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79화
나는 그만 정곡을 찔려 입을 다물었다.
하시스의 말이 맞았다.
나와 세베르는 딱히 대화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없었던 게 대화뿐만은 아니었다.
우리 둘 사이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즉위식을 기점으로 우리는 대면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내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지로 내려갔고, 설사 마주칠 기회가 있다고 해도 대화 따위를 나눌 여건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그가 갑자기 올라왔을 때는, 나는 이미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세베르 따위와 대화를 해서 뭐 해? 그의 생각이 나와 무슨 상관있다고?’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어쨌든 내게 있어서 그는 그저 고귀한 켈리어드 대공일 뿐이었다.
‘물론, 오늘 그 반응은 좀 의외였지만. 아니 그런데 갑자기 사람이 그렇게 변하나?’
하시스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흐음’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표정이 마치 내 속을 다 꿰뚫고 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홱 돌리는데, 갑자기 하시스가 내 머리를 흩트려 놨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에 내가 짜증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내 짜증을 예상했다는 듯, 하시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 문득 생각해 보니 이대로 가는 것도 그 대공에게 업보가 되는 것 같아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쯧 혀를 찼다.
대체 왜 자꾸만 아이 취급이지?
분명 나보다도 한참 어릴 텐데, 하시스는 마치 내가 진짜로 그의 동생이라도 되는 듯이 굴었다.
‘셀라한테 머리를 다시 정리해 달라고 해야겠어.’
나는 속으로 읊조리며 한쪽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그러나 그때, 멀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업보 이야기를 하고 있어?”
나는 정원으로 들어오는 일리안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부르면 좀 일찍 와. 대체 뭘 하느라 이제야 오는 거야? 또 아티팩트를 만들고 있었어?”
“아,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다른 걸 제조하고 있었지.”
“뭘?”
“저번에 보니까 성수가 흑마법에 은근히 효과가 있어서, 혹시 마력으로 그 비슷한 효과를 내는 방법이 없나 고민하고 있었어.”
생각보다 훨씬 유용한 걸 연구하고 있었잖아?
“생각보다 훨씬 쓸모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절대 아니야.”
“그래서, 우리를 부른 이유가 뭐지? 또 이번에는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건가?”
일리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시스 또한 무심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그에 나는 살짝 손끝을 휘둘러 주변에 차단막을 쳤다.
혹시 누군가가 듣지 않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 * *
“죽음의 협곡으로 가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뭐야. 오후에 어딜 가신 거예요? 소환에도 응하지 않으시고.”
그날 저녁,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방을 울리는 목소리에 움찔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레르하겐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아마도 하시스에게서 말을 전해 듣자마자 온 것일까.
빠르기도 하다며 속으로 생각하는데 레르하겐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걸음은 다소 느릿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웠지만, 내가 앉아 있고 그가 서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의 얼굴에 걸려 있는 표정이 너무 무시무시해서인가, 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구겨진 미간에서 그의 마뜩잖음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그에 맞서듯,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네. 죽음의 협곡으로 갈 거예요. 지금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일단은 눈앞의 것부터 처리를 하고, 슬슬 정리를 하다가-.”
“그곳이 네가 가 보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나?”
“절대 아니죠. 그래서 지금은 가지 않겠다고 하는 거예요. 게다가 꼭 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어요. 만약 죽음의 협곡으로 가기 전에 일이 처리된다면 굳이 갈 필요 없겠죠.”
“……그럼.”
“하지만 로드님, 솔직히 진짜로 이 모든 것이 그저 귀족 중에 숨어 있는 흑마법사 하나 잡아내서 족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일전에도 말씀하셨잖아요. 배후에 따로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다고.”
“그래서 지금 네가 마왕과 싸우기라도 하겠다고?”
“미쳤어요? 싸워도 로드님이 싸우지 저는 왜 끼워 넣어요?”
나더러 마왕과 싸우라니. 그것보단 소소하게 권력 싸움을 하는 것이 나았다.
“그저 죽음의 협곡으로 한번 가 보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단서가 있다면 좋고, 없다면 그냥 돌아오면 돼요.”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닌 걸 너도 알 텐데.”
“로드님.”
