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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덕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축구가 그의 인생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 건 아니다. 정호준은 평범한 한국 남자들과 똑같았으니까. 청소년기에 축구게임을 즐기고 그 후에는 대한민국 FC를 응원하며 치맥을 즐기고 한국 선수가 나오는 해외 경기를 찾아보는 수준.
딱 보통의 한국 남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정호준에게 왜 리버풀을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정호준은 간단하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이게 가장 최선의 선택지니까.'
1회차 때 보고 들은 미래를 토대로 짠 계획이지만 실패한 적 없는 투자자라 불리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을 정호준은 나쁘지 않다 여겼다.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건 싫었지만 그렇다고 치켜세워 주는 것까지 싫지는 않았다.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어쩌겠나. 사람이 항상 이성적으로만 살아가지 않는 것을. 정호준은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았고, 욕먹으면 기분이 다운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우승도 우승이지만 꾸준하게 적자를 보거나, 구단 경영이 실패로 인식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버킷리스트에 올라가 있기도 한 남자들의 꿈. 현실 FM을 즐기기 위해 구단주가 되었지만 실패라는 경력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라리가는 바로 아웃이지.'
라리가의 경우 중계권료 독식이란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와 중계권료 분배 비율이 수정되긴 하지만 2006년에는 중계권료를 두 클럽이 크게 나눠 먹고 남은 것을 18개의 클럽이 나눠 먹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만약 라리가 구단을 인수한다면 당장 운영부터 쉽지 않으리라.
'선수들에게 있어선 돈이 전부는 아니지. 특히 이시기는 더더욱.'
더군다나 중계권료의 반 이상, 어쩌면 70% 가까이를 나눠 먹는 두 클럽이 워낙 선수들이 가고픈 드림팀으로 유명한지라 월드클래스로 성장할 선수를 선점해 적당히 클라스를 올려놓으면 잘됐다고 고맙다며 데려갈 확률이 높았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만 있는데 미치지 않고서는 라리가에 갈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라리가가 축구를 풀어 가는 방식이 세련되고 화려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분데스리가도 탈락이지.'
어차피 우승은 바이언이라는 말이 넷상에서 나돌 정도로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팀은 절대 1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라리가는 그나마 두 팀이 경쟁이라도 하지 분데스리가는 바이언이 독식하는 느낌이 강했다.
간혹 한 번씩 바이에른 뮌헨이 우승을 놓치긴 했지만 말이다.
'뮌헨이 우승을 독식하다시피 한다지만 라리가처럼 뮌헨이 중계권료를 독식하진 않지.'
분데스리가는 라리가와 다르게 중계권료를 합리적으로 적절하게 나눠 갖는다. 최소한 다른 팀들이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은 주는 셈이다.
경쟁할 수 있게 판은 깔아 주는 분데스리가지만 그 또한 정호준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정호준은 라리가와 마찬가지로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분데스리가를 선택지에서 지웠다.
구단주의 독선을 막고 리그의 자생능력을 키우기 위해 도입한 '50+1'이라는 규칙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분데스리가는 내 몫으로 떨어지는 게 적어도 너무 적어.'
충분한 자금력을 보유하고 있어 지분을 더 사 드리고 싶어도 시민(팬)들이 경영에 참여한다는 규칙 때문에 그게 어려웠다. 구단주가 지분을 전부 소유할 수 없기에 본인의 돈을 투자해 팀을 열심히 키워 봤자 결국 남 좋은 일만 시켜 주는 꼴이 된다.
'분데스리가 팀을 인수해 우승 경쟁하겠다고 돈을 투자하는 건 기부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
자선사업을 할 거면 아픈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한테 쓰지 굳이 구단 경영이라는 사업에 쓰고 싶진 않았다.
정호준이 1회차 때 그 팀을 정말 끔찍하게 좋아했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렇지도 않잖은가?
'세리에는, 이탈리아는 그냥 싫다.'
