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62)
대한민국에게 개최된 17대 대선은 무사히 끝이 났고, 개표 방송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다.
선거일 오후 6시에 발표된 출구 조사 결과나 투표 전부터 줄곧 이어졌던 여론 조사에서 김명호 후보가 50% 안팎의 득표율로 압승을 할 것이라 예측했다.
예상 득표율 차이가 너무 커서 출구 조사 결과만으로도 김명호의 당선은 거의 확정된 분위기였다.
지상파 개표 방송을 송출하는 방송국 중 하나는 개표 상황이 이제 갓 4%를 넘긴 시점에서 ‘당선 확실’이라는 보증수표를 내찍었을 정도로. 그러나 처음부터 김명호 후보가 앞서나간 건 아니다. 해남 땅끝마을부터 개표를 시작한 터라 개표가 시작된 시점에는 진보 쪽 후보가 앞서 나갔다.
물론 개표 상황이 1%가 채 넘기기 전에 김명호가 역전했고 이후 순위가 뒤집히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득표율 43.93%로 김명호는 17대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다만 아무래도 승자가 뻔히 정해져 있는 선거라 그런지, 투표율은 저조하기 그지없었다. 70% 이상의 투표율은 항상 나와 줬던 여느 때의 선거와 달리 이번 17대 대선은 65.87%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지금까지 개최된 대한민국의 역대 대선 중 가장 저조한 투표율이었다.
대한민국 17대 대선은 정호준의 회귀 전과 비교해 달리 것들이 몇 가지 존재했다.
첫째로 1회차 때 63.03%를 기록했을 투표율이 65.87%까지 뛰었다. 둘째로 김명호 서울시장의 득표율이 줄어들었다. 본래였다면 48.67%의 득표율을 얻어 봉황 의자에 앉게 됐을 김명호는 43.93%의 득표율을 얻은 선에서 그쳤다.
그때그때 정권이나 사람을 보고 뽑는 중도층의 표심 4.74%는 진보당에서 나온 후보에게로 향한 것.
진보당에서 나온 후보가 1회차 때보다 득표율을 좀 더 기록한 건 1회차 때와 달리 노민현 정부에서 큰 사고가 덜 터졌기 때문이다. 한화로 무려 5조 원에 달하는 역대급 다단계 사기를 치고 해외로 달아났던 장희팔은 초장에 잡혔고, 엔터주 광풍이나 조수도 회장의 로보 주가 조작도 강현태에 의해 초장에 차단되어 주가를 조작하기 위해 움직이는 세력과 그에 동조하거나 자금을 대주게 된 이들만 다치는 선에서 끝났다.
황우식 박사의 줄기세포 논란 때문에 시작된 바이오 광풍이나 정호준이 바빠 잊어먹고 있었던 ‘플렌트82’ 주가 조작 사건을 제외하면 크게 터져야 했을 사건들이 안 터진 셈이다.
사건 하나하나가 개미라 불리는 소시민들의 돈을 빨아먹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며 금융당국과 정부가 무능하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던 만큼 사고가 덜 터지니 대통령이나 여당이었던 진보당을 향해 보내는 지지가 변한 것이다.
활약한 건 정호준에게 정보를 받아 직접 움직인 무소속 출신의 국회의원 강현태였지만, 힐링턴 대통령이 개헌한 탓에 월가가 폭주했고 그 폭주 때문에 서브프라임 모기지론과 파생 상품이 문제가 되어 미국 경제가 나락에 빠진 걸 현 대통령과 공화당을 탓하는 미국인들의 민심과 똑같은 정치적 논리였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챙긴다’와 비슷한 상황이랄까? 다만 돈은 잃은 사람들이 돈을 잃지 않게 된 것 외에는 그렇게 큰 의미가 생긴 변화는 아니었다. 여당이었던 진보 쪽에서 내보낸 후보의 득표율이 2~3% 늘었다고 김명호 서울시장의 압승이란 결과물이 달라지진 않았으니까.
승리가 확실시된 결코 뒤집을 수 없는 표 차이가 난 순간, 김명호는 선거캠프에서 선거운동을 도와줬던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고생 많았습니다.”
“고생은요. 축하드립니다 당선자님.”
“대한민국을 부탁드립니다!!”
“김명호!! 김명호!!”
축하 인사와 환호성이 이어졌고,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붙잡고 감사 인사를 나눈 김명호는 겉치레를 마치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깐 개인적인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예, 편히 하고 오십시오.”
혹시나 다른 이에게 전화 통화가 들릴 수도 있기에 본인의 차 안으로 들어간 뒤 전화를 걸었다. 국제전화 발신이라 통화료가 많이 든다는 경고 문장이 나온 뒤 통화 연결음이 한동안 울려 퍼졌다.
“여보세요.”
“오랜만이네, 정 대표. 나 김명호일세.”
김명호가 전화를 건 상대는 다름 아닌 정호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식 전해 들었습니다. 대선 승리 축하드립니다.”
“아직 선거가 끝난 것도 아닌데요. 더 지켜봐야하지 않겠나?”
“그런데, 어쩐 일로 연락을 주셨습니까?”
다 이긴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위치가 변했으니 더 나은 대우를 받으며 관계 설정을 다시 하고 싶어 연락한 걸 아는 정호준으로서는 김명호의 겸양이 겸양으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김명호는 정호준이 예측한 대사를 입에 담았다.
“내가 투자한 100억은 잘 굴려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때 말씀드렸을 텐데요? 자세한 내역을 알려 드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정호준은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펀드 자금을 끌어모았던 것과 똑같은 조건으로 김명호의 투자금을 받았던 기억을 상기시켰다.
