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80화 (80/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80화

“하아…… 무슨 내용-.”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비올레의 얼굴이 갑자기 확 굳었다.

꽤 긴 침묵 뒤.

“벨, 지금 당장 마탑의 모든 마법사를 소집시켜.”

“갑자기요? 지금 몇몇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지금 당장! 한 놈도 빠지지 말고 전부 소집하라고 해.”

벨은 비올레의 얼굴에 비낀 심각한 기색에 뭔가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곧, 마법진과 함께 벨이 급히 마탑으로 향했다.

비올레는 다시 자신의 손에 들린 전언을 응시했다.

그 위에는 간단하게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마탑에 흑마법사가 있어.

* * *

그날 이후 마치 잊기라도 한 듯 나는 다시는 죽음의 협곡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애초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갈 생각은 없었다. 내가 조금 무모하긴 해도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 며칠 동안 완전히 공무에 매진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는 리건을 향해 물었다.

“아이리스 델멘은 아직도 수도에 있어?”

“웬일이십니까, 누님의 안부도 물으시고.”

“그냥 궁금해서. 네 누이가 어디 평범한 인간이어야 말이지. 아주 소문이 자자하던데? 수도에 오자마자 델멘 공작가 휘하 상단이 큰 건을 하나 달성했다며?’

“아. 헬츠 상단과 독점 계약을 달성한 것 말입니까.”

“그래. 지금까지 헬츠의 단주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이가 몇 없는데, 네 누이는 가장 단시간에 해냈지.”

“제 누이야 뭐, 언제나 대단했으니까요.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아직 약혼자가 없다는 것뿐이겠죠. 그 나이에 가문의 후계자가 약혼자가 없음은 꽤 위험하니까요.”

“델멘 공작이 알아서 해 주지 않을까?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첫째 딸의 신랑감인데 신중하게 골라야지.”

“하지만 아이리스 누님은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누군데? 뭐, 평민이라도 되나?”

“모르셨습니까?”

“내가 알아야 해?”

내가 뭐 아이리스의 친우도 아니고. 그러나 리건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아르시스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건 폐하와 대공 전하밖에 없을 겁니다. 뭐, 후자는 그냥 무시하는 듯하지만.”

“여기서 왜 갑자기 세베르가 나와?”

“그거야, 제 누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대공 전하니까요.”

“……뭐?”

나는 펜을 놀리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아이리스가 세베르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전혀 상상도 못했던 내용이라 나는 한동안 당황함에 몸부림쳤다.

그러다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너희 누나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남자 보는 눈만 못 가졌구나.”

내 말에 리건의 얼굴에 미묘한 기색이 서렸다.

그는 잠시 뭔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의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켈리어드 대공을 인정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예전에 대공 전하께서 올곧은 성격이라고 평가하셨으면서.”

“그거랑 그거는 완전히 다른 문제지. 세베르는 확실히 귀족으로서는 완벽하지만…….”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그가 인격적으로도 정말 완벽하다는 것은 인정했다.

하나 동시에 그 완벽함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모종의 반감을 갖게 했다.

‘아니, 꼭 반감은 아니지.’

어쨌든 내가 그를 동경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나를 생각만큼 싫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미묘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굳이 말하자면.

“재수 없잖아.”

결국 나는 이렇게 결론을 냈다.

“너무 완벽해서 재수 없어. 옆에 있으면 내가 너무 멍청해지고 인격적으로 더러운 인간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하지만 뭐, 너희 누나는 세베르와 비슷한 성정이니까. 둘이 잘 맞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정작 말을 내뱉은 나는 왠지 모르게 속이 이상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리건은 그런 나를 빤히 보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작게 읊조렸다.

“글쎄요. 그건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리스가 세베르 녀석을 좋아한다며?”

“대공 전하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내 인상 속에 있는 세베르는 딱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할 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물론 그 또한 인간이니 호불호야 있겠지만, 글쎄. 사내로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굳이 상상하려니 조금 기분이 이상하고.

결국 나는 이 주제에서 벗어나려고 말을 돌렸다.

