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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62화 (62/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62화

세베르의 제안에 나는 놀란 얼굴을 했다. 이 상황에서 기사들을 데리고 숲속까지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겠는가.

어쨌든 그들은 일을 하러 온 것이었고, 그들로서는 일을 마치고 황궁으로 복귀하는 것이 가장 편한 처사였다.

그저 우연히 마주친 고집쟁이 황녀의 부탁 따위를 들어줄 의무는 그들에게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도 필론 경의 앞에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딱 잘라 절대 안 된다고 해도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이걸 황제한테 이른다고 협박해 봤자 세베르에게 통할 리도 없었다.

“지, 진짜?”

덕분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아까까지 무슨 생각을 했든 나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그리고 놀란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닌지 주위에 있는 기사들의 얼굴 위에도 놀라운 기색이 서렸다.

“네. 대신, 절대 단독 행동을 하면 안 됩니다.”

“어, 그, 그러긴 할 텐데.”

“절대 호기심을 갖고 함부로 만져서도 안 됩니다.”

“알았어.”

“그리고 절대 마력을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이곳에는 마력 방어막이 있어서 미숙한 마법을 발현했다가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응.”

“그리고…….”

세베르가 원래 이렇게 잔소리가 많은 스타일이었나?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베르는 계속해서 숲에 들어가서 이걸 하면 안 된다느니, 저걸 하면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동안 세베르가 나를 얼마나 황제로서 대접해 주었는지 깨달았다. 그간 내가 시키는 일에는 토를 달지 않았으니까.

‘물론 얼굴 가득 마뜩잖은 기색은 있었지만.’

“알았어. 절대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게.”

세베르는 내 말에 그제야 조금 안심을 한 듯싶었다. 그는 다시 내 눈을 빤히 보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벼이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제는 들어가는 거지? 나 혼자 앞장서서 가도 되는 거지?”

“…….”

“안 돼?”

세베르는 내 물음에 무슨 영문인지 멈칫했다. 그러나 이윽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한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황녀 전하께서 앞장을 서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가 이렇게 웃는 것은 거의 처음이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몇 년 동안 처음으로 본 것이다.

내가 즉위한 뒤 그는 수도에 붙어 있던 몇 달간 드문드문 얼굴을 보일 때면 늘 싸늘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때는 그것이 싫었는데-지금 생각해 보니 굳이 싫어할 이유가 있었느냐마는- 지금 이리 웃는 것을 보니 더욱더 기분이 이상했다.

그것은 얼핏 보면 비웃음 같았으나 찬찬히 보면 조롱의 뜻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괜히 속이 미묘해서 내가 물었다.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닙니다.”

“그럼 왜 웃어? 기분 나쁘게 앞에 사람 세워 놓고 함부로 비웃지 마. 나 그런 거 싫어해. 그런 건 하시스 오빠만으로도 족해.”

“……비웃는 게 아닙니다.”

“그럼?”

“알고 있는 누군가가 생각나서 그럽니다.”

누구?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반문을 할 뻔했다.

나를 보고 생각날 만한 이가 있나?

그러나 그것까지는 내가 물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살짝 미간을 좁히다가 신경을 끄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더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세베르가 왜 웃는지 내가 알 바인가. 갑자기 만나서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했다.

“그럼 갈까? 필론 경, 내 옆에 서 줄래? 혼자 가는 건 좀 이상해서. 나는 내가 걸을 때 누가 옆에 있는 걸 좋아해!”

“어. 하지만…….”

필론 경은 내 말에 잠시 멈칫했다.

중앙기사단의 단장은 엄연히 세베르였고, 내가 앞장서서 걷는 이상 필론 경이 내 옆에 서면 당연히 그가 세베르 앞에서 걷는 것이 된다.

질서와 위아래가 엄격한 기사단 내부에서 그것은 사실 금기였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눈을 깜박거리면서 다시 한번 물었다.

“안 돼?”

“필론 경, 황녀 전하의 명령을 따라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세베르는 내 말을 그대로 따라 주었다. 나는 필론 경의 대각선 뒤에 서 있던 단발머리 기사, 그 재스민 남자 친구 기사에게 대꾸를 일삼던 이에게 물었다.

“경도 내 옆에 서. 경은 이름이 뭐야?”

“소개가 늦어 송구합니다, 전하. 아일린 테넛입니다.”

“그래? 그럼 필론 경, 테넛 경. 이만 가자.”

그렇게 행여나 세베르가 내 옆으로 다가올까 원천 봉쇄를 한 뒤 나는 숲으로 자박자박 걸어갔다.

세베르가 굳이 내 옆에서 걷는다고 해도 나로서는 딱히 상관은 없지만, 진짜로 상관은 없지만 문제라면-.

‘숲에 들어가서 마법을 쓸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저 자식은 감이 좋아서 안 된단 말이야.’

세베르와 가까이 있으면 거동이 제약을 받는다.