“알죠, 알죠. 나도 비즈니스를 했는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위치가 바뀌었으면 뭔가 변하는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김명호의 말에 정호준은 아무 대답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호준의 침묵에 정호준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고 생각한 김명호는 계속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JHJ Capital이 8월에 한국 시장을 털어먹은 자금에 내 자금이 들어가 있게 되면 제가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정 대표가 이 정도 배려는 해 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김명호는 돈을 투자했을 뿐 투자를 진행한 건 정호준이다. 법적으로 김명호가 잘못한 건 없었으나,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은 이에게는 법 외에도 관습, 도덕, 윤리에 따라 냉험한 평가가 이어지곤 한다.
대통령이 자금을 투자한 펀드가 한국을 털어먹었다는 사실을 이슈화하기 충분한 소재였다.
“제가 일방적으로 배려해 드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주고받는 게 확실해야 하는 세상에? 배려에 대한 대가는 따로 받았으면 합니다.”
“당선자인 나와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만으로도 정 대표에게는 큰 이득 아닌가요?”
“그거야 어디까지나 제가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이야기죠.”
만약 한국이 미국처럼 대통령을 최대 2번 할 수 있게 중임제로 다시 개헌한다면 그때는 김명호의 가치가 더 오르겠으나, 단임제를 실시 중인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직책은 김명호가 정호준의 위에 서기에 부족함이 많은 자리였다.
“그리고 과연 당선자님이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게 특혜를 주실 분일까요? 베팅을 할 수 있다면 저는 후보님께서 그럴 리 없다는 것에 베팅할 것 같습니다만?”
돈 좋아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니 분명 돈은 돈대로 챙겨 가리라.
“바라는 게 뭐요?”
“2008년 이후에 제가 한국에 은행을 하나 인수할 것 같습니다. 어느 곳을 인수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전폭적인 협조를 바랍니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호준은 사실 정펀드를 가지고 김명호를 협박하겠다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마따나 김명호는 대통령의 자리에 앉자마자 관계 설정을 다시 하며 자존심을 세우려다 본전도 못 찾게 되었다.
* * *
크리스마스는 서구권에서 그 어느 날보다 중요한 명절로 인식된다. 미국에서도 그 의미가 크긴 마찬가지로 추수감사절과 함께 가장 큰 휴일이었다.
파티를 즐기기도 하지만, 설이나 추석에 한국 사람들이 그러하듯 가족들이 모두 모여 함께 식사를 즐기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찰스 로슬러 혈족들이 모두 모인 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정호준의 장인이자 장남인 찰스 주니어 외에도 둘째 아들인 리차드 로슬러나 에바게일 로슬러, 릴리 굿윈 로슬러, 에일라 로슬러 등 찰스 로슬러와 피가 진하게 이어진 직계 혈족들이(가족과 손주들) 한자리에 모였다.
딸이든 아들이든 할 것 없이 첫 결혼은 정치 명문가나 미국 재계 서열 50위 안에 들어가는 기업의 혈족과 하게끔 했기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한가락 하는 이들이었다. 정호준을 제외하면 모두 백인들인지라 정호준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뭔가 튈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요 형부. 신혼은 잘 즐기고 있나요?”
괜히 껄끄러워서 겉돌고 있는 정호준에게 아리아의 동생인 카엘라 로슬러가 살갑게 다가왔다. 노골적인 질문이 뒤따르긴 했으나 정호준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오랜만이긴, 추수감사절 때도 봤잖아.”
부끄러운 질문에는 대답 대신 아리아의 손을 잡는 것으로 대답했다.
“2달 만이면 충분히 오랜만 아닌가요?”
“글쎄, 카엘라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고 나도 회사 일에 치여 바쁘고, 장인이나 처조부께서도 일 때문에 바쁜 걸 고려하면 2달이면 충분히 짧은 거라 생각하는데?”
“그런가요? 형부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뭐 그렇다 치고, 조카는 언제쯤 보여 줄 거예요?”
또 한 번 노골적인 질문에 정호준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랑 노력하고 있으니까, 카엘라까지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으면 좋겠어. 장인이나 처조부께서 주는 압박만으로도 충분히 버겁거든. 나도 나지만 아리아가 얼마나 부담스럽겠어.”
시댁이 아닌 친정에서 주는 압박이라 좀 덜할 수도 있겠으나 미국 상류층 특유 가부장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압박감이 없을 거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닭살은! 이거 솔로는 외로워서 어디 살겠어요?”
크리스마스를 맞아서 모인 가족 모임이었으나 찰스 로슬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볍지 않았다. 찰스 로슬러는 내년이 앞으로의 10년 아니 그 이상을 책임지게 될 거라 말하며 며느리나 사위들에게 그쪽 가문에도 이야기를 전달해 힘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골드만식스나 BA(뱅크 아메리카)에 구제금융이 최대한 늦게 들어가야 하네.”
로슬러 가문이 정·재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긴 하나 그 힘이 온전하게 처조부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니니 찰스 로슬러의 부탁은 이해 못 할 게 없는 부탁이었다. 한 손보다 열손이 나은 건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부탁받은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에 이야기하겠다’, ‘한 손 보태겠다’ 등으로 대답했다.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는 걸 지켜봤기에 별문제 없이 그렇게 모임이 끝날 줄 알았다.
갑작스레 정호준을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우욱!”
치즈크림 퐁듀에 빵을 찍어 먹던 아리아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했다.
“…….”
헛구역질은 병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임신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증상이었다. 갑작스러운 아리아의 헛구역질에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얼음이 되었다가 이내 빠르게 아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하는 아리아의 모습은 ‘나 임신했어요’라고 광고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찰스 로슬러와 주니어는 재빨리 주치의에게 연락을 넣었고, 아리아에게 바짝 달라붙어서 상태를 살피는 정호준을 보며 카엘라 로슬러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조카, 이제 곧 보게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