나는 웬일인지 평소와 달리 강하게 내 말에 반박하는 레르하겐을 차분하게 불렀다. 그리고 내 부름에 레르하겐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은 안 된다.”
“알아요. 당분간 저도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리고 기억해.”
“…….”
“내가 너를 돕는 대가.”
이제 와서 그 대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왠지 모르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 레르하겐이 나를 도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 콕 집으라고 하면 나 또한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았어요.”
나는 마치 그를 안심시키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말을 마친 뒤 그가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나를 한 번 보고 사라진 그를 눈으로 배웅하고, 나는 살짝 시선을 내렸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할까.’
뭘 어떻게 해야, 배신자를 잡아 내 앞에 끌고 올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하면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을까.
나는 곧 테이블 서랍에서 종이를 두 장 꺼냈다.
이내 펜이 유려한 문자를 써 내려갔다.
* * *
비올레는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마탑주님, 괜찮으세요?”
“응…….”
“안색이 파리하신데. 마력 고갈 오신 거 아니에요?”
“차라리 마력 고갈이 왔으면 좋겠어. 그럼 쉴 수 있잖아?”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마법사에게 마력 고갈은 응급상황이라고요!”
“응…….”
“그냥 돌아가세요, 마탑주님. 나머지는 저희가 처리할게요.”
“아니야. 이것은 마탑주로서의 나의 운명이야.”
“아니, 그냥 완전히 맛이 가셨네.”
“어쩌겠어. 이미 사흘 내내 거의 주무시지 못했는데.”
확실히 마법사들의 말마따나 비올레는 현재 사흘 동안 잠 한 번 자지 못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륙 곳곳에서 마물에 관한 보고가 자꾸만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탑의 수장으로서 비올레는 보고가 올라온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개중에서 절반 이상은 이미 다른 종족들이 처리를 해서 그녀가 마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쥐어짜이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특히나 마탑의 수장인 그녀는 다른 마법사들이 쉴 때도 일을 해야 했다.
물론 그녀도 역대 대부분의 마탑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왕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마탑의 주인이었고, 그녀가 나서지 않는다고 그녀를 감히 해하려고 드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대륙에 마물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래서 사람이 양심이 애매하게 있으면 고생한다니까. 그냥 양심 다 버리고 권세만 쫓으면 이런 일 없는데!’
비올레는 속으로 자신의 선량함에 저주를 퍼부으며 비칠비칠 걸어갔다.
그녀는 성수를 입에 탈탈 털어 넣은 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요즘 따라 마물들이 점점 적어지는 것 같기는 하네.”
“그렇죠? 저도 느꼈어요. 게다가 저희가 도착할 때 이미 정리된 경우도 많고. 아무래도 다른 종족들도 마물들이 거슬리나 봐요.”
“뭐, 그럴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아주 그냥 귀하신 자기 따님이 미천한 인간계에서 노시는데 벌레 같은 마물들이 깝치니 얼마나 걱정되겠어.”
그렇게 말하며 비올레는 자신의 로브를 고쳐 썼다.
그래도 이제 보고가 올라온 곳 두 곳만 확인하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힘이 나는 것 같아서 그녀가 입을 떼려는데,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뭔가가 팔랑팔랑 떨어졌다.
“어, 마탑주님, 마법 전언인 거 같은데요.”
“마법 전언?”
비올레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든 마법사가 말했다.
“어, 아르시스의 황제 폐하한테서 온 것 같아요.”
“뭐? 싫어! 안 볼래! 찢어 버려!”
에스트리아에게서 왔다는 말에 비올레가 처절하게 외쳤다.
그녀의 행동에 주변의 마법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마법 전언은 기밀 마법을 걸어서 오직 특정된 사람만 열 수 있게 밀봉한 뒤 보내는 것이라서 비올레를 제외한 누구도 볼 수 없었다.
물론 파기를 해도 되지만, 그들 모두 비올레에게 그럴 만한 담력이 없음을 알았다.
“그냥 빨리 확인해 보세요. 아르시스의 황제 폐하는 엄청나게 무서운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그 여자는 사람이 아니야. 그 여자는 악마야!”
그러나 결국 비올레는 마법 전언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보기 싫어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