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63)
아리아의 헛구역질에 누구보다 놀라서 호들갑을 떠는 사람은 파티장에서 단둘뿐이었다. 바로 남편인 정호준과 정호준의 장인인 찰스 로슬러 주니어, 이렇게 두 사람.
찰스 로슬러가 정호준과 아리아에게 증손을 보여 달라며 압박을 하긴 했지만, 사실 찰스 로슬러는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았다. 장남인 찰스 주니어가 자식을 늦게 본 터라, 딸들을 통해 증손주와 증손녀를 봤기 때문이다.
누가 더 소중한가를 놓고서야 비교할 수는 없다. 모두가 소중하니까. 다만 처음 증손을 가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큼 떨리고 감동스럽지는 않다는 말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간에 처음이 그래서 의미가 있는 거다.
정호준과 찰스 로슬러 주니어가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이며 이브인 24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예약도 안 잡고 진료가 가능하겠습니까? 게다가 오늘 크리스마스인데.”
정호준은 자신과 아리아를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는 찰스 주니어를 보며 질문했다.
북미권 국가들은 대게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1월 1일까지 긴 연휴를 보낸다. 예외가 있다면 의료업계 정도일 거다. 빨간 날에도 사람은 다치고 죽어 나갈 수 있기에, 사람 목숨이 달린 의료업계 종사자들은 짬 혹은 순환 근무와 추가 수당을 지급하며 일할 사람을 구했다.
‘빨간 날 일하면 보통 2배 이상의 시급을 지급하던데, 의료업계니까 더 주려나?’
“내가 낸 기부금이 얼마인데 문을 안 열겠나? 내 주치의와 동생인 리차드를 통해 이미 말해 뒀네.”
정호준의 장인인 찰스 로슬러 주니어의 동생, 리차드 로슬러는 금융업계가 아닌 의료업계에서 종사하고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리차드 로슬러 또한 공부도 잘했다는 뜻이다.
존 홉킨스 의과대학에 도착한 뒤 찰스 주니어가 앞장서서 걸었고, 서로 팔짱 낀 아리아와 정호준이 주니어의 뒤를 따라 걸었다.
주니어를 따라가다가 정호준은 보고 말았다. 출산이 임박한 급한 상황도 아니고 그저 아이가 제대로 잉태됐는지, 산모는 건강한지 확인하는 작은 검사에 산부인과 전문 인력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는걸.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슬러 주니어님.”
“오랜만이오 헥스 원장. 쉬는 날 이렇게 요란을 떨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의과장에게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나도 그러길 바라네.”
존 홉킨스 의과대학 뉴욕 지점 병원장까지 나와 있었다. 추수감사절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휴일인 25일 크리스마스 당일에 말이다. 한국으로 치면 추석이나 설날 당일에 병원장이 나온 거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이러한 모습을 통해, 미국도 한국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다른 게 있다면, 로슬러 일가가 가진 힘이 오성가와 같은 재벌가들이 지닌 힘보다 더 거대하고 강력하다는 것 정도? 로슬러라는 이름이 이어진 세월을 생각하면, 사실 문민정부 출범으로 자유를 찾게 된 한국의 재벌가들이 십수 년도 안 돼서 그 정도 위상을 갖게 된 게 신기한 일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혹시라도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뛰어난 엘리트 의사들과 행정 인력들이 모인 존 홉킨스 병원인데 문제나 불편한 게 생기겠나?”
“죄송합니다, 실언했네요.”
“농담일세. 신경 써 줘서 고맙네.”
사람 잡을 것 같은 농담을 입에 담는 장인을 보며 작게 고개를 저은 정호준은 의사들의 안내에 따라 산부인과로 향했다.
산부인과에 당도한 후 의사, 간호사, 행정 인력들의 도움을 받아 몇 개의 검사를 빠르게 진행했고 주니어, 아리아와 함께 의사의 앞에 앉았다.
“축하드립니다. 임산 6주 차십니다.”
‘내가 아빠가 되다니.’
정호준은 초음파 사진과 함께 임신 6주 차라는 말을 듣고 난 뒤에야 자신이 정말 아빠가 됐다는 실감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책임감과 기쁨,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감정에 정호준은 얼을 탔다.
“축하하네, 사위. 아리아. 고생 많았다”
찰스 로슬러의 격한 축하를 받은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감사합니다. 아리아 고마워요.”
“저, 그런데.”
첫 자식(손주)에 기쁨을 나누고 있는데 불안하게 만드는 의사의 사족이 들려왔다. 그에 기쁨 가득했던 찰스 주니어와 미소짓던 정호준의 표정이 불안하게 바뀌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괜시리 불안하게 만드는 사족에 정호준이 표정을 굳히며 따져 물었다. 걱정과 염려가 가득 담긴 정호준의 물음에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산모나 아이의 상태는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산모께서 쌍둥이를 가지셨다는 겁니다.”
“예? 뭐라고요?”
“축하드립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정호준의 멍청한 되물음에 의사는 축하 인사를 건네며 다시 한번 답해 주었다. 다시 한번 대답해 줬음에도 정호준은 멍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으하하. 일타이피(Kill two birds with one stone)를 했다고? 이거 투자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밤일도 잘하는가 보구먼!”
찰스 주니어는 넋이 나간 것 같은 정호준의 등을 두드렸고, 고통을 느낀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쌍둥이도 일란성, 이란성으로 나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일란성인가요, 이란성인가요?”
“일란성, 이란성 여부는 당장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보통 임신 7주부터 14주 이전에 초음파 시술을 통해 태반과 융모막, 양막의 수를 검사해 확인하는 거라서요. 쌍둥이가 일란성 이란성인지 알고 싶다고, 검사를 너무 빨리해 버리면 기형아나 임신 합병증 등을 유발할 우려가 있습니다.”