서유럽 국가의 국민들이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세상 어느 나라든 극단적인 우익세력은 있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이탈리아는 해도 해도 너무한 나라였다. 다른 나라는 그런 이슈가 터지면 무마하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이탈리아는 그마저도 거의 안 하는 나라다.
정호준은 이탈리아인들이 밑으로 깔아 보는 황인이고 월드컵 때문에 안 좋은 감정까지 품고 있는 한국인이었다. 본인들을 싫어하는 이를 좋아할 이유는 없으니 정호준 또한 이탈리아에는 좋은 감정을 갖기가 어려웠다.
'저런 나라에 돈을 투자한다는 것 자체가 싫다.'
한국과 미국에서 축구는 국기를 달고 나가는 국가대표 경기에만 주목하는 사람이 많은 반면 남미와 유럽은 축구가 생활이었고 인생이며 신앙이었다.
축구에 죽고 축구와 사는 유럽에서 축구란 거대한 자본이 오가는 사업이었다.
잘나가는 축구팀이 지역에 있다는 사실은 관광과 소비를 촉진시켜 지역 경제에 크나큰 이바지를 할 정도로 말이다.
비호감인 나라의 구단에 투자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경제적 이득을 챙겨 줘야 할 이유가 정호준에게 없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부터 정호준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프리미어리그의 팀들뿐이었다.
'사업성이 뛰어나다면 한발 양보해 챔피언십까지도 괜찮다.'
구단 인수에 앞서 정호준은 이 사업성을 3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구단이 위치한 연고 지역의 인구가 많은지를 따졌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지만 축구 또한 팬이 없으면 축구 또한 생산성이 없는 한낱 공놀이에 불과하지.'
영국은 축구에 죽고 축구에 사는 대표적인 나라다. 연고 지역의 인구가 많다는 건 그만큼 팀의 팬덤이 튼튼하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구단의 기초체력이 뛰어남을 뜻했다.
둘째는 화제를 모을 만한 이야깃거리가 있는지 확인했다.
'스포츠는 뜨거울 필요가 있다.'
이야깃거리는 새로운 팬을 유입시키거나 주목을 집중시켜 관객을 경기장으로 데리고 오려면 그럴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셋째는 클럽이 얼마나 큰 명성을 가졌는지였다.
프리미어리그는 독보적인 세계 최고의 리그로 발돋움하게 될 리그답게 그만큼 자본과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해마다 디자인을 조금 바꿔 판매하는 유니폼의 수와 경기장 간판의 광고료 등 구단 운영 수익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명성과 성적이었다.
리스트업을 해 본 결과 세 가지 조건 중 두 개를 만족시키는 구단조차 정말 몇 존재하지 않았다. 그중 한 팀은 아예 챔피언십에 빠져 있었다.
'리즈 유나이티드, 아스톤빌라, 울버햄튼, 웨스트햄, 토트넘, 맨체스터 시티, 에버튼 FC 정도랄까?'
위의 조건을 셋 다 만족하는 경우는 총 세 팀이 존재했는데, 그중 두 팀은 절대 구단을 팔지 않을 이의 소유였다. 바로 아스날과 맨유였다.
'다행히 리버풀은 미리 정한 기준에 딱 들어맞는 클럽이지.'
리버풀은 인구 130만이 넘는 머지사이드주를 연고로 두었다. 머지사이드주를 연고로 두는 클럽은 리버풀 말고도 셋이 더 있었는데, 사우스포트 FC 트랜미어 로버스 FC. 에버튼 FC였다. 하지만 에버튼을 제외한 다른 두 팀은 2부리그인 챔피언십에도 올라온 적 없는 작은 클럽이었기에 리버풀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암흑기라는 평가를 받으며 팬들에게 비난 세례를 받고 있는 리버풀이지만 프로리그와 오랜 역사를 함께해 온 팀인 만큼 리버플은 다양하고 치열한 더비전을 다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은 팀의 이름을 들어 봤을 정도로 가진 명성 또한 거대했다.
