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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음!
- 일어났나요?
신음성을 뱉으면서 일어나는 정호준의 귀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깬 정호준은 커피를 내리고 있는 새하얀, 매끄러운 곡선을 확인하며 어젯밤 일어났던 일을 회상했다.
'계약서를 작성한 곳에서 술을 마셨고.'
한 병에 수천만 원은 호가할 술을 대접받아 여러 병 마신 터라 취기가 좀 올라온 상태였다.
- 오늘 밤 일어난 일은 오늘 밤으로 묻힐 거예요.
이성의 끈이 조금 흐려진 상태에서 라스베가스에서의 일탈을 합리화하는 말인 '베가스에서 일어난 일은 베가스에서 묻힌다,'라는 말을 변형해 가며 유혹하는 레이첼이란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절제력을 잃어버린 자신을 탓하며 인상을 찡그리자 그런 정호준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 피임은 확실히 했으니까 그렇게 인상 찌푸릴 거 없어요. 우리가 이 방을 사용하기 전에 당신 경호원들이 방안 탐색도 다 했고요. 밖에 경호원들이 지키고 서 있어서 뭐 따로 수작을 부릴 일도 없었어요.
'미쳤네. 내가 뭘 들은 거지? 저게 여자 입에서 나올 말인가?'
자신이 어제 말했던 대로 밤의 일은 밤에서 끝날 거라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듯한 레이첼의 말에 정호준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 아파서 찡그린 겁니다.
본래 좋은 술은 뒤끝이 적다. 필름이 끈길 정도로 마신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변명이었지만 레이첼은 속아주겠다는 듯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 그래요? 그렇다고 치죠 뭐. 커피 한잔할래요?
내린 커피를 나눠주겠다는 말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제 정말 좋았어요. 몇 년 굶주린 사람처럼 달려들던데, 마지막으로 여자랑 잔 게 언제였죠?
풉!!
성적인 것을 직설적으로 묻는 것에 익숙지 않았던 정호준은 향을 맛보던 커피를 뱉고 말았다.
경호원을 고용하기 전까지 정호준은 여자들에게 시달렸다. 정호준은 부자다. 그것도 책임져야 할 가족이 전무한 자수성가형 부자. 정호준의 옆자리를 노렸던 여자는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몇 트럭이 되었다. 남자들이 환장하는 금발 백인 다이너마이트 몸매를 지닌 여성들은 물론이고 라틴계나 흑인 미녀들까지 정호준의 옆자리를 노리고 몸을 들이밀었다.
그때마다 정호준이 그들을 유혹을 거절한 건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였다.
'일단 목적이 너무 뻔해서 기분이 나빴지.'
그도 남자인데, 그것도 혈기왕성한 20대의 몸이 됐는데 성욕이 없을 리 없다. 지금도 매일 아침마다 하반신에서 텐트를 친다. 정말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낸 거다.
'CC라는 것 또한 뭔가 거부감이 들었지.'
1회차 때의 이야기지만 정호준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두 차례 CC를 경험했다. 그리고 끝이 좋게 마무리되었던 이별은 없었다.
그의 삶의 터전이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 변해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지만.
그럼에도 이미 한번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생각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그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절제한 건.
- 목적이 뻔한 어프로치는 싫어하거든요.
정호준은 사랑의 순수함을 믿지도 않았다. 사랑의 순수함을 믿기엔 30대 후반까지 살면서 본인의 일과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볼꼴 못 볼 꼴을 다 봐왔으니까.
그렇지만 눈에 빤히 보이는 목적을 갖고 접근하는 이들을 상대로 좋다고 다 받아먹기는 또 탐탁지 않았다.
그런 정호준의 대답에 레이첼은 웃었다.
자신에게 다가온 목적이 어떻든 간에 당장을 즐기고 보는 이들이 대부분인 세상이었으니까.
- 우리 고객님께서는 큰돈 만지는 사람답지 않게, 깨끗하고 순진한 면이 있었네요?
- 놀리지 마시죠.
- 놀리는 게 아니고 감탄하는 거예요.
웃으면서 말해서 하나도 공감이 안 갔지만 정호준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레이첼은 그 말을 끝으로 정호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매혹적인 표정을 한 채로 말이다.
- 우리 고객님 성향대로면 여자를 만나기까지 시간이 걸리실 텐데, 마지막으로 한번 어때요?
오랜만의 일탈은 그렇게 뜨겁게 끝이 났다.
*****
전용기 주문을 마친 정호준은 언론을 통해 이미지를 개선하고 천재 이미지를 만든 것에 대한 과실을 따기 위해 이동을 준비했는데, 그런 정호준보다 더 빨리 움직인 곳이 있었다.
바로 정호준에게 보인 777-300ER 주문을 받은 보인사였다.
'일러도 너무 이른데?'
- 아메리칸 항공에서 근무한 에드안 헐입니다.
- 캐나다 에어라인에서 근무했던 브릭스 톰슨입니다.
- 브린 스콧입니다.
정호준은 전용기를 받을 때쯤 소개받으면 된다 생각했는데, 보인사는 사고 경력 없고 건강에도 전혀 이상이 없는 건강한 40대 중후반의 에드안 헐과 브릭스 톰슨이란 파일럿, 그리고 이제 막 쉰이 된 브린이란 정비사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용기를 넘기기 전까지 정호준이 타고 다닐 전세기도 하나 빌려준다는 제안을 했다. 물론 공짜로 빌려주겠다는 제안은 아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전세기를 빌리는 것에 대한 돈을 지불해야 했다.
'이게 보인사가 영업하는 방식인가 보네. 덕분에 쓸데없는 돈을 쓰게 됐네.'