“아무튼 중요한 건 내가 조만간 네 누나를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거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순간 리건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 인형을 통해 에스트리아로 만날 테니까. 만나서 나눌 이야기가 있어.”

리건은 내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마. 네 누나한테 안 넘어가. 난 전반적으로 널 제외한 너희 집안사람들은 다 재수 없어.”

“……저도 델멘 일가의 사람입니다만. 그리고 누가 그딴 걸 걱정했습니까.”

“왜, 그거 빼고 다른 걱정할 거리가 있어? 그저 후계자를 초대해서 만찬을 진행하는 것뿐이야. 이상할 것 없어.”

나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리건에게 말했다. 그러나 정작 그런 내 ‘위로’에도 리건의 얼굴에 새겨진 불안한 기색은 사라질 줄 몰랐다.

* * *

아이리스 델멘이 황제의 초대장을 받은 것은 저녁 즈음이었다.

“소공작님, 황실에서 만찬 초대장이 왔습니다.”

그에 조용하게 업무를 보던 아이리스의 얼굴에 의문이 새겨졌다. 그녀는 집사의 손에서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초대장의 겉면을 찬찬히 살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온 것이 확실한가?”

“네.”

“아버님한테도 갔나?”

“오직 소공작님께만 초대장이 왔습니다.”

“알겠다. 나가 봐.”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집사가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랍에서 칼을 꺼낸 그녀가 봉투를 뜯었다.

그 안에는 우아한 필기체로 쓰인 초대장이 있었다. 초대장의 내용은 간단했다.

열흘 뒤 가볍게 만찬을 갖도록 하지. 해가 진 뒤, 델멘 공작가로 마차를 보내겠다.

뜬금없는 초대장에 아이리스의 얼굴에 드물게 곤혹이 드리워졌다.

‘딱히 폐하와 접점은 없는데.’

실제로 그녀는 수도 대신 영지에 장시간 거주했고, 설사 수도에 있다고 해도 딱히 황궁에 들어갈 일이 없어 에스트리아와 접점이 적었다.

게다가 에스트리아도 연회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은 계속해서 어긋나곤 했다.

물론 아이리스의 입장에서 에스트리아와 ‘다른 식’으로 얽힐 수는 있지만, 이번 에스트리아의 초대장은 ‘그런 의도’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였다.

결국 아이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과 상의해 봐야겠다.’

곧 델멘 공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가볍게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었다.

딸 사랑이 끔찍한 델멘 공작은 제 딸이 허락 없이 집무실에 들어와도 별말을 하지 않는 이였다.

어렸을 때는 그녀 또한 아버지의 집무실에 자유롭게 드나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노크하는 습관을 들였다.

한데.

“아버님, 황궁에서 초대장이…….”

“리, 리스. 네가 웬일이냐. 언질도 없이.”

아이리스는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누가 봐도 당황한 얼굴로 뭔가를 숨기는 아버지를 보며 멈칫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델멘 공작이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뭐지?’

아이리스는 가늘게 눈을 떴다.

‘편지인가?’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서신에 닿았다.

그에 델멘 공작이 다시 침착함을 되찾고는 조용하게 자신의 테이블 위에 있는 것들을 서랍에 넣었다.

이내, 평소와 다름없이 그가 미소를 담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리스?”

아이리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손에 들린 초대장을 델멘 공작에게 보였다.

“오늘 폐하께서 초대장을 보내오셨습니다.”

“폐하가?”

그 순간 델멘 공작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채, 아이리스가 말을 이었다.

“네.”

델멘 공작은 한동안 길게 초대장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 쯧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아예 통보로군.”

“네.”

“일단 참석은 하거라.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일단 들어나 보는 게 좋겠군.”

아이리스는 델멘 공작의 얼굴에 가득 씌워진 경멸을 읽고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장을 갖고 나가려던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한데, 아까 읽고 있던 것은…….”

“아, 별것 아니다. 원로원에서 서신이 왔어.”

“그렇습니까.”

아버지의 표정에 아이리스는 별말을 붙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방을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