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24화
그게 그렇게 티가 났나.
하지만 티가 난다고 꼭 도와줘야 할 의무는 없는걸.
뭐, 레르하겐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
“예전에, 왜 절 제자로 받아들이려고 하셨죠?”
내 물음에 레르하겐은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글쎄. 기억이 안 난다. 그저 변덕일 수도 있고, 내가 아는 사람과 비슷해서일 수도 있고.”
“그게 누군데요?”
“모르겠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저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
“원래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면, 쓸데없는 기억은 버리는 게 맞다.”
“쓸데없…….”
아니, 이 드래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 취급을 무슨 길거리 지나가는 개미처럼 보고 있어.
나는 하아-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 긴 삶을 사는 드래곤에게 개미 취급이라 받을 수도 있-.
“저 도와주시겠다는 말까지 잊으면 진짜 가만있지는 않을 거예요.”
-기는 무슨.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해도 내 자존심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경고차 싸늘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레르하겐이 나를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노력해 보지.”
결국 나는 레르하겐에게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야 한다는 요구를 뻔뻔하게 열 번 정도 주입시켰다.
그리고 며칠 뒤 세베르가 올 테니 협조해 달라는 말까지 남긴 뒤 한동안 더 연습에 매진했다.
내 부탁을 레르하겐은 딱히 거절하지는 않았다.
* * *
레르하겐이 건네준 무기 덕분에 한동안 나는 후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나는 틈만 나면 후원에 있는 연무장에서 마력을 컨트롤하는 법을 연습했고, 심지어 일상생활에서도 마력을 운용하고자 했다.
레르하겐은 그런 내 모습에 딱히 참견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무 위에서 내가 연습하는 것을 보다가,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제야 느긋하게 다가와 연습을 도와주었다. 물론 그러다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갔다.
오히려 내 연습 상대가 되어 준 것은 하시스였다.
그는 레르하겐이 내게 준 마법 무기를 보다가 다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연습 상대가 필요하다는 말에 귀찮은 얼굴을 하며 검을 뽑았다.
촤륵-.
다시 한번 허공에 채찍이 감겼다. 커다란 원을 세 바퀴 그리던 채찍 끝이 정확하게 하시스의 검을 옭아맸다.
하시스는 빠르게 자신의 검을 잡아당겼다.
과거의 나라면 끌려갔겠으나,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둘렀다.
“윽.”
그 순간 어지간히 아픈지 하시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움직임은 크지 않아도 엄연히 마력이 섞인 공격이었다.
나는 그대로 팔을 들어 채찍을 거둬들였다.
의기양양한 내 얼굴을 보며 하시스가 팔을 살짝 잡았다.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냐, 넌.”
“날 처음 만났을 때 너도 내 사정을 봐주지는 않았어.”
“그건 잘 모르던 때라 그렇고.”
“지금도 딱히 친하지는 않은데?”
나는 살짝 가쁜 숨을 내쉬었다.
비록 여전히 몸을 쓰는 게 버거웠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레르하겐을 바라보았다.
그의 차분한 벽안이 나를 응시하다가 곧 방향을 틀었다.
그에 자연스럽게 나 또한 시선을 돌리다, 후원에 들어오는 이를 발견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넌 또 왜 왔어?”
“아아. 이런, 아가씨. 내가 방해한 거야? 미안해.”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일리안이었다.
그는 처음 만난 그날처럼 여전히 유들유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만 꼬질꼬질했던 그때와 달리 깨끗이 씻은 데다가 구불구불한 백금발은 위로 묶고, 깔끔한 셔츠와 바지까지 입고 있었다.
확실히 잘생기긴 했다.
연금술사들은 대부분 연구실에 박혀 있는 편이라 비실비실해서 내일 당장 죽을 것 같은 녀석들이 태반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리안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셀라가 새로 오신 첫째 오라버니가 정말 잘생긴 것 같다고 했지.
일리안은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시스가 경계 섞인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여전히 일리안이 탐탁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일리안은 딱히 개의치 않은 듯,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뗐다.
“아, 딱히 해칠 생각으로 온 건 아니야.”
“그럴 만한 담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군.”
“그냥 아가씨한테 좀 물어볼 게 있어서.”
하시스의 서늘한 태도에도 일리안은 서글서글하게 대꾸했다.
이어지는 그의 부탁이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내밀며 물었다.
“뭐지?”
“나, 혹시 이 황궁을 나가면 죽나?”
아.
그러니까 이 며칠 동안 얌전히 방에 있기는 했는데 갑갑하다 그거지.
