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25화
“오늘 대공 전하의 알현식에 황녀 전하도 참석하신다면서요? 처음으로 대공 전하를 뵙는데, 황녀 전하의 위엄을 살려 드릴게요.”
“…….”
“역시 위엄 하면 보석일까요? 왕관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니, 됐어. 그냥 평소처럼 꾸며 줘.”
내 말에 셀라는 눈에 띄게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내 요청대로, 평소와 다름없이 편한 드레스를 입히고 머리를 땋아 묶어 주었다.
나는 바로 준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
레르하겐이 창턱에 앉아 있었다.
“들어오시지 않고 거기서 뭐 하세요?”
“노크하기 귀찮다.”
“…….”
“가지. 알현실이라고 했나?”
“네, 알현-.”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 나는 이미 알현실에 있었다.
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 옆에서 무심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레르하겐을 힐긋 보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비공식적인 알현이기에 기사들도 전부 물러나 알현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원래라면 황족도 아니고, 황궁 내 직위가 없는 레르하겐이 알현실에 있으면 안 되지만, 애초에 누가 그의 존재에 반발하겠나.
‘이제 곧이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사실 세베르를 처음 보는 것도, 그가 생소하거나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목적을 갖고 그를 만나는 것이었고, 내 계획은 반쯤은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말이 도박이지 확신이 어느 정도 있기는 했다.
그런 내 긴장을 눈치챘을까, 레르하겐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눈길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나는 왠지 모르게 내 불안을 들킨 것 같아 변명했다.
“딱히 긴장한 건 아니었어요.”
“내가 뭐라고 했나?”
“다만, 세베르 켈리어드는 마법사는 아니더라도 검사인 만큼 감이 좋아서.”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왔잖나.”
나는 레르하겐의 무심한 목소리에 입을 꼭 다물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약간의 소란이 들리는 듯하더니, 이내 리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켈리어드 대공께서 알현을 요청하십니다.”
나는 레르하겐을 힐긋 보았다.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레르하겐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알현실의 황좌에 나, 정확히 말하자면 내 본모습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나타났다.
마리오네트. 인형술이었다.
사실 인형술은 나도 여러 번 썼던 것만큼 그리 어렵지 않게 실행할 수 있었다.
다만 세베르는 검술로 다져진 직감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후천적으로 마법을 배운 내게는 다소 넘기 어려운 산이었다.
‘하지만 레르하겐은 다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인형에 내 마력을 주입시켰다.
인형술과 내 의지를 연결시키면,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마력이 스며들자마자 내 모습을 한 인형이 입을 열었다.
<허하라.>
오랜만에 듣는 내 목소리에 다소 기분이 이상해지는 와중, 문이 열렸다.
나와 레르하겐은 자연스럽게 황좌의 옆에 섰다.
레르하겐의 성정에 당장 늘어져 앉아 있을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인지 그는 그저 무심한 얼굴로 내 앞쪽에 있었다.
끼이익-.
커다란 알현실의 문이 열리자마자 세베르 켈리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시스 제국이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검사,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 황실의 자랑, 켈리어드의 귀공자, 태생부터 고귀한 사내.
어이없게도 이 모든 칭호는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는 세베르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며칠 전의 모습만 제외한다면, 그는 참으로 한결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검은색 머리카락, 조각 같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검을 쥐는 이 특유의 단단한 체격,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입은 기사단 제복 위로 그의 영광을 기리는 훈장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레르하겐과는 조금 결이 다른 종류의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곧 절도 있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멈춰 선 그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세베르 켈리어드, 폐하께 복명합니다.”
<일어나.>
혹여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을까, 나는 모든 정신을 저 단상 위에 있는 인형을 조종하는 데 썼다.
어차피 어린 황녀의 존재 따위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부러 눈에 띄지 않으려 레르하겐의 뒤에 숨어 얼굴만 내밀었다.
‘내’ 명령에 세베르가 몸을 일으켰다.
제복에 달린 망토가 부드럽게 팔랑거렸다. 곧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에 ‘내’가 의례적으로 공식적인 안부를 물으려는데, 그 순간 아까까지만 해도 담담하던 세베르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 미세한 표정 변화에도 나는 일단 침착함을 유지했다.
레르하겐의 마법에 문제가 생길 리가 없었다.
아무리 세베르가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해도 드래곤 로드인 레르하겐은 애초에 다른 차원의 실력자였다.
그리 생각하며 침착하게 말을 이으려는 때였다.
