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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47화 (47/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47화

솔직히 말하자면, 그에게 명령을 세베르가 내게 진정으로 모든 정보를 숨김없이 드러낼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나는 딱히 그 사실에 분노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엄연히 말하자면 그는 대공이었고, 나는 황제였다. 대공조차도 입수한 정보를 황제인 내가 왜 알리지 않았다고 난리를 치는 건 너무 볼품없지 않은가.

“이 정도로 벌할 거였으면 써먹지도 않았어. 켈리어드 대공가는 아바마마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가문이었어. 뭐, 건방지긴 하지만 이것 때문에 척을 질 수는 없지.”

“…….”

“물론 그렇다고 해도, 빌미는 잡았으니 다음번에 만났을 때 사죄하는 꼴은 봐야겠군.”

리건은 얼굴에 웃음을 잔뜩 띠고 읊조리는 나를 조금 떨떠름하게 보았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폐하는 제 상상을 뛰어넘는 악취미를 갖고 계십니다.”

“너는 맨날 나한테 처맞으면서 그걸 이제야 깨달았니?”

“…….”

“뭐, 어쨌든 가만히 내버려 둬. 대신, 이제부터 켈리어드 대공 쪽으로 사람을 붙여. 벌은 내릴 생각이 없지만, 세베르의 정보력을 십분 써먹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애들러 후작가에 전했겠지? 축제일에.”

“아, 네. 안 그래도 레이디 이블린이 너무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걔도 참, 소박하다니까. 겨우 축제 하나에.”

그러나 어쨌든 입가의 미소는 딱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축제일 전날, 나는 드물게 일리안의 방을 방문했다.

그때 애들러 후작가에서 돌아온 뒤 나는 일리안을 몇 번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연금술사들이란 원래 방에 틀어박혀 연구를 하는 이들이므로, 그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었다.

탕탕.

일말의 존중도 없이 문을 부실 듯이 두드리자 몇 초 뒤, 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긴 백금발을 대충 위로 높게 말아 올려 묶은 뒤 약간의 얼룩이 진 셔츠를 입고 있는 일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아가씨, 나 아직 귀먹지 않았어. 그렇게 두드리지 않아도 돼.”

“왜 이렇게 늦어?”

“듣자마자 바로 열었는데?”

“들어가도 되지?”

물음이긴 했으나 나는 이미 답을 안다는 듯이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정작 일리안이 살짝 내 앞을 막아서면서 웃었다.

“아, 잠깐만, 안에 있는 것 처리하고.”

“뭐? 너 내 궁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는 거야?”

나는 미간을 좁히고 그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이게 설마 본성을 감추지 않고 내 궁에서 이상한 걸 만들어서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해서 마력 중독으로 나도 죽일 생각이면 너도 같이 죽는다는 걸 잊지 마.”

“우리 아가씨는 참 똑똑하네.”

“뭐? 진짜야?”

“농담이야. 마력 중독은 아니고.”

그렇게 말하며 일리안이 완전히 옆으로 물러섰다.

나는 방 안을 응시했다. 어디서 얻은 것인지 온갖 시험관에 물약, 마력석 같은 연금술 재료들이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저게 다 뭐야.

마치 정신 나간 괴짜 연구자의 방 같은 광경에 미간을 더욱 구겼다.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올려다보자, 일리안이 안심하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티팩트를 만드는 중이었어.”

“아티팩트? 무슨 아티팩트?”

“연금술사들의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지. 마법사가 아닌 이들을 위해 마법 효과가 나는 물건을 만드는 거야.”

“그건 나도 알아. 내 말은 무슨 아티팩트를 만드냐는 것이었어.”

“흐음. 잠깐만.”

그렇게 말한 일리안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번에는 함부로 방에 발을 내딛지 않았다. 대신, 문턱에 기대 있는데, 대충 테이블 위를 정리한 일리안이 방의 창문을 열더니 다시 테이블로 다가갔다.

곧 그가 테이블의 한쪽에 있던 작은 마력석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력을 조금 흘려보냈는지, 마력석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어?’

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던 방 안의 공기가 시원해진 것을 발견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내 얼굴에 비낀 생각을 읽어 냈는지, 일리안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맑은 느낌이 들지 않아?”

“그게 뭐야?”

“굳이 말하자면, 빠른 시간 내로 환기를 시켜주는 아티팩트라고 하면 되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어.”

“아무리 아티팩트라고 해도 이렇게 순식간에 작동하는 게 가능해?”

“가능하지. 나니까.”

말의 내용과 달리 정작 일리안의 얼굴에는 일말의 으스댐이나 뻐기는 기색이 없었다.

하긴, 마력 중독으로 왕실과 귀족가문의 절반을 제거한 녀석이니 ‘자신감’이 있을 수야 있겠지.

나는 팔짱을 끼고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머리가 좋은 녀석들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이래서 곤란하다니까.”

“지금 나 머리 좋다고 해 주는 거야?”