이해는 하지만 어처구니없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넌 그냥 이 황궁에서 혼자 놀아.”
“너무하네, 우리 아가씨.”
“그리고 그 아가씨 소리도 하지 말고. 제대로 불러.”
“하지만 동생을 전하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폐하라고 부르는 걸 누가 듣기라도 하면 나는 죽잖아.”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군.”
“알지. 아까우니까 언약을 맺은 거 아니겠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묘하게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었다.
레르하겐처럼 과하게 무심한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능글거리는 녀석은 더 문제다.
결국 일리안은 하시스나 나와 함께일 때만 외출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래 봤자 하시스 성격에 저 녀석과 외출을 할 리 없었고, 나는 이 모양 이 꼴이니 황궁에서 한 걸음도 나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기실 별 쓸모는 없었다.
일리안이 돌아간 뒤 하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저 녀석, 수상하지 않냐?”
“그 난리를 피우면서 등장했는데 수상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그것도 그렇지만, 난 저 녀석만 보면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보면 기분 좋아지는 존재가 있긴 해?”
그에 나는 은근한 비웃음을 담아 물었다.
하시스는 내 대꾸에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그가 삐뚜름하게 웃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있지. 너.”
“드디어 돌아 버렸나?”
“콩알만 한 게 뽈뽈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게 보면 재밌거든.”
“뭐?”
하시스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끈하자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나는 곧, 내가 얼마나 유치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됐다. 너랑 안 싸워. 나보다 어린 애랑 싸워서 뭐 하나. 어른스럽지 못하게.”
하시스는 그런 내 말에 미묘한 미소를 짓다가 다시 웃었다.
언제나 싸늘하게 식어 있거나, 아니면 짜증 가득한 얼굴만 보다가 갑자기 웃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설마 날 놀리는 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웃음기를 지운 하시스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내게는 진실을 보는 눈이 있어. 비록 지금은 피가 옅어져서 너처럼 아예 몸이 작아지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면 식별이 어렵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알아. 나도.”
그래, 안다.
사실 하시스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난 일리안이 진짜로 언약에 묶여 평생 내 감시 아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를 곁에 둔 것은, 첫 번째로는 어차피 그를 죽여 보았자 적에게는 일말의 타격도 가지 않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그를 죽이면 중요한 단서를 놓아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남겨 두면 쓸모는 있어.”
“무슨 쓸모?”
“글쎄? 그거야 저 녀석이 증명할 문제겠지?”
그렇게 말하며 내가 피식 웃었다.
* * *
주인의 성정을 닮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깔끔한 방은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려한 세공이나 값비싼 장식품에도 불구하고 사치하되 천박하지 않고 품위를 드러내는 방.
태생적으로 고귀하고 부유한 자에게만 허용된 켈리어드 대공의 침실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주인과 작별을 해야 했다.
“대공 전하, 준비를 마쳤습니다.”
곧 노크와 함께 들어온 집사의 목소리에 창가에 서 있던 세베르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단정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미풍에 살랑거리며 흔들리고, 이내 서늘하고 조각 같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 달리 살짝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단단한 목선이 드러나고, 넓은 어깨와 다부진 몸매가 누가 봐도 기사의 것이었다.
“지시한 건 다 챙겼나?”
“네, 이미 모든 짐을 수도의 저택으로 완전히 옮겼습니다. 이제 워프를 이용해 대공 전하께서 수도의 저택으로 가시면, 나머지는 시녀장인 켈슨 부인께서 알아서 정리하겠다고 합니다.”
“알겠다.”
탁. 문이 닫혔다.
다시 찾아온 적막 속에서 세베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까 전부터 쥐고 있던 것을 응시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붉은색 벨벳 끈이었다.
다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암시하듯 벨벳의 색이 약간 바래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 몇 년 동안 소중히 보관을 한 것이 드러날 정도로 흠집이 없었다.
그것을 빤히 보던 세베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먹을 꽉 쥐었다.
살짝 구겨진 벨벳의 감촉에 그의 적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에스트리아.”
그는 문득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잔상을 훑었다.
마지막으로 그 잔상은, 꽤 차가운 눈빛을 한 여자가 되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그러는 게 아니었어.”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방을 울렸다.
그러나 그것을 끝으로, 더 이어지는 반응은 없었다.
지나간 일이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 * *
세베르 켈리어드의 알현식은 예정대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수도 복귀를 모르는 이가 없는 상황에서, 알현식만 비공개로 한다고 소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아침부터 셀라는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얼굴로 내 방에 들어왔다.