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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90화 (90/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90화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그나마 사냥 대회까지는 레르하겐의 계략이나, 하다못해 에스트리아가 짜고 레르하겐이 협조하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머리 끈까지도 그는 그 어린 황녀의 말을 적당하게 이해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이번 사건의 목적은 누가 봐도 델멘 공작가를 처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물론 델멘 공작가가 그동안 황제의 앞에서 다소 건방지게 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현재 에스트리아는 흑마법으로 인해 대부분 시간을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허술하게 타인에게 모든 걸 맡기고 이번 일을 감행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급박하게 굴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현재 에스트리아가 만에 하나의 상황을 감수하면서 다급하게 델멘 공작가를 처리해야 하는 이유를 굳이 생각을 해 내자면, 역시 하나뿐이었다.

‘델멘 공작가가, 흑마법과 연관이 되어 있나?’

그러나 정작 그런 가정을 하자 이번에는 또 다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진짜로 이 모든 것이 흑마법과 연관이 되어 있다면, 더욱더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어쨌든 현재 에스트리아가 정신을 잃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닮은 인형을 움직이고 있는 이는 레르하겐일 것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그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황실에 없었던 레르하겐이 폐하가 어떻게 귀족을 대하는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전부 따라 한 인형을 만들 수 있다고?’

게다가 레르하겐의 성정을 아는 에스트리아라면 이렇게 쉬이 권력 암투를 야기할 수도 있는 일을 맡길 리가 없었다.

레르하겐은 세베르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강하지만, 귀족들 사이의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라거나 권모술수, 황권의 중요성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이였다.

‘그녀가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세베르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만약 레르하겐이 아니면, 누가?’

그 누가 에스트리아가 꾸민 계략을 완벽하게 이해하여 실행에 옮기고, 알현실에서 에스트리아와 똑같은 반응을 보이며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에스트리아의 신임을 받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 사람이, 있긴 한가?

그렇게 생각하던 세베르가 복잡한 눈길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허리춤에 있던 검 끝이 창가와 살짝 스쳤다.

툭.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검 손잡이에 닿았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있긴 하지.’

에스트리아가 꾸민 계략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녀의 의도에 따라 흐름을 통제하고, 심지어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인형이 움직이도록 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에스트리아가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

에스트리아.

그녀 본인이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세베르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만약 그녀가 내게 알린 것과 달리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그래서 지금까지 흑마법의 배후를 쫓고 있었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의문은 해결이 돼.’

다만 그렇게 된다면.

‘왜?’

왜 굳이 이런 연극을 하는 거지?

세베르는 저도 모르게 검 손잡이를 한번 쓸었다. 그는 에스트리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귀족들을 상대로 장난질을 하는 ‘진짜 폭군’이 아니었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운 그녀의 걸음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타인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이유를 굳이 꼽자면 몇 가지 있었다.

큰 사고를 당해 누구도 만나지 못할 만큼 흉측한 몰골이 되었다거나.

혹은 갑자기 다른 모습이…….

그때였다.

“전하.”

조금 전에 나갔던 펠릭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세베르가 고개를 돌렸다.

들어와-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펠릭스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방금 마법사들이 수도에서 마수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한데…….”

“한데?”

“며칠 전 그곳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었다고 합니다.”

“폭발 사고? 그런데 왜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지?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면 당연히 기사단에도 연락이 갔을 테고, 그럼 기사단장인 내게도 보고가 올라오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건…….”

펠릭스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가 난감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경비대 또한 모른다고 합니다. 그저 우연히 폭발 사건이 일어났고, 잘 마무리가 되었다고만 할 뿐 세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

“전하, 저희에게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함구 명령을 내린 분은…….”

“폭발이 일어난 곳이 어디라고 했지?”

“일전에 감사절 축제가 열렸던 중앙 광장에서 남서 방향으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창고라고 합니다.”

“그쪽으로 가지.”

“지금 말입니까?”

“그리고 마수의 흔적을 추적해 낸 마법사 또한 그쪽으로 보내.”

“알겠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서둘러 일을 진척시키는 듯한 주군의 모습에 펠릭스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 대공 전하?”

갑작스러운 세베르의 등장에 경비대는 발칵 뒤집혔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어린 황녀가 연루된 사건으로 인해 십년감수를 했는데 이번엔 대공이 등장하다니.

기사단과 달리 대부분 시간을 수도의 치안과 분쟁 따위를 해결하는 데 쓰는 그들은 웬만해서는 고위 귀족이나 황족을 영접할 기회가 없었다.

당황한 얼굴로 부랴부랴 예를 차렸지만 정작 마차에서 내린 세베르는 더없이 평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폭발이 일어난 곳이 어디지?”

“네?”

“감사절 기간에 폭발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그게 어디냐 물었다.”

