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아리아의 출산 예정일이 코앞으로 다가오며 예비 신랑으로서 알아 둬야 할 것들을 숙지해 온 정호준은 또 한 번 그가 살아가는 곳이 한국이 아닌 미국임을 느끼게 되었다.
미국 병원은 한국 병원과 달리 신생아실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한 병원 측은 아이를 출산한 산모에게 아이를 안는 법, 모유를 수유하는 방법 등을 알려 준 뒤 부부에게 아이를 맡기고 본인들 업무를 보러 떠난다.
출산 직후 아이에게 문제가 발견되면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병원 쪽에서 케어하지만, 아이에게 이상이 없다면 산모는 출산의 고통 때문에 힘들고 지친 상태에서 곧장 육아에 돌입하게 된다. 병원에 입원하는 일정도 산모의 몸에 큰 이상이 없다면 출산한 당일 퇴원하거나, 길어야 다음 날 퇴원하는 게 평범한 미국 서민 가정의 출산 일정이었다.
본래의 적정 예정일보다 일찍 출산하는 조산의 경우 아이와 산모 본인에게 문제가 있을까 싶어 이틀에서 나흘 정도 추가로 병원에 머무르길 권고하지만, 대개의 미국 서민 가정은 그마저도 빨리 퇴원하길 희망했다.
미국의 서민층들이 그러한 경향을 보이는 이유야 간단하다.
대한민국과 달리 의료보험이 되지 않아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병원비가 부담스럽게 다가왔기 때문. 병원에 머무르는 일수가 늘어나며 받는 검사가 하나만 더 진행되더라도 수백이 깨지는 상황은 서민층은 물론이고 중산층에게까지 부담이 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한국과 다른 점이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점점 당연하게 여겨지던 산후 조리원이 미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따로 산후 조리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긴 하지만, 비싼 가격에 비해 서비스의 품질이 형편없기로 유명했다.
그렇다 보니 평범한 서민 가정은 친정엄마를 포함 가족이 찾아와 게스트룸에 머물며 산모를 도와주었고, 돈 좀 있는 중산층 또한 병원에서 운영 중인 산후 조리 프로그램을 활용하기보단 집에서 머물며 게스트룸에 상주하는 도우미를 두거나 출퇴근하는 도우미를 두었다.
아이가 간호사 품에 안겨 분만실로 돌아가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주니어는 문이 닫히고 나서야 시선을 정호준에게 돌렸다.
“축하하네. 그나저나 아이들의 이름은 정해 놨나?”
“예, 아리아와 상의 끝에 아들은 줄리우, 딸은 헤리나로 정해 두었습니다.”
정호준은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아들에게는 부친의 함자를, 딸에게는 모친의 함자를 하나씩 붙여 주었다. 아리아도 반대 없이 정호준의 작명에 동의해 주었다.
“줄리우 정, 헤리나 정이라.”
“장인과 처조부께서 허락해 주시면 아이들의 패밀리 네임을 정이 아닌 로슬러로 짓고 싶습니다. 줄리우 정 로슬러, 헤리나 정 로슬러로요.”
아이들의 이름에 ‘로슬러’를 붙여 주고 싶다는 정호준의 말에 주니어는 눈을 부릅떴다.
“그래도 괜찮겠나? 자네가 섭섭하지 않겠어?”
그저 패밀리 네임일 뿐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 때문에 주니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들네임에 정을 붙인 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정’이라는 패밀리 네임보단 ‘로슬러’라는 성이 아이들의 인생에 도움이 될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종차별 의식이 개선되는 만큼,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할 때는 정호준이 사회생활을 할 때보다는 차별이 적으리라. 하지만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가봐야 아는 법. 혼혈이란 이유로 차별받을 수도 있을 아이들에게 로슬러라는 이름은 최고의 방패가 되어 줄 거다.
본인의 말마따나 로슬러라는 패밀리 네임이 아이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더 도움이 될 거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말이다.
남편의 성을 따라가는 서구의 문화에 따라 아리아는 로슬러라는 패밀리 네임을 미들 네임으로 사용하며 패밀리 네임에 ‘정’을 붙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로슬러라는 이름을 주고 싶었다.
“내가 손주 손녀들이 로슬러의 이름을 사용하는 걸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아마 아버님께서도 좋아하시면 좋아했지, 싫어하시진 않을 걸세.”
기대하지도 않은 깜짝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찰스 주니어는 사위인 정호준을 생각해 기뻐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럼 다행이고요.”
정호준은 주니어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VVIP실로 이동했다. VVIP실에는 곱게 나이를 먹은 것 같은 중년 여성 셋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중년 여성들은 정호준과 주니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분들은.”