'물론 맨체스터 시티처럼 꾸준하게 성적을 내면 결국에는 세계에도 큰 팬덤을 형성하게 되지만.'
본래 가진 명성이 거대한 빅클럽 리버풀을 인수해서 성적을 내면 시간을 훨씬 단축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시스템도 명성도 확실하게 갖춘 클럽이라 키우는 재미는 덜하겠지만 말이다.
'키우는 재미가 내 돈을 책임져 주진 않지.'
클럽을 성장시키는 데 쓰이는 돈은 FM과 같은 구단 경영 게임에서 사용하는 가짜 돈이 아닌 실제 돈이다.
정호준이 리버풀을 인수하기로 결정한 건 그런 상업적인 계산이 깔린 선택이지 결코 팬심이 아니었다.
* * *
조나단을 통해 JHJ Capital이 인수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선물 계약 체결이나 트리오플 인수처럼 인수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구단이 구단주의 것이라고는 하나 리버풀처럼 거대한 클럽은 팬들의 눈치 또한 봐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시즌이 끝나기도 전인지라 제대로 된 대답이 없었다.
'시즌 결과에 따라 가치가 더 오르거나 내려갈 테니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인수 관련 업무가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5월이 반이나 지났을 정도로 말이다.
'미국에서 와서 비행기를 너무 자주 타는 것 같아.'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 보니 새삼 전용기를 구매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정호준은 아리아 로슬러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했다.
"시끌벅적하구먼."
"사람이 많이 모였으니 소음은 당연히 발생하는 거죠."
졸업식에 가족이 참가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기에 다시 한번 불편한 동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호준은 찰스들과 함께 컬럼비아 대학교에 와 있었다.
대학 내로 들어서자 하늘색 색을 입힌 졸업 복장을 입은 이들이 여기저기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통 졸업복장은 검은색 아닌가?'
여기가 미국이라 개성이 넘치는 건지 컬럼비아 대학교가 특이한 건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찰스들과 함께 천천히 졸업식장을 향해 움직였다.
그런 정호준들을 향해 일련의 무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졸업식에 참석하실 거라 연락을 주셨으면 좀 더 빨리 인사를 드렸을 텐데요."
"이 노인네가 뭐 그리 특별한 사람이라고 바쁜 사람이 인사를 하러 온다 그러나. 볼린저 총장."
"죄송합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총장을 밭고 있는 킴 B 볼린저는 찰스 로슬러의 말을 비꼬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다시 한번 사죄를 청했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하나 마련하겠습니다."
졸업식 무대 위에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말에 찰스 로슬러는 손을 휘저으며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했다.
"정말 괜찮데도, 구경거리가 될 생각은 없네. 바쁠 텐데 준비에나 집중하라니까!"
찰스로부터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총장은 볼일을 보러 떠났다.
'세상 사람 사는 곳은 정말 다 똑같네.'
한국에서 재벌이나 국회의원이 참석했을 때 나올 법한 풍경을 확인한 정호준은 찰스들과 함께 경호원에게 둘러싸여 천천히 식장으로 이동했다.
졸업식은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띠며 시작됐다.
아리아가 성적을 잘 챙겼는지, 'summa cum laude'라는 성적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전체 수석은 못 했지만 본인의 학과 수석장학생으로 뽑혀 졸업식 무대 위에 올랐다.
한차례 수상이 끝난 뒤 무대에 앉아 있던 컬럼비아 대학 출신의 유명 인사들의 연설이 뒤를 이었다.
'지루하지 않고 뭔가 유쾌하네.'
마이크를 잡은 이들의 연설은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처럼 지겹지 않았다. 위트까지 섞어 가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설은 꽤 재미있었다.
서울대 졸업생들이 서울대 졸업장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처럼 졸업생들은 자신이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한 말들을 내뱉으며 졸업 복장을 입은 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주는 연설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