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91화
그대로 멈춰 선 세베르와 달리 아이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탓에 아이의 품에 안겨 있던 꽃들이 그대로 바닥에 흩어졌다.
‘남자아이?’
아이가 홀로 다니기에는 다소 음침한 골목이었던 터라 세베르의 눈빛에 의문이 서렸다.
게다가 흰 장미라니.
그는 급히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주워 다시 품에 끌어안는 아이를 보다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아, 감사합니다.”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장미를 주워 건네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그 순진한 웃음에도 세베르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반대편으로 가려는 거라면 이 골목길보다는 큰길로 가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어…….”
세베르의 말에 아이가 눈을 깜박거렸다.
아이는 자신보다 한참 크고, 누가 봐도 고귀한 위치에 있는 사내를 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살짝 웃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제가 엄마를 마지막으로 봤던 곳이에요.”
아이의 말에 세베르의 뒤에 있던 펠릭스가 가볍게 탄식하는 것이 들려왔다.
세베르는 그제야 아이의 품에 안긴 장미의 뜻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어머니가 목숨을 잃은 곳에 추모의 뜻으로 놓으려는 것인 듯했다.
‘하지만 이런 건 보통 묘지에 놓지 않나?’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세베르는 굳이 그런 쓸데없는 것을 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신경을 쓸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남자아이는 세베르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골목의 출구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 또 여기…… 어이쿠, 다른 분들이 계셨군요.”
이번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는 세베르와 그의 뒤에 있는 펠릭스를 보고 두 사람이 범상찮은 이들임을 눈치챘는지 황급히 아이의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이 아이가 무슨 결례라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아이의 앞길을 막았으니 내 잘못이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노인은 혹여라도 고위 귀족의 심기를 건드려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두려웠는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다.
세베르는 굳이 그에 대꾸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곧 뭔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돌렸다.
“이 부근에 거주하고 있나?”
세베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노인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금세 침착함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이 부근에서 살고 있습니다만, 어찌…….”
“하면 얼마 전 이 부근에서 일어났던 폭발 사고에 대해 알고 있나?”
“폭발…… 사고 말입니까?”
세베르의 질문에 노인이 다소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세베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는지 아- 하고 가볍게 탄식했다.
“뭔가 알고 있나 보군.”
“그, 그것이…….”
그러나 노인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은 누가 봐도 일부러 정보를 숨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저, 저희도 함부로 발설을 하기가…….”
“그저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래도 안 되나?”
노인의 얼굴에 더욱더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하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럼 혹시 폭발 사고가 일어난 날 이상한 일은 없었나? 아니면 특이한 사람을 봤다거나…….”
“어? 혹시 누나를…….”
“쉿.”
그때였다.
세베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용하게 꽃을 품에 안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두 눈을 빛내며 크게 외쳤다.
그러나 그 순간 노인이 기겁하며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나 이미 때는 늦었다.
세베르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누나?”
“저희 아이가 실수를 했습니다. 착각을 한 모양이니…….”
“누나라니, 누굴 말하는 거지?”
노인이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나 세베르는 이미 아이의 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누나’란 존재는 꽤나 의외의 인물이었다.
게다가 아이의 입을 틀어막는 노인의 행동은 오히려 그것이 꽤 중요한 단서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세베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말쑥한 얼굴에 순진한 눈매를 가진 아이는 기껏해야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세베르는 최대한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누나가 누군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어…… 그, 그게…….”
“비밀이 새어 나가는 일은 없으니, 걱정 말고 말해.”
“그래, 어서 말해. 전하께서는 절대 약속한 것을 어기는 분이 아니시다.”
뒤에서 펠릭스가 한마디 거들자 아이가 힐끔 노인의 눈치를 보았다.
하나 전하라는 말에 노인의 안색은 더더욱 나빠졌다. 그는 감히 아이의 입을 틀어막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아르시스에서 전하라고 불릴 수 있는 성인 남성은 켈리어드 대공이 유일했다. 만약 그의 명령 앞에서 입을 다물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평민들에게 있어 황족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나 귀족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기실 비슷한 공포감을 주었다.
결국 아이가 이도 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노인의 눈치를 힐끔 보더니, 작게 물었다.
“진짜로……, 제가 말했다는 거 안 알릴 거죠?”
“그래.”
누구한테 알리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세베르의 대답에 아이가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날 저희는 납치를 당했어요.”
“납…… 치?”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마수가 언급된 순간부터 단순한 폭발 사고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납치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네, 저랑 엄마랑 할아버지랑 미켈 아저씨랑, 우리 다 같이 납치가 됐는데…… 저희랑 같이 납치되었던 누나가 모두를 구해 줬어요.”
“그 누나가 누구지?”
“그…….”
아이가 작게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곧 큰 결심을 내린 듯 그의 물음에 답했다.
“황녀 전하.”