“머리가 나빴으면 죽음의 협곡에 갇히지도 않았겠지. 애초에 거기에 갇힌 녀석들은 다 그런 종류야, 머리가 좋은데 마음을 나쁘게 먹어서 그런 류.”

“흐음.”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에서 제 살길을 찾다가 어느 순간 다른 이의 살길을 막아 버린 케이스들이 수두룩하지.”

그래서 악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평범한 인간도 어느 순간 약간의 삐끗함으로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니까.

나도 내가 열여섯일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형은 정말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황위에 오르기까지 몰아쳤던 피바람은 결국 평생 짊어져야 하는 업보가 되었다.

일리안은 그런 나를 미묘한 눈빛으로 보았다.

“아가씨는 본인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응.”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턱짓했다. 이만 안으로 들어가도 되지? 하는 눈빛을 보내자 일리안이 곱게 눈을 휘며 들어오라는 듯이 팔을 내밀었다.

“어쨌든 선한 인간은 나 같은 짓을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저번에 하시스가 그랬지 않나? 그냥 때린 거랑 맞고 한 대 때린 거랑 맞기 싫어서 때린 거는 다 다른 문제라고.”

“하지만 결국 때렸잖아.”

“…….”

“이유가 무엇이든 때린 건 때린 거야.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때린 거고, 이유가 무엇이든 때렸어. 거기서 나름대로 상황을 고려하면서 죄를 사해 주고, 덜어 주고, 더해 주고, 사형을 내리지만, 어쨌든 객관적으로 폭력이 있었다면…… 때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은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

“아가씨처럼?”

“아니. 나는 죄책감이 없는데?”

“……”

“죄책감 가질 거였으면 그런 짓 하지도 않았어.”

이것은 꽤 아이러니한 문제였다.

‘뭐, 그래도 누군가가 위로를 해 주면 기쁜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이지만.’

그래서 나는 하시스가 그렇게 말해주는 순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나 스스로 나를 용서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저 나 스스로의 편안함을 위해서 하시스의 말을 이기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졌으니까.

“뭐, 아무튼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아가씨.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해?”

그때였다.

일단 오늘 이곳에 찾아온 용건을 입 밖에 내뱉으려는데 갑자기 일리안이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그에 내가 짜증 섞인 얼굴을 했다.

“무슨 헛소리야?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려?”

“아니 그냥.”

“왜, 널 사주한 이가 너한테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으니 협조하라고 하든?”

반쯤은 대충 던져 본 말이었다. 물론 흑마법사들이 부활술을 쓴다는 것은 꽤 오래전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던 사실이긴 했다.

그러나 그 부활술이란 결국 육체를 조종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서, 부활보다는 결국에는 흑마법사의 마리오네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것을…….’

나는 속으로 읊조리며 일리안을 힐긋 보았다. 그의 얼굴에 비낀 서늘한 미소를 발견한 나는 그제야 상태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말았다.

“진짜야?”

“아가씨는 살리고 싶은 사람이 없나?”

“미쳤어?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신이라도 못 해.”

“과연 신이 못 할까?”

“못 해! 죽은 사람을 살려 줄 수 있다면, 신은 애초에 죽음이라는 끝을 마련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럼 만에 하나 살려 줄 수 있다면, 그래도 아가씨는 살리고 싶은 사람이 없어?”

일리안의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에 흠칫하고 말았다.

살리고 싶은 사람? 모르겠다. 애초에 다시 살릴 거면 처리하지도 않았다. 내 형제자매들을 다시 살리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 명백해서 나는 그런 미친 짓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다만…….

- 아바마마. 눈을 떠 보세요.

- …….

- 제발. 눈 떠 보세요. 다시 눈을 뜨셔서, 제발…….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있어.”

“거봐. 아가씨도…….”

“하지만 살리지 않을 거야.”

“……왜?”

“죽었으니까.”

“…….”

“이미 불공평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게 뭔지 알아? 삶의 기회야.”

“…….”

“딱 한 번, 삶 속에서 마주하는 무수한 선택의 길에서 한 번의 실수로 누군가는 악인이 되고, 선인이 돼. 누군가는 행복으로 걸어가고 누군가는 불행으로 걸어가. 그 선택이 잘못되었는지는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알 수 없지. 모두가 딱 한 번뿐인 삶이야. 그런데 그중에서 선택받은 누군가에게만 부활의 기회가 있다면.”

“…….”

“한평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온 인간들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어?”

사실 황제가 된 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시도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 매번의 순간들에 분노를 느꼈고, 그래서 그들과 대항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들의 분노는 근거가 없지 않았고, 그들의 위협을 쳐 냈을지언정 억울했던 적은 없었다.

“난 어른으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나를 이렇게 만든 놈을 처단할 거야.”

“…….”

“그게 전부야. 후회도, 억울함도, 내가 왜 그랬나 하는 뼈저린 반성도 딱히 없어. 나는 매 순간에 최선을 다했어. 그것뿐이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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