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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61화 (61/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61화

“진짜? 동물 친구들 하나도 없어?”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숲에 들어가 보고 싶은데.”

“흐음.”

“그래서 아빠한테 조른 건데…….”

나는 그야말로 누가 봐도 불쌍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축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런 내 반응에 기사들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하긴, 그들로서는 하나뿐인 황녀가 숲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가 진짜로 큰일이라도 나면 더 큰 문제가 생기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인지, 재스민의 남자 친구인 기사가 갑자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이럴 수가, 정말 많이 기대하셨나 봐.”

“응. 진짜 기대했어.”

나는 일부러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황녀인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만약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너희들에게 권력의 맛을 제대로 보여 주마.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아빠한테 마법을 배워서 웬만한 위험에는 다 대처할 수 있어. 그러니까 숲에 들어가도 괜찮아.”

“절대 안 됩니다.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릅니다. 저희도 그래서 사냥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단장님과 함께 매일 안전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뭐야, 매일 오는 거였어?

어쩐지 사냥 대회까지 며칠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있다 했네.

세베르 켈리어드 이 쓸데없이 성실하고 고지식하고 귀족다운 자식.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레르하겐이라도 끌고 오는 건데. 사람이 있을 줄 모르고 조용하게 다녀간다는 게 이딴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그나저나 매일 이렇게 온다면 방법이 없는데? 앞으로 와도 어떻게든 기사들을 마주하게 된다는 거잖아. 그럼 저녁에…… 아니야. 세베르의 성격이면 저녁에 더 열심히 이 근방의 안전을 주시하라고 할 거야.’

그럼 그냥 다음번에 내 모습을 한 인형을 끌고 와 볼까?

하나 그것도 딱히 소용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한껏 불쌍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한테도 경들을 만났다는 말 안 할게.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경들 탓 아니야.”

그러나 내 말에 고민하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던 기사들은 오히려 내 말에 더욱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전하. 저희들은 중앙기사단으로서, 황녀 전하를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희들의 의무는 누가 눈치채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아무도 모른 채 홀로 죽는 한이 있어도 전하와 폐하의 안전을 지켜야 합니다.”

그들이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래, 그렇지. 이것이 그들의 의무였고, 그들의 사명이었다.

다만 내가 눈을 감아 주겠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보니 슬펐을 뿐이었다.

‘하, 안 되겠어.’

나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기사들을 성가시다고 말하기에도 미안했다.

어쨌든 중앙기사단은 언제나 내가 외출을 하거나 내가 행차를 할 때 내 뒤에 도열해 있는 기사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이런 난제를 던져 준 내가 오히려 잘못한 것이다.

“알겠어.”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은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때, 내가 풀이 죽은 게 안쓰러웠는지 기사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숲속까지는 무리더라도, 숲 변두리는 한번 둘러볼 수 있지 않을까?”

말을 내뱉은 것은 다름 아닌 머리카락을 목까지 단정하게 자른 기사였다.

그녀는 아까 전 재스민의 남자 친구 기사한테 한두 마디씩 대꾸를 하던 이였는데, 의외로 둘이 꽤 친했는지 그 옆에서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게. 필론 대장님, 숲속까지는 무리더라도, 숲 변두리에도 토끼라거나 귀여운 동물 친구들이 있지 않을까요? 숲속은 우리끼리도 위험해서 호위가 어렵다지만, 그쪽은 괜찮지 않습니까.”

“맞아요. 어차피 소집까지 시간도 좀 있으니까, 황녀 전하를 데리고 구경이라도 하는 건?”

“기껏 오셨는데 아무것도 못 보고 가는 건 좀 그렇잖아요.”

“맞아. 그리고 며칠 뒤면 그 늙은이들이 모여 있을 텐데 얼마나 재미없…….”

“야, 말조심.”

그러나 나는 그 늙은이들이라는 말을 내뱉은 기사에게 급격히 호감이 생겨 버리고 말았다.

내가 항상 내뱉고 싶었으나 황제로서의 위엄과 품위와 위신을 위해서 하지 못한 말을 이렇게 내뱉어 주는 게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그럼 단장님이 오시기 전까지 잠깐만 숲 변두리 산책이라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 남았는데 그럴 바에야…….”

나는 너도나도 한마디씩 내뱉는 기사들을 보며 흐음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애초에 동물 친구, 아니, 동물을 구경하러 온 게 아니었으므로 굳이 숲을 노닐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굳이 숲으로 홀로 들어가겠다면 기척을 숨기든, 아니면 몸을 가리는 망토를 이용하든 방법이야 많았다.

다만.

나는 다정하게 웃고 있는 기사들을 응시했다.

세베르의 기사들이라.