“…….”
“황녀 전하께서 저희를 구해 주셨어요.”
아이의 말을 들은 세베르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속으로 읊조렸다.
‘황녀 전하께서?’
그러니까 아이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당시 마수가 있는 곳에 평민들이 납치되었고 어찌어찌하여 황녀까지 납치가 되었는데 그 상황을 그 어린 황녀가 홀로 해결을 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이 모든 일을 함구했다.
다른 건 몰라도 황녀가 납치되었다는 것은 거의 모든 기사단이 움직여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큰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커다란 사건은 그저 폭발 사고로 위장이 되어 묻혔고, 심지어 그가 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어떻게 이런 허무맹랑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마수가 있던 곳에 황녀 납치 사건이 일어났고, 심지어 황녀가 스스로 그 상황에서 벗어났다.
아무리 드래곤 로드의 딸이라고 하나 어쨌든 인간과의 혼혈이었고, 아직 어린아이였다.
황녀가 가진 재능이 하도 출중해서 홀로 벗어났다고 주장한다면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대체 왜 그에게 보고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하나만 더 묻지. 혹시 그대들에게 함구하라고 한 것이 황녀 전하신가?”
“네……. 누나, 아니, 전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미카엘!”
모든 것을 전부 말하고 있는 아이를 보다 못한 노인이 작게 이름을 불렀다. 노인의 목소리에 아이가 놀란 눈을 했다.
“어…… 어, 마, 말하면 안 되는 건가요? 하지만 비밀…… 지켜 주시겠다고 그러셨는데.”
세베르는 아이와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노인을 조용하게 번갈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황녀 전하께서 그 현장에서, 직접 함구할 것을 명령했다고.’
황실의 아이는 대체적으로 평범한 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든다. 더군다나 드래곤 로드의 아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저 그런 이유일까?’
그는 문득 머리 끈을 갖고 연무장에 왔던 그 어린 황녀를 상기했다.
발랄하게 웃는 얼굴은 누가 봐도 평범한 아이였다.
하나 그의 기억은 다시 흘러 노을빛이 우아하게 지던 시치프 숲에 닿았다.
- 그래서, 나 싫어해?
애티 나는 얼굴 위로 비낀 동글동글한 눈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양빛에 가려져 의중을 알 수 없던 눈빛.
그것을 하나하나 떠올리다가 문득 그동안 놓치고 있던 사실 하나를 알아차렸다.
그가 에스트리아를 찾던 매 순간, 에슈트가 그곳에 있었다.
- 델멘 경, 어찌 된 일이지? 나는 폐하를 뵙겠다고 했는데.
첫 만남부터.
* * *
아이리스와의 만찬은 예정대로 진행이 되었다.
나는 우아하게 예복을 차려입고 내 앞, 정확히 말하자면 인형 앞에 등장한 아이리스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앉아. 우리 둘만 있는 자리인데 굳이 그리 격식을 차릴 필요가 무어 있어.>
일부러 평소보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으나 정작 아이리스의 얼굴은 더더욱 굳었다.
나는 그녀의 절도 어린 모습을 보며 피뜩 웃었다.
왜 이렇게 구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얼굴에 자신의 감정을 잔뜩 써 붙이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리 천재라 해도 결국에는 곱게 큰 가문의 후계자임을 알 수 있었다.
곧 식사가 시작되고 모든 고용인들이 자리를 비웠다.
애피타이저부터 차례로 올라오는 음식들을 보며 나는 가볍게 웃었다.
<소공작의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 내가 단것을 싫어해서 달달한 것을 잘 올리지 않는데, 오늘은 특별히 소공작을 위해 여러 가지를 올리라고 했거든.>
“황송합니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
그렇게 읊조리며 ‘내’가 포크를 들었다. 아이리스는 그런 ‘내’ 모습에 뭔가 말하고 싶은 기색이 가득했지만, 예법에 따라 그저 묵묵히 내 말에 따랐다.
식사는 의외로 평화롭게 흘러갔다.
그사이 간간이 그녀가 최근에 성사한 거래나 들려오는 소문에 대한 칭찬을 건넸으나 그녀는 하나도 기쁘지 않은 듯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식사가 진행되고 디저트가 올라올 무렵, 그녀의 얼굴은 이미 완전히 굳어 그저 기계적으로 ‘내’ 말에 대꾸를 하고 있었다.
달콤한 디저트를 입에 넣고 대충 씹어 목구멍으로 넘긴 뒤 ‘나’는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군. 달달한 건 몇 번을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아.>
“그렇습니까.”
<인간은 가끔 이번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손을 대곤 하지.>
“…….”
<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똑같아. 인간은 어리석고, 실수를 반복하지. 그러다가 최후의 최후에는 결국 그간의 업보가 쌓여서 모든 것이 일그러진다.>
“…….”
<소공작의 아비처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