기형아나 임신 합병증으로 아리아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에 주니어와 정호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쌍둥이인 것까지만 확인하시고, 좀 더 시간을 보낸 뒤에 검사해 보시죠.”
찰스 주니어와 정호준의 표정이 굳은 채로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의사는 황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이른 검사가 아이와 산모께 의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거지, 산모께서 젊으시고 건강하시니 기형아나 임신 합병증이 올 일은 없을 겁니다.”
주니어와 정호준, 그리고 산모인 아리아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이어 갔지만,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걱정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 * *
병원에서 나와 로슬러 저택으로 돌아온 정호준은 아리아를 침대에 앉히고는 아리아를 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감사 인사와 사과를 동시에 건네는 정호준의 말에 아리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정호준을 쳐다봤다.
“너무 빨리 엄마가 된 거잖아요.”
2007년 12월 25일 현재 정호준은 23살이었다. 미국 나이로는 1월에 생일이 지나 22살이었고. 아리아가 정호준보다 2살 연상이니 24살, 한국 나이로는 25살에 엄마가 된 셈이다.
미국의 출산 평균 연령 통계만 보면 22세 안팎으로 연령대가 낮지만 대학졸업자, 즉 고학력자들의 출산은 한국처럼 늦는 편임을 고려하면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아리아의 임신은 많이 이른 편이었다.
이후 배가 불러올 때부터 출산 후 산후 조리까지 고려하면 최소 2년 정도는 사회생활을 못 하게 되는 것. 물론 출산 후 산후 조리나 육아에 있어 돈이 있고 없고는 큰 차이를 가져왔기에, 아리아가 대중처럼 육아에 시달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불편하긴 하겠지.’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요. 내 선택이었는데. 나는 내 아이들한테 젊고 예쁜 엄마가 될 수 있어서 좋으니까 그런 걱정하지 말아요.”
정호준이 왜 사과하는지를 알아챈 아리아가 정호준에게 핀잔을 주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기 전까지 계속 일할 거니까 집에 있으라고 하지 마요.”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는데, 힘들지 않겠어요?”
“집에만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일하고 운동하는 게 훨씬 건강에 좋대요. 아직 몸이 무거워진 것도 아니고, 무거워지고도 호준이 조금만 배려해 주면 되죠. 이번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그동안 호준이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 보고 싶어요.”
아이를 둘이나 잉태한 채 일하겠다는 아리아의 선언에 정호준은 걱정이 앞섰으나 이번 사태를 끝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아리아의 바람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해요.”
내 아이를 둘씩이나 가진 마눌님께서 하고 싶다는 데 정호준이 어떻게 말리겠나. 게다가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에 아리아를 두는 게 혹시 있을지 모를 비상사태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호준, 나 유바리 멜론이 먹고 싶어요.”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사 올 테니까.”
‘보통 임신하면 신 게 땡긴다는데, 아리아는 좀 다르네.’
뉴욕행에 동행한 경호팀이나 비서를 시킬까 잠깐 고민했지만 성의를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정호준은 직접 나섰다.
‘무슨 과일이 이렇게 비싸?!’
멜론도 무슨 멜론을 먹고 싶은지 품종까지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아리아의 디테일에 한 번 놀라고, 유바리 멜론의 가격에 또 한 번 놀랐다.
유바리 멜론은 마트에서 파는 멜론 수준이 아니었다. 1,000만 원은 아득히 상회하는 고가 멜론 품종이었다. 백화점을 가 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먼저 장인인 주니어에게 도움을 구했다. 정호준의 도움 요청에 주니어는 미국 재벌 가문 중 20위 안에 꼽히는 허튼 가문의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HEH’가 허튼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었군요?”
허튼 가문은 미국의 유통재벌 가문으로 미국에만 340개의 체인점을 운영 중인 재벌가였다. 단순히 유통업만 맡는 게 아닌 식품, 도소매 사업도 함께 진행 중이라 이쪽에 부탁하면 편하게 구할 수 있을 거라나? 일단 당장은 장인인 주니어가 나서서 해결해 줬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정호준은 ‘HEH’를 경영 중인 허튼 가문과 제대로 자리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들어 본 적도 먹어 본 적도 없는 것들을 아리아가 먹고 싶다고 할 때마다 주니어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자산 규모가 수십 조에 달해도 임신한 아내가 먹고 싶다는 걸 사다 주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남자의 현실은 다르지 않았다.
* * *
정호준은 자신이 아이를 가졌음을 박기태에게 알렸다.
“축하한다, 호준아. 정말 축하해”
축하 인사를 건넨 박기태는 12월 지나고 1월이 되자마자 미국으로 올 일정을 완전히 취소했다.
“지금은 아리아를 챙겨 주는 게 우선이잖아. 나는 나중에 갈게.”
박기태 나름의 배려였고 그 말이 틀리지도 않은지라, 정호준은 고맙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월이 찾아왔다. 임신 9주 차인 1월 중순쯤 병원을 찾아가 일란성, 이란성 판별을 위한 검사를 진행했고, 이란성 쌍둥이임이 드러났다.
정호준의 개인사와 별개로 1월 말쯤부터 모기지론과 관련한 위기는 또 다른 곳에서 신음성을 터트렸다.
[모노라인 업계 1위 MBIAC(Municipal Bond Insurance Association Coporation), 업계 2위 AMBAC(American Municipal Bond Assurance Corporation) 신용등급 하락.]
채권보증회사 미국인들에게 간편하게 모노라인이라 불리는 회사들의 부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문제가 드러나는 상황을 보며 월가 전체가 미쳐 날뛰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