‘중앙기사단은 황제의 직속기사단이긴 하지만, 그동안 공식적인 행사를 제외하고 거의 접점이 없었어. 한번 이 기회를 이용해 어떤 사람들인지 볼까?’

딱히 기사들에게 관심이 많지는 않았지만, 새삼스럽게 아까 전 그들의 모습을 보니 흥미가 생겼다.

“그럼 어떻습니까, 황녀 전하. 숲속은 어렵지만 사냥터 밖이라도 조금 둘러보시겠습니까? 가끔 작은 동물이나 새끼들이 뛰어다녀서 운이 좋으면 구경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좋아!”

뭐, 이렇게 된 이상 사냥터 입구에만 마력을 슬쩍 흘려 놓는 것도 좋지. 혹시라도 적이 걸려들면 좋고. 물론 그럴 가능성은 무척 적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긋 웃었다.

‘그럼 어서 갈까?’ 하고 내가 말을 내뱉으려던 그때, 갑자기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공기를 차갑게 울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왜 이렇게 모여 있나.”

“아, 단장님.”

“임무가 일찍 끝났으면 소집을…… 황녀 전하?”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사한 오후의 햇빛을 맞으며 서 있는 목소리의 주인은, 역시나 세베르 켈리어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밤하늘을 방불케 하는 머리카락 위로 눈부시게 부서지는 햇살이 더없이 어울렸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아, 이런. 세베르 성격에 당장 황궁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다행이지.’

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세베르는 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내, 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어찌 전하께서 여기 계신 겁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말을 골랐다. 여기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황녀로서 기사들 앞에서 목적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애처럼 구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세베르 앞에서만큼은 최소한의 위엄을 남겨 두고 싶었다.

물론 그래도 너무 어른같이 굴면 곤란하겠지만.

“며칠 뒤에 사냥이 열린다기에, 궁금해서 와 봤어.”

“홀로 오신 겁니까?”

“응. 아빠가 워프로 이쪽으로 옮겨 주었어. 사실 나도 간단한 마법은 할 줄 아는데, 아빠가 그냥 자기가 해 주겠댔어.”

그러니까 가급적 나를 저지할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러나 정작 세베르는 그런 내 의도와 완전히 다르게 들은 듯했다. 그의 얼굴에 설마 하는 기색이 들더니, 이내 그가 다시 내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마마마도 당연히 허락했지. 지금은 정무를 보실 거야.”

물론 세베르는 에스트리아가 정신을 잃었다고 알고 있으니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그더러 믿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황제가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그가 입 밖에 낼 수 없으니, 기실 내 의도는 그가 더 캐묻지 말기를 바랐던 것이다.

물론 세베르는 그저 이 아이가 서툰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여겼겠지만.

그것을 증명하듯 세베르의 얼굴에 탐탁지 않은 기색이 서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애초에 표정이 다양하지 않은 사람이므로 미미하게 눈매를 굳혔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꽉 다물고 나를 그대로 응시했다.

그의 눈가에 서린 복잡한 기색은, 나를 통해 누구를 보고 있는지 너무 명백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싫다고 해도 아이한테는 그러지 않겠지.’

세베르의 성정상 아이나 노인 같은 약자한테까지 자신의 불만을 풀어낼 리는 없었다.

나는 그것을 믿고 더욱더 활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숲에 놀러 왔는데, 못 들어가게 해서 그냥 주변을 돌기로 했어. 그렇지, 필론 경?”

“아, 네? 네.”

필론 경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조금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뒤에 있던 기사들도 아까 전과 달리 잔뜩 긴장해 각이 잡힌 얼굴을 했다.

‘세베르가 애들을 아주 잡는 모양이네.’

누가 봐도 너무 뻔한 상황이라서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세베르가 그럴수록, 나는 왠지 모르게 반항심이 들었다.

“괜찮지? 숲에 들어가지도 않을 거야. 그냥 구경만 하다 갈 거야. 그것도 안 된다고 하지는 않을 거지?”

“숲은 홀로 올 만한 곳이 아닙니다. 대체 그자는…….”

그러나 말을 잇던 세베르는 내가 눈앞에 있다는 걸 확인하곤 다시 말을 삼켰다.

아마도 ‘그자’는 레르하겐을 지칭하는 것이었나 보다.

세베르는 그러고도 한참을 침묵했다.

그의 우아하고 고혹적인 금안이 그대로 내게 꽂혔다.

그 위로 차분하게, 그리고 고요하게 맺어진 눈빛에 나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다시 이상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러 아이답게 그저 눈만 말똥말똥하게 그를 보고 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대신.”

“……?”

“제가 따르겠습니다. 하면 황녀 전하께서 원하시는 숲속까지 들어가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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