정비 비용은 물론이고 전세기를 놔둘 공항의 격납고를 빌리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 두 사람의 연봉을 일찍부터 지급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말이다.
두 사람을 놀게 두고 월급을 루팡하게 하는 게 전세기를 빌리는 비용보다 훨씬 싸게 먹히겠지만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
바로 목숨이었다.
운동선수들이 필드에서 뛰지 못해 경기감각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의 목숨을 맡길 파일럿과 정비사들의 실력이 녹슬어 사고가 나면 이보다 멍청한 일이 있을까?
겨우 수십억 혹은 백억쯤을 아끼겠다고 본인의 위기를 자초할 이유는 없었다.
조단위의 돈을 벌었음에도 억 단위의 돈에 벌벌 떠는 소시민적인 모습을 보이는 정호준이지만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 앞에서까지 돈을 아끼진 않았다.
그런 이유로 전세기를 빌리는 걸로 보인사와의 거래를 모두 마쳤다.
*****
파일럿들과 정비사의 실력을 유지하도록 전세기 계약을 했지만 전세기를 빌리는 한편으로는 보인사가 소개해준 그들 세 사람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트리오플사에게 자체적으로 조사를 맡긴 것은 물론이고 국장들과 친분을 쌓은 친분을 활용해 미국 정보기관들(CIA, FBI, NSA, DIA, DNI)에도 조사를 의뢰했다.
- 지시하신 대로 조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정호준은 트리오플사의 조사 보고부터 정보기관들로부터 받은 조사 결과까지 전부 들춰봤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금 상태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교우관계나 가족관계, 성장력, 학력. 연애에 이르기까지 뭔가 수상한 것이 있었는지를 보고서들을 보며 교차 점검했다.
결과는 뭐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혐의없음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정호준은 그들에게 혐의없음이 적용된 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 조사를 맡긴 세 명에게 조사 이후에도 특이사항이 발생하면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 어려운 게 아니니까요.
-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기억하고도록 하겠습니다.
가족이 사업이 망해, 혹은 사고를 쳐서 갑자기 빚을 생길 수도 있고 빚을 진 애인을 만나던지, 혹은 바람 피우다 걸려 돈이 필요할 수도 있는 거다. 세상은 변수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이 돌변할 수 있는 요소는 항상 체크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서 고생하고 편집적인 거 아니냐고 누가 물어볼 수도 있다.
'목숨과 관련된 일에 사서 고생이 어딨어? 위협이 될 거 같으면 사전에 빨리 치워야지.'
본래도 안전 제일주의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정호준이 푸틴이라는 권력자가 자신을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정도가 심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
비행기를 관리하고 운용할 3인에 대한 조사를 완료한 뒤, 빌린 전세기 점검을 받았다. 보인사에 한 번, 그리고 항공 업체에 연락해 전문가들을 빌려 한 번, 그리고 브린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이중삼중으로 비행기 점검을 마친 정호준은 경호원들을 대동해 비행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한국이었다.
'다행이다.'
미리 언론을 통해 이미지를 쇄신하고 바람을 잡아놓은 덕분인지 스티븐 유처럼 공항에서 쫓겨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기자들 때문에 기자회견을 해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인천공항의 빈 회의실에 기자들을 모아 정호준은 자신이 한국을 방문한 이유를 설명했다.
[정대표, 인터뷰에서 말했던 펀드를 설립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다.]
[펀드 설립을 위해 개인 명의당 최대 3천만 원까지 투자를 받겠다 공언하다.]
저번 질의응답 인터뷰에서 정호준은 펙트에 거짓을 섞어 인터뷰를 진행했다. 거짓을 더 많이 섞긴 했지만 어쨌든 재주를 넘는 곰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은 100% 본심이었다.
'만약 내가 제안했으면 투자하겠다고 했을 수도 있지.'
33%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투자금을 받겠다고 제안했으면 저들이 돈을 투자했을 수도 있다. 자본의 규모가 워낙 커져 국내에서는 제대로 굴리기 힘든 재벌들에게 정호준은 비자금을 맡겨볼 만한 포트폴리오를 가진 이였으니까.
재벌들과 이유가 다르긴 하지만 어쨌건 법조계와 정치인들에게도 3년 투자하는 걸로 투자금을 2배로 상환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었다. 법조계 인사들이나 정치인들이 자본을 굴리는 방법은 주로 국내에서 미개발지역 다른 말로는 개발예정지나 재개발지역에 1~2년 전 미리 땅을 사들이는 땅투기라 불리는 수법이었다.
돈을 버는 건 좋지만 땅투기는 언제든지 논란거리로 떠오를 수 있는 리스크가 있는 방법이었다. 나중에 그 리스크가 어떻게 자신의 발목을 잡을지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위협을 무릅쓰지 않고 자금을 배로 불릴 수 있는 방법인데 그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재벌과 법조인, 정치인들은 내가 돈을 벌어다 주지 않아도 부자잖아. 돈을 불려줄 거면 평범한 대중들의 돈을 불려주고 싶다.'
정호준이 나서지 않아도 부자이거나 혹은 불법적인 방법을 활용해 재산을 불린 이들에게 더 큰 돈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정호준은 정치인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평범한 한 명의 국민이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만 반드시 원금을 보장해주겠다는 조건은 붙이지 않았다.
그가 손해 보는 일은 없을 테니 원금 보장을 조건으로 붙이는 편이 투자금을 끌어모으는 데 유리할 거다.
이유는 간단했다.
'투자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고 돈만 벌겠다는 놀부 심보를 내가 굳이 나서서 키워줄 필요는 없다.'
리스크를 짊어지는 판단은 최소한의 책임감이었다.
최소한의 리스크조차 감당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돈을 불려줘 봐야 결말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