세베르의 물음에 경비대가 움찔했다. 서늘한 그의 목소리는 딱히 위협적인 어조가 아니었으나 묘하게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은 위압감이 스며 있었다.

결국 경비 대원은 몸을 살짝 돌리고 방향을 짚었다.

“저쪽입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딱히 가실 필요가…….”

세베르는 경비 대원이 가리킨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던 펠릭스가 다급히 함께 온 마법사들을 향해 눈짓을 했다.

‘진짜로 왜 저렇게 서두르시지.’

펠릭스는 눈치껏 현재 상황이 다소 기묘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챘다.

무엇보다도 수도에 폭발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장에게 보고 하나 없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역시 황실에서 함구 명령을 내렸던 것인가? 뭐, 그럼 차라리 직접 알아보는 게 더 빠를 수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늘따라 이례적으로 구신단 말이야.’

속으로 읊조리며 펠릭스는 세베르를 따랐다.

“여, 여기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 대원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폭발이 일어났음을 증명하듯 이미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세베르는 그것을 보다가 입매를 굳혔다. 그가 천천히 폐허로 다가갔다.

“엇, 위, 위험하십니다. 그곳은-.”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뗀 경비 대원이 다시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안 돼, 여기에 마수가 있었다는 건 함구하라고 했는데.’

비록 당시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미 동료들에게 그 어린 황녀가 내린 명령을 전달받은 참이었다.

비록 어린아이이긴 하나 황녀의 명령인 이상 대공에게도 당연히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으아. 마수의 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평생 마수를 본 적이 없는 경비 대원에게 있어 잠시나마 마수가 있었다는 사실은 크나큰 공포가 되었다.

그렇다고 직접 대공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는 없는 일.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행동이 무색하게 세베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 마수가 있었다고?”

“……네?”

그 순간 경비 대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게 무슨…… 아, 아닙…….”

그가 더듬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세베르는 경비 대원의 답에 그를 힐긋 쳐다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금안에 경비 대원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빛은 그야말로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조각상처럼 정교하고 날카롭게 세공된 얼굴 위에 새겨진 금색 눈동자는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조악한 위협의 말이나 어쭙잖은 명령과는 애초에 결이 달랐다.

그의 존재 자체에 깃들어진 그 눈빛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 그의 목을 내리칠 것처럼 냉정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 그것이…….”

“이미 알고 왔다. 켈리어드 대공가의 마법사들을 우습게 보는 것인가?’

조금만 더 하면 울 것 같은 경비 대원의 모습에 결국 펠릭스가 나섰다. 그의 뒤에 있는 마법사들이 측은한 얼굴로 경비 대원을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비 대원은 쉽사리 입을 떼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대공 전하도 따로 보고를 듣고 온 건 아닌 듯한데. 내가 시인을 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잖아! 아악! 나는 이딴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다고!’

켈리어드 대공과 황실의 사이야 그 또한 아르시스 제국민인 만큼 대충 알고 있었다.

황실에서 무슨 영문인지 이것을 함구하라 한 상황에서 그는 죽어도 그것을 알리는 첫 번째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예상보다 경비 대원이 더 굳건히 입을 다물자 펠릭스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뗐다.

하나 그때, 세베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에 마족의 흔적이 있는 것이 맞나?”

“네? 아, 네! 맞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마력의 흔적도 어렴풋이 느껴지긴 하는데, 추적할까요?”

갑작스러운 세베르의 질문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눈치챈 마법사가 빠르게 대꾸했다.

경비 대원은 자신에게 향한 물음이 거둬지는 듯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세베르는 고개를 숙인 채 함구하고 있는 경비 대원을 힐긋 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마수를 처리한 것이 누군지 알 수 있나?”

“유명한 마법사거나 저희가 알고 있는 마법사라면 알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폭발 이후에 다른 이가 접근을 하지는 않은 듯하여 추적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급적 빠르게 해서 보고하라. 대체 그 마수를 처리한 것이 누군지 알아내.”

말을 마친 세베르가 걸음을 옮겼다. 펠릭스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뒤를 따르며 작게 물었다.

“저, 전하, 저 경비 대원은 처벌하지 않아도…….”

“감시를 붙여. 만약 여기에 연루된 이가 진정으로 황실과 관련된 분이라면 처벌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다른 이라면-.”

“…….”

“그때 처리해도 늦지 않아.”

한마디로 황족이 내린 명령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자신에게 함구를 해도 상관이 없단 말이었다. 펠릭스는 서두르는 와중에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그의 모습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베르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최소한 특이한 힘의 흔적은 없었다. 마수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고, 깔끔하게 처리가 된 듯한데……. 대체 무슨 일이…….’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골목길을 나설 때였다.

“으악!”

갑자기 골목이 꺾이는 방향에서 흰색의 장미와 함께 한 아이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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