“자네 혼자 아리아와 아이들을 케어하긴 힘들잖은가? 돈 뒀다 뭐 하겠나, 이럴 때 써야지.”
그녀들의 정체는 주니어가 미리 수배해 둔 엘리트(?) 도우미였다.
“그렇네요, 제가 먼저 신경 썼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그리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곧이어 지쳐 잠든 아리아가 누워 있는 침대와 아이들이 누워 있는 인큐베이터가 의사와 간호사들의 손에 밀려 VVIP실로 들어왔다.
“분만실 앞에서 말씀드렸던 대로, 산모와 아이들 모두 건강합니다.”
아리아가 잠에서 깰 때까지 정호준과 주니어는 소파에 앉아 사업 이야기를 이어 갔다. 중간중간 아이들은 똥을 싸거나 이유 없이 울음을 터트렸고, 그때마다 주니어가 데려온 도우미들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똥 기저귀를 갈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분유를 뜨겁지 않게 데우는 선에서 먹이는 등 최선의 대처를 보여 주었다.
참 신기한 게, 울음 터트린 아이들은 도우미들의 품에 안긴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뚝 그쳤다. 정호준은 애기를 달래는 것도 테크닉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경험했다.
도우미들은 번갈아 가며 한 명씩 아리아의 곁을 지켰다.
“산모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아리아가 누워 있는 침대 앞에서 아리아를 살피고 있던 도우미가 소파에 앉아 있는 정호준과 주니어를 보며 말했다. 정호준과 주니어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일어나 아리아가 누워 있는 침대로 이동했다.
“정신이 들어요?”
“아리아, 어떻게 몸은 괜찮고?”
“괜찮아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힘들었을 텐데 건강하게 무사히 회복해 줘서 고마워요.”
아리아의 손을 잡으며 감사 인사를 전한 정호준은 아이들을 안고 있던 도우미들에게 손짓해 아이들을 아리아의 양옆에 눕혔다.
아리아는 자신의 양옆에 누운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조심스럽게 아주 미약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모성애를 상기시키는 광경을 지켜보던 정호준은 아리아를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장인어른과 이야기 모두 마쳤어요. 우리가 미리 이야기해 뒀던 대로 아이들의 이름은 줄리우 정 로슬러, 헤리나 정 로슬러로 정했어요.”
“줄리우, 헤리나.”
아리아는 아이들의 이름을 되새기며 쓰다듬었다.
미국 병원의 식사는 메뉴판을 정해 두고 시키는 식당 같은 느낌이었는데, 요일별, 아침, 점심, 저녁별로 가능한 식사가 한정되어 있었다. 아리아는 VVIP 환자라 딱히 그런 제약에 휘둘리지 않았지만.
‘피자, 와플, 샌드위치, 햄버거, 감자튀김, 머핀. 부리또, 블루베리. 음료로는 콜라도 있어? 무슨 환자식이 이래.’
환자식이라는 개념이 따로 없는 건지, 산모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건지.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몸을 따듯하게 해 줘도 모자랄 판국에 차가운 것, 그것도 탄산을 아무렇지 않게 파는 병원식을 정호준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식사부터 해요. 먹을 기운이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먹어 두는 게 회복에 좋을 거예요.”
전화로 셰프에게 연락해 전복죽과 미역국을 준비한 정호준은 보온병에 담긴 것들을 덜어서 따듯하게 데운 뒤 아리아에게 건네주었다.
* * *
[JHJ Capital CEO 정호준, 득남, 득녀!]
정호준의 득남, 득녀 소식은 미국과 한국 언론에 오르내렸다.
⌎ 태어나 보니 아빠가 100조를 넘게 보유한 재벌이네. 부럽다.
⌎ 외할아버지는 로슬러, 아빠는 금융 재벌. 대체 어떤 기분일까?
⌎ 축하드립니다.
순수하게 축하 댓글을 남겨 주는 이들부터 정호준의 자식을 부러워하는 댓글까지, 기사에는 이런저런 댓글이 달렸다.
- 대표님, 아버지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 축하해요 정!
- 아빠가 된 걸 축하하네. 한동안 고생 좀 하겠구먼.
- 이제부터 고생 좀 하겠습니다. 각오 단단히 하십시오.
조나단과 자넷, 위즈니악, 오리하를 시작으로 JHJ Capital 관계자들과 정호준이 투자한 스타트업 관계자들로부터 아빠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문자가 가득 와 있었다.
- 선거 운동 중이라 바쁘실 텐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낙 문자가 많이 와서 직원들에게까지 감사 인사를 전하진 못했지만, 오리하와 위즈니악 같이 중요한 이들에게 온 문자에는 모두 답신을 보냈다,
바다 건너에 위치한 김명호 대통령에게서도 축하 메시지가 왔는데, 그건 상큼하게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