세베르가 갑자기 얼굴을 팍 일그러뜨리더니 입을 열었다.
“너, 누구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얼굴 위로 경악이 번졌다.
‘뭐야. 지금 설마 인형인 걸 알아본 건가?’
하지만 겨우 저런 말에 흔들리면 안 된다.
‘내’가 침착하게 답했다.
<이게 지금 무슨 무례지? 경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나? 사죄하면 아까 전의 결례는 못 들은 척해 주지.>
하나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세베르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아니, 오히려 웬만해서는 표정 변화 하나 없던 그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지고, 그의 눈가에 분노가 깃들었다.
곧 그의 서늘한 시선이 옆에 서 있던 우리에게 꽂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앞에 있는 레르하겐에게 꽂혔다.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모든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세베르가 읊조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폐하는 어디에 있습니까.”
“네 눈앞에 있지 않나.”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저건 폐하가 아닙니다.”
“재미있군. 근거라도 있나?”
세베르의 모든 분노는 레르하겐의 나른하고 무심한 대꾸 아래 무력하게 부서졌다.
그 뒤에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침을 꿀꺽 삼켰다.
곧, 세베르가 서늘하게 비소를 지었다.
“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세베르의 말에 나는 입매를 굳혔다.
저게 무슨 뜻인지 제쳐 놓고, 대체 어떻게 세베르가 레르하겐의 마법을 알아챈 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세베르가 강한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다른 이와 대련을 하는 것도 보았고, 어린 시절 그가 마수들과 싸우는 것도 보았으니까.
심지어 내가 마력을 얻은 뒤 우리는 한 번 교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황제라 일부러 그가 패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나도 알았다.
하나, 이 정도는 아니다.
알현실은 바로 긴장감에 휩싸였다.
나를 내놓으라고 하는 걸 보면 내가 본인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 또한 연기라면 소름이 돋겠지만, 세베르의 눈은 딱히 거짓을 말하거나 무엇인가를 숨기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 또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도피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고, 아무리 우긴다고 해도 세베르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을 헛소리라고 웃으며 넘어가거나 그를 처벌할 수도 있지만, 이 알현실에서 나간 그가 어떻게 입을 여느냐에 따라 큰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나는 결국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작전 변경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려는데, 레르하겐의 목소리가 다시 알현실을 울렸다.
“에스트리아는 잠들어 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다. 잠들어 있다.”
자, 잠깐만.
이 ‘잠들어 있다’를 잔다는 말로 해석할 만큼 세베르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세베르의 눈가에 경악과 분노가 서렸다.
하나 나와 세베르의 충격이 미처 가시기도 전, 레르하겐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황좌에 있는 내 인형이 사라졌다.
세베르의 시선이 더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목을 긁는 소리가 나지막이, 그러나 확실하게 알현실에 울렸다.
“확실하게 말씀하십시오. 대체 왜 잠들어 있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런 세베르의 모습에도 레르하겐은 여유로웠다.
그가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흑마법이다.”
그의 한마디는 짧고 굵었으나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국의 황제가 흑마법에 당했음을 정적인 대공에게 알리는 레르하겐의 만행에 경악했다.
‘안 돼!’
물론 내가 흑마법의 존재를 세베르에게 알려서 몰래 조사를 하게 하려고 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 원래 계획은 황궁 밖에서 거짓된 사고를 만들어 내 평민이 당했다고 눈속임을 하는 것이었다.
흑마법이 작용한 것 같다고 하면 세베르의 성정상 당연히 제국과 백성의 안위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겸사겸사 일리안이 그 장소에 있었음을 흘리면 세베르는 무조건 일리안을 감시해 줄 것이고, 나는 굳이 힘을 들이지 않고 일리안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켈리어드 대공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조사를 하게 되면, 나와 세베르의 사이가 엉망인 것을 아는 귀족들은 나를 의심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흑마법에 당했다는 걸 알리면 어떡해! 일국 황제의 위기를 이렇게 알리는 게 어디 있어. 아니 그전에, 과연 세베르 녀석이 제대로 움직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말았다.
당장 레르하겐의 멱살을 잡고 입 닥치라고 흔들고 싶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에게 갖고 있던 콩알만 한 존경심과 감탄이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경악이었다.
나는 일단 이 상황을 수습하고자 머리를 굴리며 세베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이 그의 얼굴에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어……?’
세베르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하나 그것은 아까 전의 분노와는 완전히 다른, 나조차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가까웠다.
나는 그가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