‘인형이 가짜라는 것도 간파한 녀석인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누구보다도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필론 경과 테넛 경을 양옆으로 두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나는 생각 이상으로 음영이 짙은 숲속의 환경에 ‘흐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훨씬 어둠침침하잖아. 확실히 몸을 숨기고 일을 벌이기에는 좋겠어.’

게다가 사냥을 진행할 때는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의 사냥감을 찾곤 했다. 그렇다는 것은 굳이 다른 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면, 딱히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알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쪽으로 빠져나가면 호수가 있고, 저쪽으로 가면 더 깊숙한 절벽 쪽이야. 절벽 쪽은 위험하지만 먹이가 많아 사냥감이 많으니까, 호승심 강한 델멘 공작은 무조건 절벽 쪽으로 갈 거야.’

샤트 공작은 겁 많은 성격이니 애초에 절벽 쪽은커녕 호수 쪽으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가 나올 것이 분명하고…….

내 외할아버지인 엘비어츠 공작도 은근히 호승심이 강해서 절벽 쪽으로 갈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나머지 귀족들도 그쪽으로 우르르 따라가겠고.

‘좋아. 나와 레르하겐은 호수 쪽에서 일을 벌인다.’

마침 물이 있으니 거울 삼아 일루전 마법을 펼치기도 쉽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혹시라도 누군가가 틈새를 보이면 바로 포획한다.

설사 틈을 보이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레르하겐이 방법을 찾아 준다고 했으니, 그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만 확인하고, 흑마법으로 대응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추적해서 잡는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렇게 쉽게 흘러갈 리는 없지만.’

애초에 일이 그렇게 쉬웠다면 내가 지금까지 어른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호수 쪽으로 아무도 안 올 거라는 법도 없어. 그러니까 방어막을 쳐 놓고 아무도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해. 그리고 숲에도 방어막을 쳐 놓고.’

그러면 최소한 숲속에서 벌어진 일은 나와 레르하겐의 통제 안에 있었다.

그리고…….

‘숲 밖은 일리안이 알아서 잘 살펴보겠지. 그런 일리안은 하시스가 책임지고.’

하시스의 성격상 내가 왜 그딴 일을 해야 하냐며 길길이 날뛸 게 뻔했지만, 결국 녀석은 할 것이다.

나는 하시스의 성정을 이제 대충 파악했다. 맨날 투덜거리고 짜증을 흘려도, 뭔가를 부탁하면 잘 들어주었다.

나는 숲을 둘러보는 척 몰래 군데군데 나무 아래에 마력을 심어 놓았다.

추적용 마법을 발현해 심어 놓은 것이라 만약 길을 잃어도 이것들을 따라가면 어떻게든 숲에서 나올 수는 있었다.

‘혹시 모르니 허공에도 표시해 놓는 것이 좋고.’

그렇게 생각하며 손가락을 작게 튕겼다.

살이 뽀송뽀송한 손가락은 딱- 하는 소리보다는 톡- 하고 그저 마찰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으나, 그래도 마법은 제대로 발현이 되었는지 허공에서 하얀색 빛이 몇 개 눈에 띄었다.

‘좋아. 이 정도면 됐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슬쩍 기사들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그들은 내가 뭘 하는지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 생각하며 일부러 한껏 풀이 죽은 얼굴을 했다.

“흐음. 왜 아무것도 없지. 그냥 돌아갈까? 다리 아파.”

“사냥터가 하도 큰 데다가, 아무래도 사람이 많아서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하지만…… 어?”

그때였다. 그럼 이제 가자, 라고 말하려는 순간 내 눈앞에 하얗고 뽀송뽀송한 뭔가가 눈에 띄었다.

“토끼?”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초에 동물을 아예 싫어하는 성정도 아니었고, 이렇게 털이 뽀송하게 달린 작은 동물은 꽤 좋아하는 편이어서 굳이 좋아하는 척을 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 타이밍에 정확하게 나타난 토끼가 퍽 마음에 들었다. 나는 토끼를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토끼야.”

“네, 토끼네요.”

“귀여워.”

나는 일부러 아이처럼 조금 과장스럽게 신기한 얼굴을 했다.

한껏 흥분한 얼굴을 하자, 멀리서 재스민의 남자 친구, 그러니까 아까 전 자신을 이슨 경이라고 소개한 기사가 입을 틀어막았다.

“귀여워.”

“황녀 전하가 더 귀여워.”

“귀여운 딸 낳고 싶다…… 그치만 내 얼굴로는 무리겠지?”

“응.”

그러나 이번에는 그를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혹시 내 반응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니었는지 조금 고민했다. 그러나 어쨌든 내가 어른이라고 의심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때 다시 한번 세베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봐?”

그에 나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묻고 말았다.

사실 아예 관심을 끄는 것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평소와 다른 그의 존재감에 신경이 쓰였다. 세베르는 내 물음에 바로 대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내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폐하를 많이 닮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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